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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사업의 마지막 모임이 있는 날, 여해 인문학 스터디 5회 모임에서는 중원문화재단 모니터링님, 어가선 선생님 2분이 처음 참여해주셨다. (집밖문지방3 사업모임 중 총 참여자는 25명- 모니터링 참가자 제외)

참석자(존칭 생략): 임원빈, 오희연, 김경은, 박동수, 김명란, 이영선, 권혁분, 이주화, 이상숙, 연경연, 정기화, 김인동, 표영춘,전 준, 어가선, 모니터링 참가자, 초등학생 이주영, 이하영, 어머님(19명) 

 

집밖문지방3사업 일환의 여해 인문학 스터디 5회 모임에 총 참석자는 25명이었고 그 중 충주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 6명, 

숲해설사 선생님 1명, 충주전통문화원장님 등 4명, 서도소리보존회 충북지회 회원이자 이배사(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다음카페)회원 7명, 초등학생 4명, 학부모님 3명

과연 참석을 해주실 것인지, 관심을 가져주실 것인지,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등등 마음 한편의 불안감은 안도와 기쁨과 기대와 감사로 사업이 마무리 되었다. 어느 하나 그냥 되는 것이 없는지라 시작도 번잡하지만 매번의 후기와 결과보고까지 마무리를 하고 나면 비로소 자생의 스터디가 이어질 예정이다...마치 이미 오래된 인연처럼 마음을 열고 공감하고 소통의 시작을 함께 해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마음 속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모든 모임에서 매번 새로오신 분들을 대상으로 첫 인사는 교수님 소개를 하게 되는데 조금은 남다르고 특별한 교수님의 이력을 새삼스레 짚고 넘어가 볼까 한다. 임원빈 교수님은 충주가 고향, 해군사관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학사, 석사, 박사 졸업, 동양철학(유학 전공), 해군사관학교 철학교수, 손자병법 연구 즉 유학과 병법이 이순신장군 연구의 큰 토대라고 하셨다. 역사적 사실과 같이 가면서도 다른 결이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시나 지난 강의 리뷰...영화에서 처럼 백병전은 없었다, 전국의 이순신 동상들, 관점 바꾸기,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웠다. 완벽한 승리의 큰 요인(함포), 열세한 상황에서 어떻게 우세한 상황으로 전투양상을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의 판옥선은 일본의 새끼부네보다 크기가 큰 이유는? 거북선처럼 지붕을 덮은 이유는?... 정답은?

일반적인 영웅사관에서 벗어나 탁월한 리더 이순신을 알아보자...

 

탁월한 리더십의 양축은 전문성과 도덕성이고 이 둘이 겸비되어야 한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다르지 않다.

리더가 갖추어야 할 자질 중 중요한 것은  전문성과 직무지식인데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직무지식에 정통하지 않고는 절대 좋은 리더가 되기 어렵다. 전문성에는 실력과 변화혁신역량이 있고 이순신 장군에 비추어 볼때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방대하고 세밀한 자료를 토대로 지금까지 연구가 가능한데 이순신 장군의 직무지식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여러 사례들에서 입증되듯이 우리와 꼭같은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감히 흉내낼 수 조차 없는 탁월한 실천력과 추진력이 있었다. 

 

특히 리더십의 한 축인 도덕성을 가치의식과 인격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전쟁은 없어야 하지만 역사속 불가피한 전쟁에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쟁범죄! 이순신의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었다. 수천년 동안 조선의 은혜를 입어온 일본이 갑자기 아무 이유없이 침략하고 백성을 도륙하고 도성을 침탈한 일본을 불의의 침략자로 정의하고 하늘을 대신해 철저히 응징하고자 했다. " 역천과 순천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고야 말겠다!" 

노량해전 전날 기도에 " 이원수 모조리 무찌를 수만 있다면 내 한몸 이제 여기서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현대에서도 '역천자는 망하고 순천자는 흥한다'와 맞는 유학의 개념이 이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칠천량 해전 이후 명나라에서 대규모 수군 파병 (400여척, 2만여명 /당시 조선수군 60여척, 7천여명/ 일본 300여척)  했고 일본의 소서행장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으로 철군하려고 뇌물로 명나라 군에 부탁하고 들어주려 할 때 이순신 장군은 

불의의 집단을 단 한 척도 돌려보내지 않고 철저히 응징하려 했었다. 따라서 노량해전은 불의의 집단에 대한 철저한 응징으로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했던 이순신 장군의 가치의식, 역사의식을 반영한 위대한 해전으로 평가하셨다. 

 

이순신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기라성 같은 전문성 지닌 지휘관, 참모, 의병, 승병, 백성들이 모여 들었다. 리더 원균 주변에는 사람들이 흩어졌다. 왜 이런 정반대의 현상이 생겼을까?  자신의 이익을 넘어 진정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이순신 장군의  고결한 인격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인격 감화형 리더십은 리더십의 극치, 최고봉이다. 큰 위기에 닥쳐 민관군의 전투역량을 통합시켰다. 인격이 경쟁력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1. 직무지식에 정통한 실력있는 리더가 되라

2.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혁신역량을 길러라

3. 정의가 승리하는 사회/ 역사를 만들어라

4. 나를 넘어 국가공동체를 앞세우는 고결한 인격을 갖춰라.

 

* 이순신의 인생관 -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에 쓰이게 되면 죽기로 일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권세 있는 곳에 아첨하여 한 때의 부귀영화를 훔치는 것 같은 것은 내가 제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이항복의 충민사기)

 

* 병조정랑 서익과의 일화 - 훈련원 봉사는 훈련원의 인사담당 실무자, 상관이던 서익이 자신의 친지를 훈련원 참군(종7품)으로 승진시키려 했음. " 아래 있는 자를 건너 뛰어 올리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승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공평한 일이 아니며, 이렇게 하려면 법규를 고쳐야 하는데 이런 일로 법규를 고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병조판서 김귀영과의 일화 - 병조판서 김귀영이 강직하고 능력 있는 이순신을 눈 여겨 보고 자신의 서녀를 이순신에게 출가시키려고 중매인을 보냄. " 벼슬 길에 막 나온 제가 어찌 권세있는 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습니까?"

 

* 전라 좌수사 성박과의 일화 -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정3품) 성박이 발포로 사람을 보내어 객사 뜰 앞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 거문고를 만들려고 함. " 이것은 관청의 물건이오, 또 여러 해 길러온 것을 하루 아침에 베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라고 하며 베러 온 자를 돌려 보내니, 수사가 크게 성을 내었으나 베어가지는 못하였다. 

 

* 정승 류전과의 일화 - 정승 류전이 이순신에게 좋은 화살통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활을 쏘게 된 기회에 화살통을 달라고 하자, " 화살통을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남들이 대감이 저에게 받은 것을 어떻다 할 것이며, 소인이 바치는 것을 어떻다 하오리까? 화살통 하나로 대감과 소인이 함께 더러운 지탄을 받게 되는 것이 미안할 따름 입니다." 하니 정승도 "그대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사업 마지막 모임 자축 파뤼~
표영춘 회장님께서 깜짝 선물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청향만당"
주인장에게도 멋진 선물을 하사해주셨답니다. " 장락무극"
'난중일기'에 이어 충주 충무공 이수일 장군 자료집(이석희선생님 후원) 기념촬영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사히 좋은 공부시간 되었습니다! 또 만나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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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주 전 3차 강의 리뷰를 시작으로 여해 인문학 스터디 4차 모임이 시작되었다. 최근 이순신 관련 영화에서부터 이순신 )장군 동상이 시사하는 바를 생각하고 그리고 임진년 총 4차 출동 (1차 출동: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 (2차 출동: 사천, 당포, 당항포, 웅포 해전), (3차 출동: 한산 해전, 안골포해전), (4차 출동: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 해전)의 상황표를 보며 '이순신 장군은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웠다' 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몇 년 전 어느 기회에 임 교수님의 임진년 출동 상황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머릿속이 확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임교수님의 강의를 몇차례 들으면서 왜 역사와 철학이, 음악과 철학이, 모든 학문과 철학이 연결되어야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이라도 하는 계기가 되었다.  

 

4차 모임에는 문화해설사 정기화 선생님, 김인동 선생님, 전 준 선생님, 김혜량 회원이 처음 참여해 주셨다.

참석자(존칭 생략): 임원빈, 오희연, 김경은, 박동수, 김명란, 이영선, 김혜량, 권혁분, 이주화, 이상숙, 정기화, 김인동, 표영춘, 연경연, 엄대진, 전 준(16명)  

 

이 모임의 취지와 수준 높은 강의를 알아봐 주시고 적극적 홍보와 만족도를 보여주시는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주인장에게 잘했다 칭찬해주시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중 큰 성과라고 한다면 충주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들께서 관심을 가져주셨다는 것인데 워낙 역사 공부를 많이 하는 선생님들을 사실 개별적으로라도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장마철에 바쁘신 중에 짬을 계속 내주시니 그저 감사드릴 뿐이다. 충주에는 20여분의 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들이 계시는데 이 모임에는 1회부터 4회까지 총 6분의 충주문화관광 해설사 선생님들께서 참여해 주고 계신다. 이 사업과 별도로 이후 자체적인, 지속적인 스터디 의견에 동의도 해주셨다. 선생님들의 역량 강화에도 도움을 받으실 수 있겠지만 충주에 관해 어느 누구 보다 많이 알고 계시는 선생님들을 통해 보다 진~한 충주사람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자~각설하고 4차 모임의 강의를 복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임원빈 교수님은 강의 동안 여러 질문을 던져주시는 데 그 중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일본의 함선 척수가 훨씬 많을 텐데, 구체적인 해전 국면에서 어떻게 조선의 함선 척수가 더 많을까?  2. 이순신 장군이 아무리 탁월한 리더라 해도 어떻게 한척도 격파당하지 않고 적선 330척을 격파할 수 있었을까?

(임진년 제1차~4차 출동에 걸쳐 전체 조선 수군이 격파한 함선 수는 약 330여척)  

 

정답은 '조선 수군은 세계 최고의 전투력을 보유한 군'이라는 것이다. 일반 상식과 크게 다른 점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조선은 준비되지 않은 전쟁에 닥쳐 모든 것이 열세였을 것이고, 그래서 20일 만에 전국이 초토화되지 않았던가 ㅜ.ㅜ 

세계 최고의 전투력을 보유했던 수군이라는 것이 과연 맞는 말일까? 아이러니하고도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분명하다.

일본은 섬나라로 바다에서 싸우는 수군력이 막강한 것이 아니었었나? 당시 조선은 전쟁 준비가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일본 함선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쳐들어왔을텐데? 최악의 열세 상황에서 일본에 맞서 싸워 이긴 구국의 영웅, 피눈물의 영광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상식이 깨지는 순간...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리더십 역량 이외에 다른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기! 대형 화학 무기, 함포

조선수군이 일본 함선을 격파할 수 있는 무기를 지닌 반면 일본 수군은 조선수군의 배를 격파할 무기가 없었다!

 

* 조선의 화약 무기 : 우리 민족의 화약 무기는 고려 말 최무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화포를 만들어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무찔러 승리했으며 그의 아들 최해산은 조선시대 아버지 최무선의 뒤를 이어 화약 전문가가 되었다.  태종과 세종 때 조선의 화약 무기들을 개발하는 일을 맡았음. 최해산은 주로 화살을 쏘던 화약 무기들을 돌이나 쇠로 만든 탄환을 쏠 수 있도록 바꾸고 한 번에 수십 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화차도 개발했다. 

  세종 때 가장 많은 화약 무기가 개발되었는데 당시 만들어진 화약 무기들은 1592년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하게 된다. 

 

- 천자총통(길이 136Cm)

- 지자총통(길이 89Cm)

- 현자총통(길이 79Cm)

- 황자총통(길이 50Cm)

- 승자총통(길이 58Cm)

- 신기전기 화차

- 총통기 화차

- 대장군전

 

- 비격진천뢰 : 조선의 비밀 병기, 일본이 조선 침략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조선의 화포장이었던 이장손은 비밀리에 포탄 하나를 개발, 임진왜란 일어나기 직전에 비격진천뢰를 완성했다. 폭발할 때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고 하여 이름 붙였다. 이전의 포탄은 날아가 적선이나 성벽을 깨부수는 역할을 했지만 이장손이 개발한 비격진천뢰는 포탄 내부에 설치한 대나무 통 안에 점화선을 감아 놓아서 탄환이 날아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터지게 되어있다. 일종의 시한폭탄...

포탄을 빨리 폭발시키려면 점화선을 10번 감고, 늦게 폭발시키려면 15번을 감았다. 포탄 속에는 날카로운 쇳조각들도 들어있어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비격진천뢰는 점화선에 불을 붙여 손으로 던지기도 했지만, 주로 '완구'라는 총통을 사용했다. 대완구를 사용하여 발사하면 포탄이 500~600보 정도 날아갔으며 적진 속에서 굴러가다 강한 폭발음과 함께 터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무기가 바로 비격진천뢰였다고 하는데 비격진천뢰를 처음 본 일본군들은 포탄 주변에 모여 구경하다 폭발과 함께 죽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 대열의 한가운데를 굴러가다 강한 폭발음과 함께 터지는 폭탄의 위력에 크게 겁을 먹고 일본군은 비격진천뢰를 '귀신폭탄'이라 부르기도 했다. 진주대첩, 행주대첩, 한산도대첩등 여러 전투에서 사용되었다. 

 

- 대완구(길이 65Cm)

 

  조선 수군은 멀리 있는 적선을 향해 큰 쇠 탄환이나 장군전을 쏘았으며, 적선이 장군전을 피해 조선의 판옥선에 가까이 오면 조란환을 총통으로 쏘았다. 지자총통에는 200여 발, 현자총통에는 100여 발의 조란환을 넣어 한꺼번에 발사!

조선 수군의 총통은 일본군 조총보다 더 멀리 쏠 수 있었고 동시에 많은 탄환을 쏠 수 있었던 만큼 성능이 좋았다. 이렇게 총통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것이 승리의 주요 요인 중 하나이다. 

 

 일본 수군의 해전 전술은 원거리에서 조총이나 활을 쏘고, 근거리에서는 빠르게 적군의 배에 올라타서 일본의 장기인 칼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즉 조총 전술로는 인명 살상은 가능하지만 조선 수군의 배를 격파할 수 없고 임진년( 1592 ) 첫 해기간 일본 함선 330여척이 격파된 데 비해 조선 함선이 단 한 척도 격파되지 않았던 전적, 해전 양상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함대에 올라 오지 못했다= 백병전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간 결론은! 조선 수군은 일본군보다 훨씬 막강한 첨단 수군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의 완벽한 승리는 바로 이러한 세계 최고의 질적 전투력을 보유한 조선 수군을 말그대로 영끌해서? 열세의 상황을 우세한 상황으로 만들어 버린 탁월한 리더십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임원빈 교수님은 이러한 우세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병법의 요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수적으로 열배나 많은 열세한 상황을 어떻게 우세한 상황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또다시 던지신 질문이었다. 

조선 수군에 대한, 영웅에 대한 일반 상식이다 시피 한 개념을 하나씩 하나씩 증거와 논리로 분석해서 떠먹여 주시니 꼭꼭 씹어서 잘 받아먹고 소화를 잘 해서 좋은 에너지로 만들어야 할 텐데.. 이렇게 해서 우리의 역사를 일부라도 복원시킬 수 있는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훌륭한 리더의 조건 첫 번째는 바로 실력!

자신이 속한 조직의 직무 지식에 정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좋은 리더가 될 수 없다....다음 강의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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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 계속되는 비로 뉴스가 넘쳐나고 이 우중에도 여해 인문학 스터디의 열의는 점점 더해 가고 있다.

 

여러 인문학 강의와 콘텐츠들이 현수막에 걸리지만 임진왜란과 관련이 적을 것만 같은 충주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 관련한 수준 높은 강의를 연속해서 들을 수 있고 자발인 관심과 열의를 보여주시는 선생님들을 만나며 여러 분에게 꼭 필요한 사업이고 모임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2~30년 연구의 정수를 아낌없이 쏟아 주시는 임원빈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지금 우리는 공부할 때...' 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시의성 적절한 사업과 주인장의 운영이 곧 타이밍이 아니고 무엇이랴.

 

문화해설사 연경연 선생님, 숲해설가 엄대진 선생님, 박순덕 선생님께서 처음 참여해 주셨다.

참석자(존칭 생략): 임원빈, 오희연, 김경은, 박동수, 김명란, 이영선, 권혁분, 이주화, 연경연, 엄대진, 박순덕, 초등학생 이주영, 이하영, 어머님(14명) 

 

비 많이 오는 초복 날 여해 인문학 스터디 3회차 모임이 진행되었다. 

복날에 빠질 수 없는 수박! 준비~

 

영화 명량, 한산에서 보았던 배 위에서의 백병전은 과연 사실이었을까? 

 

* 백병전(白兵戰, hand-to-hand combat) : 적에게 접근해서 이나 , 총검, 개머리판, 맨몸 등으로 근접전을 펼치는 것. 

 

* 명량해전 : 13척 vs 133척 중 조선 수군의 배는 1척도 손상을 입지 않고 왜선 31척이 격파됨 ( 최소 3000명 이상 사망)

선두에서 싸운 이순신 통제사 배에서의 전사자는 2명, 부상자 3명(적의 조총에 의한) (난중일기) 

당시 해전이 대량 살상 전투 양상이었다면 절체절명의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위 기록은 엄청난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 것. 명량해전 당시 전투는 일정한 정도의 거리를 두고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즉 접전이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배 위에서의 백병전이 없었다 = 칼싸움이 없었다. 

 

* 한산해전 : 영화에서 보인 거북선의 충돌전술, 용머리 들락날락, 백병전, 학익진을 펼쳐서 59척 모두 격파는 모두 사실과 다르다. (사실 - 개전 초기에 학익진을 펼쳐서 적의 선두의 2~3척을 집중 포격 격파를 통해 기선을 제압함)

전라 좌수군(이순신), 전라 우수군(이억기), 경상 우수군(원균) 삼도의 수군이 함께 전투를 벌였으나 장계의 기록에는 전라 좌수군만 전사자 19명, 부상자 115명 기록,  인구비례로 살펴보면 한산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 전체적 전사자 50여명, 일본 왜선 59척 격파 및 납포(8000~9000명 전사)

 

* 새로운 관점에서 한산 해전을 살펴보면 '한산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벌인 대표적인 해전'이었다. 

이길까, 질까의 고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왜적선을 모조리 전멸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전과를 확대시킬 수 있을까? 적선뿐만 아니라 적선 위의 병사들까지 모조리 섬멸할 수 있을까? 를 고민하고 작전 계획을 세웠다. 

 

* 거북선의 전과: 영화에서처럼 좌충우돌했다면 최소한 적선이 5~10척 파괴됬을 법 하지만 실제 전과는 좌돌격장 이기남이 일본 대선 1척 나포(충돌해서 격파한 것이 아니라), 일본 수군 머리 7급 베었고, 우돌격장 박이량이 일본 수군 머리 1급을 베었다. 즉 정리하면 한산 해전에 참전한 거북선은 2척이고 전과는 왜 대선 1척 나포, 왜군 머리 8급으로 영화에서 처럼 좌충우돌 충돌 전술을 행한 것은 아니다. 

 

* 나포(拿捕) : 사람이나 배, 비행기 등을 사로잡음. 

 

 

*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통해서 알아야 할 이순신 선양의 역사와 사실

 

  이순신의 선양 역사는 나라의 위기 상황이 있을 때 어김없이 소환되었다. 조선의 제2 부흥기를 주도했던 정조대왕은 조선사에서 이순신 장군을 가장 선양한 임금이셨고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 아산 현충사, 광화문 동상)

 

이순신 장군의 최초의 동상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1952년 (6.25 전쟁 진행될 때)  

어김없이 칼을 들고 있는 동상들이지만 활을 든 최초의 동상이 제작되었다(2015년 해군사관학교)

조선은 활의 나라 vs 일본은 칼의 나라 

이순신의 어린 시절 부터 전쟁놀이 활쏘기 등장, 난중일기에 거의 매일 같이 등장하는 활쏘기 훈련 (칼싸움 훈련은 한 곳도 없다), 조선은 동이족, 유학의 나라 유학자로서 선비로서의 수양 덕목 중 활쏘기(전쟁 때는 무기, 평시에는 정신 수양)는 기본.

 

* 유능한 장수의 조건 (손자병법 - 군형편) 

古之所謂善戰者,  勝於易勝也     옛날에 이른바 싸움을 잘하는 자는 쉬운 승리에서 승리하는 자이다

 故善戰者之勝也, 無智名, 無勇功”   고로 싸움을 잘하는 승리는 지혜롭다는 명성도 없고 , 용맹스럽다는 공도 없다

 

보통은 일당백이면 멋지고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쉬운 승리는 당연하다고 여겨 일당백의 승리에 도취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 모든 강의의 킬포인트가 숨어 있는 듯! (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 숨죽여서 머리를 계속 써야 했다ㅜ.ㅜ)

 

위대한 병법가의 큰 문장을 통해 그것을 시종일관 그대로 적용한 이순신 장군의 '이기는 싸움'에 관해 우리는 당연한 생각에서 벗어나 '쉬운 승리로 만들어 놓고 싸우는 것', '쉬운 승리를 만드는 과정'에 주목하고 공부해야 한다. 

당연한 듯하지만 사실 엄청난 행간이 아닐 수 없다. 간과할 수 있는 '쉬운 승리'의 과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 이순신이 유능한 장수인 진짜 이유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공부라는 것이 이런 것이지...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괜히 마음이 뿌듯하다... '준비없는 승리는 없다' 

 

* 이순신이 유능한 장수인 이유 - 관점 바꾸기 

 - 열세한 상황에서 우세한 적과 싸워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웠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대한 증명도 거침없이 자료로 보여주셨다. (임원빈 교수님 강의 강력하게 추천!)

성웅 이순신 장군의 생애, 임진왜란 사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지만 그것들과 함께 꼭 가져야 할 공부를 제대로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쁘고 절로 감사함이 든다. 임원빈 교수님 좋은 강의 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공부는 속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말이 비로소 실감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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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살면 충주사람' 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배려와 소통이 되는 문구로 참 좋다.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 문구 하나로 많은 분이 '충주에 거주하는 사람',' 충주로 온 사람'에서 마땅히 '충주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누구에게도 공감을 불러내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드러난 '말의 힘'과 그 말을 탄생시킨 '생각하는 힘'을 새삼스레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할까...

 

충주에 사는 사람들이 소통하는 인문학 스터디, '여해 인문학 스터디' 2번째 모임이 있었다.

7월은 본격적 장마철이 시작되어 장맛비 속에 참여를 해주셔야 하는 상황이라 주인장으로서 송구한 마음이 크다.

귀한 초등학생 손님들은 아쉽게도 학원 시간 때문에 참석을 못 했지만 회원님들과 충주문화해설사 선생님들의 격려와 적극적인 참여에 절로 힘이 솟는 것을 느낀다. 

권혁분, 이주화 선생님에 이어 이상숙 문화해설사 선생님, 충주 전통문화원 표영춘원장님 께서 처음 참여해 주셨다. 

참석자(존칭 생략): 임원빈, 오희연, 김경은, 박동수, 김명란, 이영선, 권혁분, 이주화, 이상숙, 표영춘 (10명) 

 

오늘도 제대로 된 역사와 그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 그리고 이순신 장군과 현대의 가교역할을 위해 기꺼이 달려와 주신 임원빈 교수님의 강의는 다음과 같다. 

조선 임진왜란 시기 충주는? 일본의 소서행장(고니시) 장수가 병력 1만2~3천명을 이끌고 부산에서부터 상주, 문경, 수안보, 단월로 들어와 벌어지는 전투가 탄금대 전투로 임진왜란과 무관하지 않다. 

탄금대 전투는? 신립장군은? 예전과 다르게 모르는 학생들이 많은 요즘 현실. 

패전한 전투에 대해서는 후진국 상황에서는 패전은 감추려는 경향이 있고 승전은 부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태도가 없지 않아서 이제는 승전도 중요하지만 패전 또한 중요하므로 그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 왜 졌을까? 다시는 이런 상황이 되면 결단코 패배하면 안되지.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패배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지. 

- 이순신 장군의 전승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알아야지, 단순히 승리해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겼지?

어떻게 이순신 장군은 모든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지? 똑같은 조선 수군을 이끌었는데 왜 원균의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에 이르렀을까? 

- 충주도 패전에 대한 소극적 자세에서 더욱 적극적 자세로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 경남에는 칠천량 전투 기념관 설립되어 역사지식을 향상하고 유비무환의 교훈을 적극적 홍보하고 있음) 

 

* 탄금대 전투(彈琴臺戰鬪)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장군을 주장으로 한 조선군이 왜군과 충주에서 벌인 전투 (충주전투라고도 한다)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대병력으로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북방 방비에서 큰 업적이 있었던 명장 신립 장군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임명하여 막게 했다. 신립 장군이 충주에 도착한 뒤 4월 24일 부장 몇 사람과 조령(鳥嶺)에서 형세를 살필 때,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岉) 등이 “적은 군대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마땅히 지형이 험한 조령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립 장군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이곳에서는 기병(騎兵)을 쓸 수 없으니 마땅히 평원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6일 그는 드디어 충주의 서북 4㎞ 지점에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앞에 논이 많아 말을 달리기에 불편하였다.

27일 고니시(小西行長)가 거느린 왜군은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丹月驛)에 이르렀다. 이에 충주목사 이종장(李宗長)과 순변사 이일이 척후로 나갔지만, 적군에게 길이 막혀 신립은 적정(敵情)을 정탐할 수 없었다.

28일 새벽 왜군은 부대를 나누어 본진은 충주 성에 돌입하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으로 숨어 내려왔으며, 우군(右軍)은 산으로 숨어 동쪽으로 나가 강을 건넜다. 신립은 당황해 충주성으로 급히 말을 달렸으나, 군대의 전열이 미처 정비되기도 전에 성안의 왜군이 나팔 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출격, 조선의 관군은 대패하였다.

신립은 탄금대로 돌아와 부장 김여물과 함께 적병 수십 명을 사살한 뒤,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충주의 사민(士民)과 관속은 아군을 믿고 피난하지 않아 왜군에게 희생된 사람이 다른 지방보다 많았다. 신립의 패보(敗報)가 조정에 전해지자 민심이 극도로 혼란해지고, 국왕은 서울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하게 되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탄금대 전투(彈琴臺戰鬪)의 의의

  - 임진왜란 시작된 후 최초의 대규모 야전

  - 사실상 전투는 중반까지는 충주천 이남 달천평야에서 벌어졌고, 전투 후반에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에탄금대 전투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투가 처음부터 끝까지 탄금대 인근에서 벌어진 것은 아니다)

  -  한일 전쟁사에 있어 드문 정규군의 대규모 전투 (조선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

  -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과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대결

  -  기병 vs 보병의 전혀 다른 병종 구성

  -  기마전술 vs 조총 전술의 첫 대결

    (일본 본토에서 도요토미히데요시 조총부대가 전국 통일할 때 같은 구도였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위력을 발휘함) 

  -  활 vs 조총 주력무기도 다름

 

이어서 1회 내용을 리뷰해 주셔서 차근히 다시 듣고 정리하는 시간이 되어 개인적으로 참 좋은 시간이었다. 

(이순신의 어린 시절을 통해서는 동네 친구, 형님을 잘 사귀어야 한다는 것과 젊은 시절을 통해서는 장가를 잘 가야 하며 문과 공부이력과 뛰어난 문장, 문체력을 선조가 알아봄을 통해서는 글씨만 잘 써도 (실기 하나라도 잘하면?)  성공할 수 있다)

새로운 시각인듯 조금은 어긋난 시각인듯 싶지만 꼭 틀린것만도 아니니...

 

본 사업의 취지와 앞으로 스터디를 이어갈 계획에 대해서 말씀 나누고 참여해주신 선생님들의 소감을 들으며 마무리했다.주인장의 딴짓, 집 밖 문지방3 사업을 통해서 귀한 시간, 귀한 인연 만들어 갈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어떤 소통과 연결고리가 생겨날지도 몹시 기대되는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모임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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