728x90

'충주 살면 충주사람' 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배려와 소통이 되는 문구로 참 좋다.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 문구 하나로 많은 분이 '충주에 거주하는 사람',' 충주로 온 사람'에서 마땅히 '충주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누구에게도 공감을 불러내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드러난 '말의 힘'과 그 말을 탄생시킨 '생각하는 힘'을 새삼스레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할까...

 

충주에 사는 사람들이 소통하는 인문학 스터디, '여해 인문학 스터디' 2번째 모임이 있었다.

7월은 본격적 장마철이 시작되어 장맛비 속에 참여를 해주셔야 하는 상황이라 주인장으로서 송구한 마음이 크다.

귀한 초등학생 손님들은 아쉽게도 학원 시간 때문에 참석을 못 했지만 회원님들과 충주문화해설사 선생님들의 격려와 적극적인 참여에 절로 힘이 솟는 것을 느낀다. 

권혁분, 이주화 선생님에 이어 이상숙 문화해설사 선생님, 충주 전통문화원 표영춘원장님 께서 처음 참여해 주셨다. 

참석자(존칭 생략): 임원빈, 오희연, 김경은, 박동수, 김명란, 이영선, 권혁분, 이주화, 이상숙, 표영춘 (10명) 

 

오늘도 제대로 된 역사와 그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 그리고 이순신 장군과 현대의 가교역할을 위해 기꺼이 달려와 주신 임원빈 교수님의 강의는 다음과 같다. 

조선 임진왜란 시기 충주는? 일본의 소서행장(고니시) 장수가 병력 1만2~3천명을 이끌고 부산에서부터 상주, 문경, 수안보, 단월로 들어와 벌어지는 전투가 탄금대 전투로 임진왜란과 무관하지 않다. 

탄금대 전투는? 신립장군은? 예전과 다르게 모르는 학생들이 많은 요즘 현실. 

패전한 전투에 대해서는 후진국 상황에서는 패전은 감추려는 경향이 있고 승전은 부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태도가 없지 않아서 이제는 승전도 중요하지만 패전 또한 중요하므로 그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 왜 졌을까? 다시는 이런 상황이 되면 결단코 패배하면 안되지.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패배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지. 

- 이순신 장군의 전승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알아야지, 단순히 승리해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겼지?

어떻게 이순신 장군은 모든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지? 똑같은 조선 수군을 이끌었는데 왜 원균의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에 이르렀을까? 

- 충주도 패전에 대한 소극적 자세에서 더욱 적극적 자세로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 경남에는 칠천량 전투 기념관 설립되어 역사지식을 향상하고 유비무환의 교훈을 적극적 홍보하고 있음) 

 

* 탄금대 전투(彈琴臺戰鬪)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장군을 주장으로 한 조선군이 왜군과 충주에서 벌인 전투 (충주전투라고도 한다)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대병력으로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북방 방비에서 큰 업적이 있었던 명장 신립 장군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임명하여 막게 했다. 신립 장군이 충주에 도착한 뒤 4월 24일 부장 몇 사람과 조령(鳥嶺)에서 형세를 살필 때,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岉) 등이 “적은 군대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마땅히 지형이 험한 조령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립 장군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이곳에서는 기병(騎兵)을 쓸 수 없으니 마땅히 평원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6일 그는 드디어 충주의 서북 4㎞ 지점에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앞에 논이 많아 말을 달리기에 불편하였다.

27일 고니시(小西行長)가 거느린 왜군은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丹月驛)에 이르렀다. 이에 충주목사 이종장(李宗長)과 순변사 이일이 척후로 나갔지만, 적군에게 길이 막혀 신립은 적정(敵情)을 정탐할 수 없었다.

28일 새벽 왜군은 부대를 나누어 본진은 충주 성에 돌입하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으로 숨어 내려왔으며, 우군(右軍)은 산으로 숨어 동쪽으로 나가 강을 건넜다. 신립은 당황해 충주성으로 급히 말을 달렸으나, 군대의 전열이 미처 정비되기도 전에 성안의 왜군이 나팔 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출격, 조선의 관군은 대패하였다.

신립은 탄금대로 돌아와 부장 김여물과 함께 적병 수십 명을 사살한 뒤,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충주의 사민(士民)과 관속은 아군을 믿고 피난하지 않아 왜군에게 희생된 사람이 다른 지방보다 많았다. 신립의 패보(敗報)가 조정에 전해지자 민심이 극도로 혼란해지고, 국왕은 서울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하게 되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탄금대 전투(彈琴臺戰鬪)의 의의

  - 임진왜란 시작된 후 최초의 대규모 야전

  - 사실상 전투는 중반까지는 충주천 이남 달천평야에서 벌어졌고, 전투 후반에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에탄금대 전투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투가 처음부터 끝까지 탄금대 인근에서 벌어진 것은 아니다)

  -  한일 전쟁사에 있어 드문 정규군의 대규모 전투 (조선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

  -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과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대결

  -  기병 vs 보병의 전혀 다른 병종 구성

  -  기마전술 vs 조총 전술의 첫 대결

    (일본 본토에서 도요토미히데요시 조총부대가 전국 통일할 때 같은 구도였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위력을 발휘함) 

  -  활 vs 조총 주력무기도 다름

 

이어서 1회 내용을 리뷰해 주셔서 차근히 다시 듣고 정리하는 시간이 되어 개인적으로 참 좋은 시간이었다. 

(이순신의 어린 시절을 통해서는 동네 친구, 형님을 잘 사귀어야 한다는 것과 젊은 시절을 통해서는 장가를 잘 가야 하며 문과 공부이력과 뛰어난 문장, 문체력을 선조가 알아봄을 통해서는 글씨만 잘 써도 (실기 하나라도 잘하면?)  성공할 수 있다)

새로운 시각인듯 조금은 어긋난 시각인듯 싶지만 꼭 틀린것만도 아니니...

 

본 사업의 취지와 앞으로 스터디를 이어갈 계획에 대해서 말씀 나누고 참여해주신 선생님들의 소감을 들으며 마무리했다.주인장의 딴짓, 집 밖 문지방3 사업을 통해서 귀한 시간, 귀한 인연 만들어 갈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어떤 소통과 연결고리가 생겨날지도 몹시 기대되는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모임을 돌아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