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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세기 개방형 경제사회로 서구, 신분제 급속 소멸

  농촌공동체 존속 강한 제3세계국들 여전히 신분제가 사회구조의 특징- 인도 카스트제도

조선왕조 농업경제 기반 사회, 농민 중심 사회, 다양 인신적 구속, 신분차별

조선왕조 신분제는 중국 수,당왕조 양천제/ 일본 양천제와 역사 경로 다름

  통일신라, 고려, 고대 중국, 일본과 강한 동질성과 연속성을 보이는 동시에 뚜렷한 차별성이 있다.

 

 

임진왜란 직후의 경상도 함양사회 : 조선 중기의 한 단면

 

귀향과 처벌

정유재란 극심 피해 지역, 경남 우도 함양 정경운 가족

159788일 정유재란 발발 피란(17개월간),

1599(선조37) 노량해전(1598) 전쟁종료 100여일 만 귀가, 움막 급조 거처마련

16038월 초가삼간 장만, 다리 뻗고 잘 수 있으나, 북풍한설 여전

16063월 기와집 장만, 귀향 7년만

농사 어려움-, 종자난, 農牛 부족, 일손부족(노비 도망)으로 농기 놓침

1602년 노비 추쇄 작업 성과로 외방노비들 추적, 솔하 노비로 데려옴

1604년 전라도 부안 일대 노비 16명 소재 파악, 신공 파악 서약 받아냄

이로써 노동력 부족으로 파종시기 늦고, 수확부실의 악순환이 해결

전쟁 종료 8~9, 1606~1607년 차츰 정상 회복, 안정상퇴 복귀

귀향 양반 주축 향회 개최- 왜군 부역, 만행자 처벌 진행, 1600년 활기

전쟁 이전 양반 지배 사회 복원, 향리 이하 피지배층 예속 강화

국가 복구 정책 양반 유리 작용 (양반 자발적 참여 초점)

 

복구와 분열

향소, 향교, 서원 등 공공장소 재건 사업 시행

남계서원(정여창 배향 서원) 중건 과정 양반들 분열

중립-하동 정씨(정여창 후손), 풍주 노씨(노진 후손) VS 진주 강씨(강익 후손)

분쟁-추향 대상인 노진과 강익의 위차 설정( 스승 노진-구파, 제자 강익-신파)

경남 우도 정통 학통: (구파: 정여창-노진/ 신파: 김굉필, 정여창- 조식- 정인홍)

신파의 입장 정인홍의 전폭지지, 정인홍의 학문적, 정치적 위상과 관련 문제

신파의 승리 - 구파는 신계서원 따로 세워 노진 배향.

이전 권위 부정하는 새로운 정치세력 등장 역사적 사실 반영

양반층 임진왜란 이후 국가 전쟁 극복 주도세력으로 공식인정

1601(선조34) 경상도 관찰사 윤승훈의 보고서 - 지역사회 분위기 날로 험악,

관찰사 조차 양반들에 적절 재재 불가능하다고 비관적 전망을 보고함.

지역사회 에너지 집약 결과 광해군(1608~1623)대 지역적으로는 경남 우도, 학문적으로는 조식, 정인홍을 공통분모로 하는 북인정권 탄생이 가능.

 

양반 지배구조의 확립

임란이후 양반층 국가 충군 정책 공공연 거부, 저항

1599(선조32) 기해군적(己亥軍籍)이후 양반 자제 2,600명 국가의 신량 확보 계획 저지

1610(광해군2), 1626(인조4) 각기 실시된 호패법 무산

1627년 사족 충군 정책 공식 폐기- 양반 국역의무 면제 공인

양반층 제외 비양반층 모두 상민으로 간주 - 1606병오호적

 -양반 부녀호칭, 도서 사용/ 상민 부녀조이(소이召吏)’, 손도장만 찍음

병오호적항의자 전원 구속, 호패법 실시과정에 차별 지속.

-양반출신 관직자 모두 각패角牌 착용/ 잡류층 이하(관직이 높아도) 목패木牌 착용

모든 부분에서 인물 평가 기준은 신분, 양반 지배구조 시작.

 

1413(태종13) 호패사목작성, 호패법 시행(1416년 폐지)

1624(인조 2) 이괄의 난 발생

1626(인조 4) 호패법 실시(1627년 폐지)

 

 

국가적 평등을 지향한 사회 : 조선 초기

 

국가의 작동 원리

15세기초 국가운영 핵심장치 제민齊民정책 국역체제(운영원리) 양천제

조용조租庸調(토지,요역,토산물) 3세 담당자- 호적에 인민 편제, 국가 운영 참여 가능 기회, 권리 제공,

  국가 정책 양인층에 초점

전체 인구 30%이상 천인층 양인층에 예속, 매매, 증여, 상속=물건

 

개인의 능력에 기초한 개방형 사회

모든 양인 교육, 과거 응시, 관직, 군역 복무 기회 제공-양인 기회균등 보장.

국가 지배신분층 존재 용납하지 않음 - 고위 관료 지위 세습 불가, 특혜 불가

  1553(명종8) 이황 아들 이준이 충군 될까 전전긍긍, 당시 시대 모습 반영

지배층=사족(士族), 조선 초기 혈통 지위 세습신분의미 용어 미발달

  고려 후기 이래 현관(縣官)출신자, 3대에 이르는 후손들 뜻하는 용어

당시양반은 모든 관직자 지칭, 개인 능력 여하에 따라 언제든 획득 가능한 계층을 의미

 

폐쇄형 사회로의 이동

15세기 초 양천제 강화에도 지배 엘리트 귀천의식 강력 존재, 차별의식 여전

정직 출신 관직자,가족 자신은 사족, 그렇지 않으면 상인(常人)이라 부름

양천제는 조선왕조 시작 야심차게 추진 국가 운영체제였으나 국가와 직접 접촉하지 않는 훨씬 넓고 깊은 사회적, 관습적 영역이 존재했으며 그 영역에서 양반, 상인 관계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사족층의 성장

연산군대(1494~1506) 국가 운영체제 근본 문제 발생, 연산군의 폭정, 조용조 3세의 세액 증대, 징수 방식 변화 초래-하층 양인 납세 부담 증대, 경제기반 흔들

하층 양인 몰락, 양천제 동요, 대규모 거주지 이탈, 노비로 신분 전환.

몰락 하층 양인의 경제력 흡수한 상층 양인은 중소지주, 노비 소유주로 전환,

새로운 계층 형성, 사회적 위상에 따른 국가정책 반대, 지위 상응 대우 요구

1525(중종20) 전가사변(全家徙邊)정책 시행, 사족을 재규정.

죄인을 그 가족과 함께 변방(평안,함경)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

사족은 전가사변형이나 여타 체형의 적용에서 제외한다‘-일정 특혜층 공인 시작.

잡류층의 문,무반 정직 참여 배제-마지막역승직진출 폐지.

모든 국역 담당자 관직 균등 개방은 부당하다‘- 사회구조 사족층 위주로 재편, 경색

 

제약과 한계

사족의 사회적 지위 급성장 사실이나 여전히 국가 공권력에 규정받는 존재

사족과 토호(土豪)의 경계 불분명, 언제든 제재, 처벌 대상, 군역의 충군 대상

임란 전쟁 주도권 : 수령(관군 차출) VS 사족(의병활동으로 지역 사수)

곽재우(전국 최초 의병 봉기) 반역 혐의로 체포, 형벌, 의병을 해산 시킴

사족층: 의병 주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

양반층: 전후 복구사업 주도, 격상된 위상 과시, 국가로부터 사회적지위 인정

17세기 이후 새 사회구조 양반 지배구조의 출발

 

 

신분 변화의 이중주 : 조선 후기

 

‘17세기 위기와 부세 총액제로의 전환

사회의 주도권은 양반, 양반 지배구조 정착, 성리학 토대 지배질서 실현

국가 간섭 억제 상황, 농업생산성 향상, 인구 증가, 사회적 안정

인적 자원 파악 능력 강화, 10여년간 가호 수 200%, 인구 220% 급증

1657(효종5) 호적 66만여 호, 인구 230여만 명

1669(현종10) 호적 130여만 호, 인구 500여만 명

 

17세기 위기 = 기온 저하, 인조-효종대부터 본격화 현종-숙종대 최고조,

17세기 내내 지속, 냉해, 수재, 흉년, 전염병 출현, 다수 사망자 발생,

경신대기근(1670~1671), 을병대기근(1695~1699)-사망 140여만 명, 400여만 명 추산,

전체 인구의 11~14%, 25~33% 해당하는 엄청난 피해.

1711(숙종37) 이정법(里定法): 18세기 후반 면리 단위 기초로 한 총액제가

부세 운영의 새로운 방식으로 확립.

호적상 기재 방식 변화-양반층 직역이 유학으로 단일 고정,

양반 직역호 급증, 노비호 반비례 급감, 상민호 완만.

1700년 이전 유학호 3.8~4.8% - 171020% 이상 급증, 6~70% 폭등세

호적상 직역 변화 추이는 양역 정책 변화와 긴밀한 관련

 

양천제 기능의 정지

국가 대민 장악력 약화: 개별 가호 지배면리 단위 간접 지배 방식 변경

납속(納贖)등 합법적 면역 방법, 군역 면제 위해 양반도 아니고 상민도 아닌 계층 광범위 형성, 양천제 기능 정지, ‘반상제’- 16세기 출현, 17세기 강화

 

양반층의 존재

반상제적 단일신분구조의 정점= 양반, 상민층에 차별 더욱 경직.

16세기 중인층 차별, 17세기 서얼층 차별

서얼층 대대적 저항: 1696년 과거 응시 자격 획득, 1708년 당대 아니면 유학 직역 사용 가능, 1772년 과거 합격자 청요직 진출, 1777년 향소, 향교, 서원 직임 허용,

서얼층 성장 한계, 본격적 청요직, 고위 관료 진출 19세기 후반에 가능.

조선왕조 끝까지 양반층은 건재

 

위계의 조정

하위 신분구조의 해체 양상, 상위 신분구조의 경색 양상

노비제 사실상 소멸, 상민층 다양 직역 취득, 양반층 경색

 

 

 

홍순민외7명, 『 조선시대사 1- 국가와세계 , 푸른역사(한국역사연구회시대사총서05),  2022, pp13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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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경제 운영의 원리

 

토지제도와 군사제도에 대해 물었다

 • 명과 조선 국교 이후 사신을 통해 조선왕조의 통치체제 탐문

 • 명 사신 토지제도와 군사제도에 관심(조선왕조 통치체제 정당성 확인 의도)

 • 토지단위 중국: 경무(頃畝), 조선: 결부(結負)

   군사제도 중국: 정규군인, 조선: 농민이 수시로 군역을 짐

 • 결부나 경무 경작지의 넓이를 나타내는 토지의 절대면적 단위

 • 조선시대 결부는 토지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측량한 면적 단위로=‘토지의 생산력을 고려해 측량한 면적단위

  (같은 1결이라도 비옥도 높으면 절대면적 좁음, 낮은 등급은 절대면적 넓음)

 • 모든 땅 동일 결부 수로 동일 생산량 예상, 동일 징수량 부과 가능하므로 결부수만 알면 징수량이 바로 가늠, 편리,

   조세부담의 불균등 줄임.

 • 조선 정부는 재원 지배를 중앙기관이 통일해 파악해 공식화 결부사용은 권력자 개개인 토지지배 가능한 제한의도

 • 토지대장 양안(量案)’작성 : 국가기관이나 개인에 징수권 부여 장부

 • 공납(貢納)’: 지방의 특산물 징수, 납부할 분량의 지방 특산물을 수요처까지 운송 + 요역 , 공납 물품 품목, 액수

    공안(貢案)’: 공납 장부 , 조선 전기까지 가장 큰 비중의 징수항목

 • 군역:‘입호충역(立戶充役)’ 농민도 호를 세워 군사임무를 수행, 군역 종류에 따라 호에 일정 토지 분배,

   ‘병농일치’ 군사제도 /  중국 잦은 전쟁으로 전문군인 양성, ‘병농분리일반화.

 • 조선 초기 조선왕조가 중국 천자의 책봉국인지 탐문하는 상황에서 조선의 전문군인이 없는 제도를 흡족해 함.

 

토지지배에 대한 통제

 • 조선왕조 국가권력은 왕권으로 상징, 왕 개인은 왕실의 일원이나 공적 권력 행사하는 왕권의 주체, 공적권력 미치는

   모든  영역(토지,인민,생산물) 지배

   즉, 건국 초기 국가 경제 운영 체제 원칙-왕권으로 상징되는 국가는 백성 생계 책임, 백성은 납부, 국역의무

 • 1389(고려 창왕1) 토지조사 시행-양전(量田) : 공전(公田), 사전(私田)

   조선왕조 국가 경제 재정비 첫걸음, 토지지배가 왕권으로 집중되는 첫걸음

 • 1417(태종17) 관답험(官踏驗) 전주 개인 에서 국가 일률 경작여부 조사 시작

 • 1445(세종27) 국용전제(國用田制) 전주 임의 징수 토지 축소

 • 1466(세조12) 직전제(職田制) 시행 관직자에 현직, 당대 한해 토지 징수권

 • 1478(성종 9) 관수관급법(官收官給法) 시행, 사전에도 국가 지급,징수권

   모든 토지에 왕권이 일률적으로 미치는 과정= 백성 국역 일률 시행

 • 관직자, 향리, 군인 지급 양반전, 인리위전, 군인전 소멸

   고려 지방 최고 권력층향리’(지방 행정,재정사무)- 단순 향역 부담하는 국역자로 전락

 • 15,17,18세기 초 전국 규모 토지 조사 집중 시행

   1634(인조12) 갑술양전, 1720(숙종44~46) 경자양전 신분, 토지성격 무관 획일조사

 • 17,8세기 대동법 시행-공납(토산물 상납제)이 토지세로 전환

   -경작 토지 기준 징수-대동미(전세 1결당 쌀4~8, 대동미 1결당 12~16)

 

토지 징수를 통한 재정의 중앙집권화

 • 조선왕조 전시기 개별 분산적 징수권 통제강화, 재원 분배도 중앙 일괄처리 납세 수송, 비용 발생-잡역, 잡비로 공식화,     공납(요역徭役으로 인식) 세 부담 불평등 야기

 • 대동법 시행 - 공납 원액과 요역 일부를 토지에 부과, 경작지 생산물인 곡물, ,포로 징수, 상납물품 단일화,

   수송납부 부담 감소, 재정의 중앙집권화

 • 선혜청(宣惠廳) 호조 산하 중앙재무기관, 재원 징수, 분배 재정권 일원화

 • 각종 부세, 지방의 비정규 수취항목, 수송 잡비 등 토지세로 전환

   18세기 중엽 균역법(均役法) 반감된 군역 부담 토지로 징수

   19세기 도결(都結) 각종 조세, 비상재원 토지 일괄 부과

 • 조선말까지 재정권 중앙재무기관 일원 일정수준, 왕권하에 일원화되지 못함.

 

1594 (선조 27) 류성룡의 건의로 대공수미법(대동법의 선구) 실시

1599 대공수미법 폐지

1608 (광해 원년) 선혜법이란 이름으로 대동법 실시

1708 (숙종 34) 전국에 대동법 확대실시

 

 

 

조선 후기 : 국역체계의 정비

 

국역의 의무

() 부세 부담 능력 따라 호구 수를 편제함.

혈연가족, 노비, 고공 등의 종속적 인구 포함

호구 파악에 기초한 부담 : 공납, 요역(노동력 동원), 군역(양인 남성 담당)

정규 병사(번을 서거나 훈련 받는) + 봉족(奉足-정규병을 경제적 보조)

정군의 군역을 군포, 군전으로 대신 받아 자체경비 사용 경향

  대동법, 토지 징수 일원화와 달리 각종 국가기관 개별,분산 파악

18세기 중엽양역실총공표-군액 정액화(지방마다 정해진 액수대로만 군역 징수)

정군으로 출동하는 대신 군포 대납 경향 강.

19세기 후반 군역 운영 지방의 군정 문제시

 

초분을 가리키며 통곡하다

국역 양인 담당 원칙, 17,8세기 공사노비도 군역 부과(신역 이중 부담)

조선전기 국역을 피해 양인-승려, 세력가의 사노비 행세-17세기 사노 대량증가

노비 증가-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중 한쪽 노비면 소생 노비), 양천교혼 1730(영조6) 종모법(從母法) 양천구분 퇴색, 노비 국역 포함- 노비수 대폭 축소

1750(영조26) 균역법 실시 군포 부담 1필로 반감, 양인 군역 부담 감소

황구첨정(黃口簽丁), 인징(隣徵), 족징(族徵)

 

재정시스템의 현실화

 

중앙과 지방 사이의 재원 분배

18세기말 부역실총공표, 지방 세물 수요처, 상납 물품, 분량 작성

국가재원 징수, 분배 액수 지역과 수요처마다 파악(기관 자의적 수취 제한)

  군현에서 납부처까지 수송비 기재(양역실총에 없던)

지방관청 : 중앙 상납 과정 대행, 중앙정부 통헤, 보장, 공식화/ 지역 내 토지 일괄 관리, 재원 일부 지방재정 활용/

  국가 상납 군역 정액 이외 인적 재원 지방재정 운영 재원으로 파악

조선 후기 국가재정 중앙집권화 과정=각 국가관 재정권 제한=지방재정 차원에서 지방재정 운영 독자성 높이고 지방재정   규모 확대

 

삼정문란의 인식

포흠(逋欠): 비공식적 재원 유용, 재정적자 야기, 19세기 환곡(還穀)에서 가장 많이 발생

환곡(還穀): 농업재생산유지 비상식량, 종자등 비축된 곡물, 진휼 목적

삼정(三政): 지방 재정 운영 주요항목, 전정(田政), 군정, 환정(還政)

폐단에도 불구 조선왕조 패망시 까지 환곡제 실시

 

*1458(세조 4) 흉년 대비, 임시 기구로 상평창 실시

*1626(인조 4) 상평창을 진휼청에 통합

*1895(고종 32) 환곡을 사환미 社還米로 개칭

 

재정개혁의 지향점

상납 재원 정액 공표(18세기말)에도 불구하고 곡물, 곡물, 현물 상납 다수

정규 재원 미납사태 빈번, 19세기 후반 물가 급격 상승시 관청 현물납부 종용

19세기 후반 농민항쟁- 삼정 운영 지방 사회 내부 갈등이 주요 원인

1894년 동학농민군 비판

1894년 갑오개혁: 국가기관, 왕실사적 토지지배 일소, 모든 재원 국고귀속

갑오승총 단행(면세지 두전, 궁방토를 수세지 총액 포함 모든 부세 토지, 호에 부과하고 세물을 금납화 결전,호전으로 징수)

 

 

홍순민외7명, 『 조선시대사 1- 국가와세계 , 푸른역사(한국역사연구회시대사총서05),  2022, pp8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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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중심의 통치체제 확립

 

유교적 형정관의 확립

유교 정치사상 : 국가 통치수단의 근본 덕치와 인정(仁政), 형벌은 보조수단

덕으로 복종케 하는 왕도 주장, 힘으로 복종케 하는 패도를 반대

조선 위정자 덕주형보(德主刑輔) 주장 : 교화를 앞세우고 형벌을 뒤로,

덕화, 예교를 근본으로 하고 법률과 형벌을 보조로 삼는다

정치운영에서 형정(刑政)보다 예악(禮樂) 우선시 주장 이유

1. 형벌의 남용 방지 2. 효과 우월 (사전 잘못 예방)

3. 형벌의 위협이 갖는 한계와 부작용 염려(형을 가하되 염치를 알게 할 수 없고 사람을 죽일 수 있으나 어질게 만들 수 없다. 일시적, 학정 )

덕주형보의 궁극적 목표 : 이덕거형(以德去刑) ‘덕으로써 형벌을 없앤다

 

재지사족의 향권 장악

조선왕조 전국 모든 군현 지방관 파견, 획일적 지방 통제, 강력 중앙집권화

수령과 감사등 지방관에 강력 권한 부여(수령칠사-수령 역할 정리)

고려의 수령오사 + 학교를 일으키는 것, 군정을 닦는 것

세종 500호 군현 향교 교관 중앙 직접 파견, 일읍일교 원칙, 삼강오륜

16세기 재지사족 적극 포용 - 수령 통한 직접 지배 방식 한계

양반 규정, 사족, 상민 차별 반상제적 구분 엄격

양천제(양인과 노비)에서 반상제(사족과 상민 및 천민 사이의 신분차별)이행

사족지배체제: 교화, 부세 운영 장악하고 수령과 유착, 향촌사회 지배

17세기 양란 거쳐 백성을 교화는 전범(典範) 예학 발달

예치(禮治) 표출 : 17세기 현종대 예송논쟁(국가적 차원)

주자가례완전 정착, 향약, 향음주례, 향사례 등 향례의 시행 (개인,향촌 차원)

 

비리호송으로 매도된 송사

16,7세기 재지사족 향약 제정 고리대, 불법매매, 도적질, 사기등 사회 문제 자체 조정, 처리, 부세 수취, 환곡 분배, 군역 차출 관여.

향음주례, 향사례, 향약 실시 성리학 이념 향촌 정착, 명분을 어기고 양반 능멸, 송사를 일삼는 쟁송등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비리호송으로 매도

송사에 부정적 관념, 명분 높은 상대 소송 죄악시, 도덕적 타락

 

형정이 중시되는 사회로의 변화

 

예법병중론의 대두

18세기 중후반 분쟁시 시비 분명 가리지 않으면 쉽게 승복하지 않는 새 풍조

억강부약론 (약자의 처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송사 중시 법치사회 전환의미

상언, 격쟁 (국왕에 직접 호소) 등 소원 제도 활성화

정조의 예법병중론 : 예악과 형정은 정치를 돕는 도구로 함께 쓰인다(예악은 음식, 형정은 약 )

 

법률서 편찬과 소송법규집 간행

18세기 신분제 동요, 하층민의 양반에 저항 드러나는 시기

탕평군주 영,정조대 활발한 법전 편찬, 법률서 보금, 각종 형사제도 개선

양반 중심 예치에서 국왕중심의 법치로 통치 방식 전환 역사적 의미

형벌 자제, 삼가는 흠휼(欽恤)정신에 입각한 법전 법률서들 새롭게 편찬

형정과 관련 법조문 대폭 증가, 형조의 위상 격상, 암행어사 전국 파견, 감찰

속대전》《증수무원록》《대명률》《경국대전》《전율통보》《흠휼전칙》 《심리록

다양한 관서지 간행춘관지》《추관지》《홍문관지

가혹한 신체형 금지, 악형, 혹형, 남형, 사형 금지 : 영조대에 거의 모두 폐지

압슬형, 주리형, 낙형, 자자형, 주장당문형, 난장형 등

공형벌체계 추구 : 국가 형벌권 장악, 권세 양반 토호 백성 감금,사형 금지

수령의 송사 처리 중요함에 따라 실무지침서 편찬, 소송제도의 발전

사송유취》《결송유취》《청송제강》《결송유취보

1746(영조22)속대전에 청리(聽理), 문기(文記)조 신설

실체법 보강, 절차법적 규성 다수 마련

개인 편찬 법률지침서 간행, 수령의 행정업 파악, 원활 수행 행정지침서

안정복임관정요,홍양호목민대방,작자미상칠사문답,치군요법

정악용목민심서

 

수령의 교화권 장악

사족지배체제(향회, 향교, 서원 세기구를 바탕으로 형성)는 향교, 서원 중심 재편

17세기 후 유향 분기, 재지사족 향촌사회 지배권 향권 상실, 수령 지위 강화

경반, 향반/ 적파, 서파/ 유향의 분기 등 끊임없는 계층분화, 향전 발생

18세기 면리제 전면 실시, 고을 주민 의무가입, 주현향약 출현(주체 고을수령)

수령의 지방 지배권 강화 : 향교, 서원에 재정적 지원, 운영에 직접 관여/ 부세운영, 면리 임의차출 등 업무 수행 시 재지사족 간섭 배제/ 대등관계 아닌 상하관계/ 사족 통제권 강화

향례(향당의 예)는 향촌 차원 아닌 국가 차원에서 시행, 정조 향음주례 시행 명령(1795). <어제양로무농반행소학오륜행실향음주례향약윤음> 반포(1797),

향례합편편찬

비변사의 지방 장악: 국왕-비변사-감사-수령의 전일적 지방통치체제 확립

지방관에 인사권 행사, 비변사 당상이 전국을 팔도로 나눠 지방 행정,재정관장

수령의 관치 행정 보조 하부조직 : 면리제, 오가작통제

 

 

민인의 권리의식 향상

 

18세기 송사 관례화, 일상화 19세기 쟁송을 권유,지도 풍조 더욱 성행

소송 활성화에 따른 판결에 대한 항의 증가, 송관의 부당한 처결을 감내하지 않고 적극적 불만 표출

감사, 수령 등 명리에 대한 민인들의 직접, 폭력적 도전인 능범관장(凌犯官長)

()(), ()() 신분갈등에 이어 관()() 범관의 일상화

민인들의 권리의식 고양으로 나타난 새로운 현상.

 

 

홍순민외7명, 『 조선시대사 1- 국가와세계 , 푸른역사(한국역사연구회시대사총서05),  2022, pp4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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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 체제 정립기

 

왕권 주도론과 재상권 주도론의 대립

고려말 권문세족을 비판하면서 신흥사대부 대두

전지(田地)와 양인·농민을 과도하게 차지하여 국가재정 허약 문제를 과전법 제정으로 해결하려 함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흥사대부는 두갈래로 나뉨

* 정치체제(왕조 변경)까지 주장하는 급진개혁파 vs 왕조 유지를 주장하는 온건개량파

급진개혁파(정도전)와 신흥 무장집단세력(이성계)에 의해 조선 건국(1392)

재상(宰相) 중심의 정치체제 주장세력과 왕실 중심의 정치체제 주장세력

(고위 관료직 차지한 급진 개혁파의 중심인물들) VS (이방원 중심의 왕실집단)

- 조선 초기의 정치사는 왕권주도론과 재상권 주도론의 대결

- 1398(태조7) 왕자의 난: 이방원측이 정도전 등 공신집단 제거, 주도권장악

태종의 왕권강화 : 의정부서사제 폐지, 육조직계제 시행, 승정원과 의금부 설치

왕명 재위기간
1 태조(太祖, 1335~1408) 1392~1398
2 정종(定宗, 1357~1419) 1398~1400
3 태종(太宗, 1369~1422) 1400~1418
4 세종(世宗, 1397~1450) 1418~1450
5 문종(文宗, 1414~1452) 1450~1452
6 단종(端宗, 1441~1457) 1452~1455
7 세조(世祖, 1417~1468) 1455~1468

세종 재위기간 정국안정 : 집현전 확장정비로 관료 양성, 의정부서사제 부활

 

왕권 주도론의 정착

문종, 단종 재위기간 : 국왕 국정 운영 주도권 약화, 재상권 강화

계유정난(1453) : 세조의 정국운영 주도권 장악한 사건

세조의 왕권강화 : 육조직계제 부활, 집현전 폐쇄,경국대전편찬 시작

경국대전1466(세조6) ~ 1485(성종16) 을사대전으로 최종 반포·시행

경국대전의 완성은 조선의 정치체제가 정립되었음을 의미.

1454 성종15 경국대전반포  
1746 영조22 속대전반포  
1785 정조9 대전통편편찬  
1865 고종 대전회통편찬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

 

왕권 주도론과 재상권 주도론의 절충

•《경국대전: 왕 중심의 행정 실무와 정국 운영(왕의 지위, 하는 일 미규정)

계유정란 공신세력인 훈구파의 형성과 이들의 관권장악, 권력남용 등 부패

훈구파 견제를 위한 성종의 사림파 등용과 두 세력 간의 갈등 고조

언관직 맡아 언론 활동 통해 훈구파 비판, 국왕이 정상 왕권 행사 했던

성종대는 훈구파, 사림파 적절히 조정, 균형있는 국정 운영

왕명 재위기간
8 예종(睿宗, 1441~1469) 1468~1469
9 성종(成宗, 1457~94) 1469~1494
10 연산군(燕山君, 1476~1506) 1494~1506
11 중종(中宗, 1488~1544) 1506~1544
12 인종(仁宗, 1515~1545) 1544~1545
13 명종(明宗, 1534~1567) 1545~1567
14 선조(宣祖, 1552~1608) 1567~1608

 

조선 중기 : 사화와 붕당정치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과 붕당의 출현

사화(士禍) : 사림파의 비판에 훈구파가 정치적으로 보복을 가한 사건

국왕의 통제력이 정상적이지 않던 연산군~명종 재위기간 중 4대 사화 발생

* 무오사화(연산군 4), 갑자사화(연산군 10), 기묘사화(중종 14), 을사사화(명종원년)

사림파는 50여년간 중앙정계 진출 및 결국 정국 주도권 장악

붕당의 출현 : 을해당론(1575, 선조 8)에 사림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기

* 왕권 약화와 현실 정치에서 국왕이 국정운영에 역할을 하지 않게 된 것에서 영향

조선중기(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즉위초 선조) 왕권이 약화, 국왕들의 역할 미미

삼사(三司) 언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직을 놓고 붕당 간 대립

 

붕당의 심화

구 분 출신 훈구 척결 지지인물 정책적 이념 학파적 성향
동 인 신진사림 강경입장 김효원 · 치자(治者) 강조
· 도덕적 자기절제를 통한 부패방지
이황, 조식,
(영남학파)
서 인 기성사림 온건입장 심의겸 · 치인(治人)에 중점
· 제도개혁을 통한 부국안민 추구
이이, 성혼
(기호학파)

정여립 모반사건이 원인이 된 기축옥사(1589, 선조 22)로 동인 대거 축출

과도한 조처였다는 반발을 사 역으로 동인이 정국 주도권 잡음

건저의사건(1591, 선조 24): 왕세자 책봉을 둘러싼 분쟁 으로 동인 집권

정철 처리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동인 세력이 남인·북인으로 분기

* 서인 문제를 두고 강경파는 북인(조식 계열), 포용하려는 온건파는 남인(이황 계)

유성룡 탄핵(1598, 선조 31)후 북인 정권장악, 북인 세력이 다시 대북·소북으로 분기

*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주로 노성한 인물,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연소한 인물

광해군 집권기간 대북이 정국장악(임진왜란 간 의병활동, 주전론 주장으로 가능)

1610(광해군3) 대북의 회퇴변척(晦退辯斥: 문묘 종사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서 배제) 실패, 주도자 정인홍 유생자격 박탈

1614(광해군7) 광해군과 북인은 영창대군 죽이고 선조 계비, 영창대군 생모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격하해 서궁으로 유폐

인조반정(1623)으로 서인 집권, 광해군과 북인 몰락

* 서인주도 + 남인 일부 연합, 국정운영 동반

병자호란 이후 청 관계를 두고 주화론과 척화론 대립

효종 재위기간 북벌정책 추진, 서인계열의 척화파 정국장악

* 효종대에는 국왕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실무형 관료들의 역할증대, 붕당의 역할 미약

현종 재위기간 2차례의 예송논쟁으로 서인과 남인 간 대립

* 기해예송(1659 현종원년) 효종 승하시 자의대비(인조의 계비) 상복 : 서인 정국장악

효종 둘째 아들 가벼운 복을 입어야 한다(서인) VS 왕위 승계는 곧 장자 무거운 복(남인)

왕명 재위기간
15 광해군(光海君, 1575~1641) 1608~1623
16 인조(仁祖, 1595~1649) 1623~1649
17 효종(孝宗, 1619~1659) 1649~1659
18 현종(顯宗, 1641~1674) 1659~1674
19 숙종(肅宗, 1661~1720) 1674~1720
20 경종(景宗, 1688~1724) 1720~1724
21 영조(英祖, 1694~1776) 1724~1776
22 정조(正祖, 1752~1800) 1776~1800

* 갑인예송(1674 숙종원년) 효종비 승하시 자의대비(인조의 계비) 상복 : 남인 정국장악

 

조선 후기 : 환국과 탕평정치

 

환국(換局) - 숙종 재위기간

환국 : 정국 주도집단과 견제집단이 급격하게 뒤바뀌면서 정국이 전환 현상

붕당 간 상호 견제, 비판 기능이 약화되고 상대방에 대한 배제 성향 강화

정국운영 중점이 붕당에서 국왕으로 이동(국왕 중심의 탕평정치로 이행하는 과)

상품 유통 활발, 화폐 통용, 신분제 변동, 향촌사회 변화 등 사회변화로부터 영향

1674 갑인환국~ 1728(영조4) 무신란까지 50여 년간 9차례 발생

경신환국(1680, 숙종 6) 남인 탁남측 병권 장악 기미, 숙종이 남인 축출 서인진출

* 남인 처벌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강경파, 이이계)과 소론(온건파, 성혼계)으로 분기

기사환국(1689, 숙종 15) 희빈장씨 소생 세자책봉 문제로 발생 ,남인 정국장

갑술환국(1694, 숙종 20) 1694년 폐비 인현왕후 복위 문제로 발생, 인 정국장

* 남인은 재기 불능상태로 전락

무고의옥으로 희빈 장씨 사사(1701, 숙종 27)으로 노론 정국장

숙종은 집권 초기 탕평을 표방하고 붕당을 부정했지만, 집권 후반기에는 붕당 간

대립이 왕위 계승문제로 변화되면서 양보할 수 없는 대립 양상으로 비화

* 왕위 계승문제로 붕당의 대립은 왕권에 대한 근본적 위협으로 작용

경인환국(1710, 숙종 36), 병신환국(1716, 숙종 42), 신임환국(1721, 경종1~1722),

을사환국(1725, 영조1), 정미환국(1727, 영조3), 무신란(1728)

노론·소론 간 정국주도권 쟁탈, 무신란 이후 영조 붕당 부정, 노론과 소론 중 논의 온건한 자들을 균등 등용 자신이 정국을 주도하는 탕평책을 추구, 환국 발생하지 않음

 

탕평(蕩平) - 영조, 정조 재위기간

붕당 타파를 표방하면서 정치집단 사이의 인위적 균형 모색

국왕이 정치 운영방향 제시, 또는 관료의 건의를 선택하는 등 방법으로 국정 주도

분쟁을 중간에서 화해하거나 타협점을 찾는 것

영조는 조제보합(調劑保合)을 핵심으로 하는 완론탕평 추구 : 경연 활성화

* 왕권 강화 + 측근 세력 양성

영조대학》《정관정요등 군주권 강조 책 교재 채택 경연 주도

* 규장각 설치로 신진관료 육성, 비변사 기능 강화, 중인,일반민 위한 신문고 설치,

상언·격쟁 활성화, 혹독한 형벌 금지, 1746(영조22) 속대전 간행 반포.

* 국왕 자신이 백성의 어버이로 국정운영의 중심으로 인식

붕당 타파, 외척을 포함한 기득권 집단을 제거해 왕권 강화 국왕에 권력 집중 정조의 탕평 : 의리와 원칙 고수 준론탕평 표방, 붕당 타파, 기득권집단

제어 왕권 강화 방향, 규장각(왕립 도서관,연구소) 설치, 대전통편 편찬,

장용영 신설 군문 통일, 병권장악, 화성 축조 지방 지배 강화, 신해통공 실시 상업활성화 , 상언,격쟁 활성화, 서얼 청직에 진출 허용, 노비추쇄법 혁파

 

조선 말기 : 세도정치

 

정조의 급작스러운 승하로 국왕 중심의 정치권력이 일시에 붕괴

서울에 기반을 둔 소수의 유력한 가문에 의해 국정주도권 좌우

*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

세도가문 중심의 권력구조 변화

고위관직의 정치 독점(2품 이상 고위직만 정치적 기능 발휘)

비변사에 권력 집중, 공식적으로 국가권력에 개입(비변사 요직도 세도가문이 독점)

세도정치의 폐단 대두

사익만을 추구하고 사회문제 방치로 민생 피폐

홍경래의 난(1811, 순조 11), 임술민란(1862, 철종 13) 등 민중 봉기

순조~ 근대의 기점이 되는 1876년 개항 까지 조선후기와 구별 - 조선말기

고종 즉위(1863), 흥선대원군의 실권 장악 세도정치 타파에 국정운영 집중

1876(고종13) 강화도조약, 개항

 

홍순민외7명, 『 조선시대사 1- 국가와세계 , 푸른역사(한국역사연구회시대사총서05),  2022, pp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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