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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오리엔트의 사회와 문화

 

  제3절 메소포타미아

 

  역사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 유역에서도 이집트와 거의 동일한 시기(5000~3000 B.C.)에 신석기시대로부터 문명 단계로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이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문명 탄생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는 나일강의 이집트문명에 대한 것과 비슷하였으나, 이집트의 지세가 비교적 폐쇄적인 데 반하여, 두 강 유역은 주변의 사막이나 고원의 여러 민족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러한 관계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많은 민족의 이주와 정복, 이에 따른 지배자의 교체가 있었다. 새로운 민족의 이주나 정복에 의한 교체는 이미 신석기 시대에도 있었던 모양으로 ''이라고 불리는 문화지층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여러 민족의 이주나 정복은 파괴를 수반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문화의 발전을 촉진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문명의 발생과정을 단계적으로 표시한 할라프(Half, 5100~4300 B.C.), 우바이드(Ubaid, 3900~3500 B.C.), 우루크(Ukr, 3500~3100 B.C.) 및 제므뎃-나스르(Jemdet-Nasr 각 문화기는 새로운 문화 요소의 도입과 새로운 발명으로 문화 내용이 단계적으로 더 풍부해지고 있다. 할라프기의 작고 소박한 신전 건축은 우루크기에 이르러서는 245*100ft. 의 넓이를 가진 거대한 신전 건축으로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진흙과 햇볕에 말린 벽돌로 쌓아 올린 지구라트, 즉 성탑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우루크기의 신전 계산서인 토판문서(clay tablet)에는 문자의 원형이라고도 할 그림과 기호가 적혀 있으며, 그것은 제므뎃-나스라기에 이르러 보다 더 문자에 가까워지고, 기원전 3000년이 초의 우르 고왕조기에는 현대 의학자들이 충분히 해독할 수 있는 문자가 되었다. 이 무렵에는 두 강의 하루에 위치한 수메르에 많은 도시국가가 형성되고, 곧이어 그 북쪽의 아카드에도 도시국가가 나타나 그 수는 15개 내지 20개에 달하였다. 도시의 중심은 신전이었고 도시를 둘러쌓은 성벽 밖에 농경지와 목장이 있었다. 이 도시국가는 신관을 겸한 왕에 의하여 지배되었으며, 도시의 주민은 승려, 전사, 귀족, 상인, 공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의 물과 또한 동일한 공급지로부터 운반되는 외국 산물 자에 의존하는 지리적 통일체였으나, 수메르와 아카드의 도시국가들은 서로 끊임없는 대립과 분쟁을 거듭하였다. 메소포타미아가 정치적으로 통일되는 것은 사르곤 왕(Sargon, 2350 B.C.) 때의 일이다. 사르곤 왕은 두 강 유역은 물론이요, 시리아의 엘람에까지 이르는 큰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무너졌다. 이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다시 수습한 것은 우르의 수메르왕조였으며, 사르곤 왕의 옛 영토를 다시 회복하여 제국적인 행정조직의 정비에 착수하고 종래의 지방적 관습법의 법전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약 1세기 동안(2050~1950 B.C.) 계속된 이 수메르왕조도 서쪽으로부터 침입해 온 아무르 족(Amurites)에 의하여 무너지고 이에 수메르 쪽의 메소포타미아 지배가 끝났다.

바빌론에 자리 잡은 아무르 족은 점차 주변 지역을 평정하여, 18세기 말경 함무라비 왕(Hammurabi, 1728~1686 B.C.) 때 메소포타미아는 다시 견고하고 강대한 통일왕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함무라비는 직접 행정관과 사법관을 임명하여 정무를 관장하고, 재래의 도시법을 대치할 통일된 법전을 편찬함으로써 이 새로운 바빌로니아왕국의 통일과 질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왕국도 함무라비 이후 점차로 쇠퇴하여 기원전 16세기 후반에는 지금의 이란 쪽으로부터 하시기 트족이 침입하여 약 4세기 동안 바빌로니아왕국을 지배하였다. 카 시트 지배 하의 바빌로니아는 문화적으로는 침체기였고, 정치적으로도 함무라비 시대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바로 이집트가 신왕국 시대를 맞이하여 제국주의 정책으로 시리아 방면으로 진출하고, 소아시아에서 새로 일어난 히타이트의 세력이 역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진출하는 한편, 두 강 상류 쪽에 미 탄(Mitanni)이라는 신흥국가가 출현하는 등 오리엔트 세계가 활발한 움직임과 접촉 속에 하나의 국제사회를 형성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정치와 사회구조
메소포타미아의 정치구조는 관개농업과 부역 및 공납에 의존하는 동양적인 전제국가라는 점에서는 이집트와 유사하다. 메소포타미아의 전제군주도 신적인 권위를 겸유하고 있었으나, 이집트의 파라오가 호루스신 의 화신이요, 태양신의 아들인 것과는 달리 신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신적 권위는 파라오보다 약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현 세신으로서 절대적으로 군림하고, 전 국토가 그의 소유였으나, 메소포타미아, 특히 바빌로니아에서는 시민 개개인의 재산 소유, 상속, 매매가 인정되고, 정치적 지배자는 정의를 행하는 자의 성격을 겸유하여 법에 의한 통치라는 개념이 함무라비법전 등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는 함무라비법전은 사회계급을 명확하게 셋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귀족, 승려, 전사, 관사(서기 포함) 등이 제일계급이고, 상인, 금융가, 공인, 농민 등이 평민을 구성하고, 최하층에 노예가 있었다.

문화
메소포타미아문화의 기조는 수메르문명이었고, 바빌로니아는 이를 계승 발전시켰다. 수메르, 바빌로니아 사회가 기본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메르, 바빌로니아 문명은 도시 문명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또한 다신교였다.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은 저마다 수호신을 갖고 있었고, 그러한 도시의 수호신을 넘어선 신들도 적지 않았다.

승려들에 의하여 기록된 신전 계산서의 그림과 기호는 점차 발달하여 기원전 3000년을 좀 지나서는 설형문자(cuneiform letter)가 되었다. 젖은 진흙 판에 갈대의 펜으로 쐐기모양의 문자를 기록하여 햇볕에 말리거나 구워서 보존하였으며, 이를 토판문서(clay tablet)라고 한다.

수메르에서 시작된 설형문자는 그 후 아카드, 바빌로니아 등 셈어족 계통의 민족의 문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전역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표시하는 데 사용되는 국제적인 문자가 되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있어 문자를 해독하고 서기가 된다는 것은 모든 육체적인 노동이나 군역으로부터의 해방과 위엄있는 관리의 길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서기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가 궁정이나 신전에 마련되어 단순한 글공부만 아니라, 산수를 비롯한 기본적인 학과목의 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길고 엄격하였으며, 주로 상류층의 자제가 이를 이수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문학작품은 이집트의 경우보다 많이 남아 있다. 그것은 신과 영웅에 관한 서사시로부터, 신에 대한 찬가, 도시의 파멸과 정의로운 사람의 부당한 고난을 슬퍼하는 한탄, 격언 등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한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은 영웅 길가메시(Gilgamesh)에 관한 서사시이다. 길가메시는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를 응징하기 위하여 신이 보낸 괴력의 사나이와 친구가 되어 모험을 찾아 긴 여행길에 오른다. 괴물과 괴수와 싸워 죽이는 등 많은 모험을 겪은 끝에 친구가 죽자 이를 몹시 슬퍼하고 불사의 열쇠를 찾아 헤매다가 이에 실패한다. 그에게도 죽음이 다가왔을 때 길가메시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를 조용히 받아들인다.

   제4절 동부지중해 연안과 오리엔트의 통일

 

  해상민족  페니키아  헤브라이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동부 지중해 연안의 작은 나라들의 활동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기원전 1000년이 전반의 오리엔트서의 흐름은 오리엔트 세계의 통일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 과업에 먼저 성공한 나라는 아시리아(Assyria)였다.

헴 어족계통의 아시리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지만 장기간 메소포타미아의 주된 세력 밖에서 그 영향을 받으며 미미한 존재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아시리아가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기원전 2000년이 후반 미 탄 네가 히타이트의 압력으로 쇠퇴한 결과, 미 탄이 너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한 후부터이다. 티그리스 상류에 위치한 수도 아시르를 중심으로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해, 기원전 12세기 말 경에는 북으로는 흑해,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에까지 이르렀다.

아시리아는 이러한 정복과 팽창과정에서 피정복민 전체의 강제 이주, 대학살, 약탈, 파괴 등 잔인한 군국주의의 성격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오리엔트서의 전환기의 격동에 휘말린 탓인지, 기원전 1000년이 초까지 비교적 잠잠하였던 아시리아는 재빨리 제철 기술을 배워 철제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군대와 전차를 갖고 오리엔트의 통일을 위한 정복 전쟁에 나섰다. 그리하여 기원전 8세기 말경에는 드디어 오리엔트 전체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수도를 니네베로 옮겼다. 아시리아는 니네베에 도서관을 만들어 수메르, 아카드 이래의 문헌을 수집하는 등 문화적인 면도 있으나 역대의 왕은 사자와 같은 맹수사냥을 즐기는 사나운 정복자였고 그들의 대제국도 오래 가지 모샇였다.

기원전 7세기 말 아시리아제국은 이란고원의 메디아와 바빌론의 칼데아 왕조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니네베가 파괴됨으로써 붕괴하였다. 그 후 이집트와 리디아를 포함하여 4국이 정립하는 형세를 이루었으나 주도권을 잡은 것은 카데아왕조의 신바빌로니아왕국이었다. 특히 네부카드네자르 2세 때의 바빌로니아왕국 번영은 고바빌로니아 왕국의 번영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으며, 수도 바빌론은 오리엔트에서 제일가는 국제적 대도시가 되었다. 헤브라이인의 이른바 '바빌론유수'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신바빌로니아왕국의 번영도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이란고원에 위치하여 메디아에 신중하고 있던 인도-유럽어족의 페르시아(Persia)의 키루스(Cyrus, 557~529 B.C.)는 메디아 왕위를 빼앗고, 리디아를 정복한 후 바빌론을 점령하였다. (538 B.C). 다음 캄비세스(Cambyses, 529~522 B.C.) 때 이집트를 정복하고 다리우스 1세(Darius 1 그 영토를 더욱 확장하여 오리엔트 전체를 완전히 통합하는 대제국을 확립하였다... 페르시아의 문화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그들의 종교였다. 예언자 조로아스터(Zoroaster, 기원전 6세기)가 창건하였다는 조로아스터교는 처음 지혜의 신인 이후라-마즈다를 숭배하는 지적을 하고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점차로 광명의 전신에 대한 암흑 악신의 도전과 투쟁이라는 이원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명의 선한 신인 이후라-마즈다를 따르는 자는 영원의 생명과 행복을 얻게 되고, 악신에게 가담한 자는 지옥의 불에 파멸될 것이라는 교리가 생겨나고, 유력한 승려계급이 형성되었다. 광명의 신을 받들기 때문에 배화교라고도 부르며, 그리스도교, 그리고 후에는 이슬람교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에도 전해졌다.

 

 오리엔트사회와 문화의 한계

  로마인이 '빛은 동방(오리엔트)으로부터'라고 말한 것처럼 오리엔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문자를 가진 문명단계로 발전하고, 기원전 3000년기에 짜임새있는 사회와 전제국가, 그리고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켰다...이러한 사회구조의 정체성은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이에 따라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문화의 틀도 되풀이되고 계승될 수밖에 없었고, 마술적인 사고가 또한 새로운 발전을 억제하였다.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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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오리엔트의 사회와 문화

  제2절 이집트

  역사
  나일강변의 신석기 사회가 문명단계로 발전한 것은 기원전 5000년 기로부터 4000년이기에 걸쳐서이다. 선왕조기라고도 부르는 이 시기에 나일강변의 토템 씨족의 촌락들은 도시로 성장하고, 도시를 중심으로 그리스인이 노 메스(nomes)라고 부른 지역적인 단합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노 메스가 합쳐서 상·하 왕국이 형성되고 기원전 3000년을 좀 지난 무렵, 상왕국의 메네스(Menes)왕에 의하여 통일왕국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메네스왕을 포함하여 초기왕조는 아직도 반전설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고, 이집트의 역사가 확실해지는 것은 제3왕조로부터 시작되는 고왕국 시대(2850~2200 B.C.)부터이다.

  멤피스(Memphis)를 수도로 한 고왕국 시대는 이집트의 발전기요 번영의 시기였다. 지금도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기제(Gizeh)의 거대한 피라미드들은 제4왕조기(2600~2500 B.C.)에 건설된 것으로서, 당시 파라오의 절대적인 권력과 국력의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고왕국도 말기에는 혼란 상태에 빠지고, 그것이 다시 수습되어 견고한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제11왕조기(2100~2000 B.C.)의 일이다. 새로이 수도를 테베(Thebes)로 옮긴 중왕국도 얼마 안 가서 쇠퇴하고, 마침내 소아시아로부터 침입해 온 아시아계통 힉소스(Hyksos)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80~1580 B.C) 제 17왕조기에 이집트는 힉소스를 몰아내고 신왕국을 수립하였다. 신왕국 시대(1580~1090 B.C.)의 이집트는 고왕국 시대의 국력과 번영을 되찾고 크게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힉소스가 전해준 말이 끄는 전차로 강화된 군사력을 가지고 제국주의적인 팽창정책을 썼다. 그 결과 이집트의 세력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로부터 멀리 유프라테스 상류에까지 미치게 되었으며, 소아시아로부터 남하하는 히타이트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나 신왕국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그 세력이 기울어지고 외부로부터는 이른바 해상 민족에게 시달림을 받는 등 쇠퇴하여 기원전 12세기 이후에는 리비아(Libya), 에티오피아(Ethiopia) 등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제26왕조기(663~625 B.C.)에 일시 부흥의 노력이 행하여졌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페르시아( 525 B.C.), 알렉산더대왕( 331B.C.) 그리고 로마에( 30 B.C.) 각각 정복됨으로써 이집트의 고대사의 막이 내려지게 되었다.

  정치와 사회구조
  이집트는 고왕국 시대에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성했으며, 그것은 동양적 전제주의 국가였다. 이 전제국가 지배자의 칭호는 '큰집'이라는 뜻을 가진 파라오(pharaoh)였다. 파라오는 신의 후손이요, 신적인 존재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국가요 정부였으며, 정치와 종교는 파라오에게 결합하여 있었다. 전 국토가 이론상으로는 파라오의 소유였으며, 상업이나 농업 등 모든 경제활동이 그의 통제 속에 있었다. 왕실에 납부되는 모든 생산물은 상, 하 이집트의 두 개의 창고에 수납되었으며, 일찍부터 2년마다 전국의 토지, 수확량, 가축의 수효, 왕실 창고의 재고량 등의 조사가 실시되었다.

  성스러운 절대적인 지배자인 파라오 밑에 그를 보좌하기 위한 승려와 관료들이 있었다. 관료조직은 오늘의 재상과 장, 차관에 해당하는 직책이 있고 그 밑에 각종 가공 분야별 부서가 있었다. 이 가공작업에는 주로 노비가 종사하였으며, 빵의 제조, 가마니와 새끼줄의 제조, 탈곡, 직조 등이 행하여졌다. 이러한 행정기구의 실무자로서 많은 서기가 있었는바, 그들은 문자를 독점하고 큰 자부심을 가졌으며, 또한 실제로 존경받기도 하였다.

  피라미드는 그대로 이집트의 사회계급 구성을 상징하고 있다. 파라오를 정점으로 하여 그 바로 밑에 중앙의 고위관직자와 지방 장관 등 소수의 지배적인 귀족층이 있고, 일반승려와 서기를 비롯한 하급 관리, 상인, 공인 등이 일종의 중간계급을 형성하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과 노예는 피라미드형 계급구조의 최하부에 속하였다. 노예는 그 대다수가 전쟁포로였고 피라미드 건조나, 궁전 또는 영지 내의 각종 육체노동에 혹사당하였으나, 생산노동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 일은 없고, 따라서 이집트의 사회생활이나 경제생활의 유기적인 구성요소는 아니었다. 농민은 실질적으로 토지에 결박된 예종이나 다름없고, 이집트의 관개농업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생산계층이었을 뿐 아니라, 많은 부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상인이나 공인은 스스로 농민보다 그 지위가 높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러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사실은 농민이나 다름없이 예속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계급구조는 인도의 카스트와 같이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중왕국 시대에는 중간계층이 진출하고, 신왕국 시대에는 승려계급의 세력이 증대하는 등 사회적 변동도 있었으나, 사회구조의 기본적인 틀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문화

  이집트의 농경사회나 도시는 저마다 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다신교적인 신앙 속에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낸 신은 매의 신 호루스(Horus)와 태양신 라(Ra) 또는 레(Re)였으며, 중왕국 이후 수도가 된 테베의 수호신인 아몬(Amon) 또한 널리 숭배되었다. 이집트의 생명인 나일강과 농업의 신인 오시리스(Osiris)는 사악한 동생 세트(Set)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대지와 풍요의 여신이며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Isis)는 전 국토를 헤매면서 오시리스의 사지와 몸을 찾아 그의 생명을 부활시켰다. 이 신화는 죽음과 부활, 농산물을 포함한 식물의 성장과 고사를 상징하고 있거니와, 호루스는 오시리스의 아들인 동시에 파라오는 호루스의 화신이라고 생각되었다.

  오시리스의 신화에도 보이듯이 이집트인은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은 일단 사람의 몸을 떠나지만 귀족들의 경우 그 영혼이 다시 시체로 돌아와서 죽은 후에도 생활이 계속된다고 믿었다. 바로 이러한 신앙으로 인하여 거대한 피라미드가 건조되고, 영혼이 돌아올 수 있도록 미라가 제조되고, 피라미드를 지키듯이 스핑크스가 그 옆에 세워졌다. 중왕국 시대 이후에는 너무나 사람 눈에 띄고 도굴이 심한 피라미드를 피하여 파라오의 무덤을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마련하게 되었다. 룩소르 근처에 있는 이른바 '왕가의 골짜기'도 이러한 왕실의 묘지인바, 1922년에 그곳에서 투탕카멘(Tutankhamen, 1361~1352 B.C.)의 무덤이 거의 원상에 가까운 상태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이집트의 종교사상 매우 특이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파라오가 아멘호테프 4세이다. 그는 역사상 최초의 이상주의적인 종교개혁가로서, 재래의 다신교를 폐지하고 태양신인 아톤(Aton)을 신봉하는 윤리적인 일신교를 만들어 이를 넓히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이 크나 톤이라 개명하고 수도를 테베로부터 아마르나로 옮겼으나, 그의 종교개혁은 실패하여 당대로 끝나고 말았다.

  나일강의 홍수와 이에 의존하는 관개농업의 필요와 자극으로 천문학과 측량술이 발달하고, 산수와 기하학도 발달하였다. 이집트인은 나일강이 매년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것을 관찰하고 태양력을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즉, 1년을 365일로 잡고, 이를 30일 단위로 12개월로 나누고, 남는 5일은 축제일로 정하였다. 한편 기하학의 발달은 거대하고 어려운 피라미드 건조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집트의 의술 또한 마술적인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면서도 병자에 대한 구체적인 관찰에 입각하여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신성문자(Hieroglypy)로 알려진 그림문자가 주로 사용되었으나, 이의 행서체 내지 초서체도 있었다. 이집트인은 나일강변에서 자라는 파피루스(Papyrus)로 만든 종이에 갈대의 펜과 유연으로 만든 잉크를 사용하여 기록하였다.

  이러한 파피루스에 기록된 문학작품으로서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별로 많지 않으나 이집트 문학이 시, 단편소설, 역사 등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집트의 예술은 피라미드, 스핑크스, 신전 등 거대함을 자랑하는 건조물로부터 신전의 벽화와 각종 장식, 대소의 조각, 섬세한 솜씨를 보여주는 금은보석의 세공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집트의 예술은 이미 이루어진 양식이나 틀을 전통적으로 답습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그런대로 그들의 예술적 감각이 범상치 않았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어떤 면에서는 판에 박은 듯한 이집트 예술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이 아마르나시대(ca. 1417~1358 B.C.)의 예술이다. 이는 종교개혁을 시도한 이 크나 튼 시대의 예술로서 전통적인 양식이나 틀을 깨어버린 생동감에 넘치는 자연주의 경향의 예술이며, 이 크나 톤의 왕비 네페르티티(Nefertiti)의 두상은 아마르나 예술의 대표적인 걸작의 하나이다.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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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오리엔트의 사회와 문화

 

  기원전 5000년으로부터 3000년 사이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신석기문화가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급속도로 발전하여 문자를 가진 청동기 문명이 탄생하였다. 이는 세계역사상 문명단계로의 가장 빠른 발전이었으며, 인류는 이제 기나긴 석기시대의 문자 없는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서 문명단계로, 역사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나일강 하구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 두 지역을 연결하는 동부 지중해 연안을 포함한 이른바 '기름진 초승달(fertile crescent) 지역을 중심으로 오리엔트 세계의 사회구조와 문화의 기본적인 틀이 잡힌 것은 기원전 3000년기이며, 그것은 그 후 근본적인 구조적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기원전 2000년기에 이르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이외에 새로이 소아시아와 동부 지중해 연안 그리고 에게해가 오리엔트세계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고, 기원전 1000년기에는 철기시대로의 발전과 더불어 에게문명을 제외한 오리엔트 세계의 모든 지역이 하나의 역사적 세계로 통합된다. 

  오리엔트문화 자체는 오늘의 유럽문화의 원천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리엔트 세계는 많은 역사적 변천을 겪으면서 오늘의 중동지역 내지 아랍 세계로 이어졌다. 그러나 오리엔트문화는 그리스, 로마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리스문화의 형성에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 에게문명 또한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제1절 오리엔트 세계의 역사적 발전

 

  문명의 탄생

  기원 전 5000년기와 4000년기(5000~3000 B.C)에 걸쳐 나일 강변의 이집트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고대동방 또는 오리엔트에서는 여러 방면에 걸친 급속한 문화발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즉, 청동기의 사용, 문자의 발명, 도시의 출현, 정치조직의 발생, 사회계급의 형성, 조직적인 종교의 발달과 신전 및 신관의 출현, 선박과 차륜의 발명 등, 석기시대의 미개 상태를 벗어나 역사시대의 문명단계로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리엔트 지방의 대하 유역에서 가장 일찍이 문명이 탄생한 요인의 하나는 확실히 그곳의 지리적 조건이었다. 나일강이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은 풍부한 물과 기름진 땅을 제공하였고, 그 유역에는 다양한 식용식물이 풍부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역에는 중요한 여러 발명에 필요한 자원이 있었다. 그리고 강력한 사회조직을 촉구하고 대규모의 협동으로써 푸짐한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고, 또한 새로운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고 필요한 물자를 운반할 교통의 편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하 유역의 무성한 갈대의 밀림을 개척하고, 소택지의 물을 뽑고, 수로나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다는 일은 촌락을 넘어선 규모가 큰 사회 전체의 협동을 필요로 하는 거대한 사업이요 도전이었다. 이러한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려면 견고한 조직과 강력한 통제, 그리고 일꾼들의 급식을 위한 다량의 잉여 식량이 필요하였고, 잉여 식량의 전제조건이 되는 생산력의 발전을 위하여 각종의 개량과 발명이 또한 필요하였다. 일단 치수사업이 완성된 후에도 끊임없는 감시와 보수작업이 필요하였고, 그렇게 많은 정력을 기울여 확보한 땅을 수호하기 위하여 군대도 필요하였다. 이러한 모든 필요조건을 충족시킨다는 신석기시대의 씨족 단위의 촌락으로서는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촌락으로부터 도시로 씨족사회로부터 국가로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미개사회로부터 문명사회로의 발전이 진행되어야 했다. 

 

   역사적 발전

  오리엔트 세계는 그 속에 부분적으로 서로 다른 사회와 문명을 내포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통합된 역사 세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리엔트세계의 역사적 전개는 크게 ➀ 형성기(기원전 3000년기), ➁ 발전기(기원전 2000년기), ➂ 통일기(기원전 1000년기)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오리엔트 세계의 형성기인 기원전 3000년기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오리엔트 세계의 정치와 사회구조, 그리고 문화의 기본적인 틀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두 지역 간에는 문물의 교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독자적인 발전을 하고, 다른 지역은 아직 오리엔트 세계의 역사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리엔트 세계의 발전기인 기원전 2000년기에는 그 전반기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바빌로니아(Babylonia)왕국이 그리고 후반기에는 신왕국 시대의 이집트가 저마다 그 세력과 문화의 전성기를 자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소아시아에서 히타이트(Hittite), 두 강 살류지역에서 미탄니(Mitanni)가 새로 일어나고, 에게해에서는 크레타문명이 또한 발전하게 된다. 이리하여 오리엔트 문화는 백화난만의 양상을 띠게 될 뿐 아니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그리고 미탄니 등이 특히 이 시기의 후반기에 전쟁과 외교문서의 교환 등, 직접적인 접촉이 활발해짐으로써 오리엔트 세계는 역사적인 상호연관성을 가진 하나의 국제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기원전 12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오리엔트 세계를 주름잡던 강대국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쇠퇴하고, 크레타문명을 계승한 미케네문명 또한 이 시기에 파괴된다. 이렇듯 강대국들이 때를 같이하여 쇠퇴하고 미케네문명이 몰락한 데는 그 나름대로 저마다 내부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지만 이 시기는 오리엔트 세계 전체로 본다면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일대 전환기이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이 시기에 이른바 '해상민족'으로 알려진 정체불명의 종족들이 동부 지중해를 무대로 바다와 육지에서 오리엔트 세계의 여러 국가와 도시들을 침범하고 파괴를 자행하여 그들의 쇠퇴를 촉진하였다. 

  이처럼 오리엔트의 강대국들이 쇠퇴한 틈을 타서 활발한 활약을 시작한 것이 동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던 페니키아(Phoenicia)와 헤브라이(Hebrews)와 같은 작은 나라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오리엔트 세계는 얼마 안 가서 통일기를 맞이하게 된다. 

  최초로 통일에 성공한 것은 미탄니의 쇠퇴로 흥기하게 된 아시리아(Assyria)였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통일은 견고하지 못하고 완전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오리엔트 세계는 곧 칼데아(Chaldea, 신바빌로니아왕국)를 비롯한 4국으로 분립하게 되었으나,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Persia)가 이집트를 포함한 오리엔트의 전지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이와 같이 전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하여 견고한 대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는 그 세력을 서방으로 뻗쳐 기원전 5세기 전반에 그리스와 역사적인 충돌을 하게 되었으며(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세기 말경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정복되었다. 이로써 기원전 3000년경에 청동기문화를 성립시켰던 오리엔트 세계의 역사는 일단락을 짓게 된다.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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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인류의 기원과 선사문화

 

  오늘날 인류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은 인류(Homo)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백만년 이전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아득한 옛날이다. 최초의 인류를 포함한 고생인류(古生人類)는 해부학적으로 오늘의 인류(현생인류)와는 달랐고 그들이 살았던 자연환경도 지금보다 가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직립보행하고 자유롭게 된 손으로 도구를 제작하고 불을 사용할 줄 알았다. 그리하여 생김새는 원숭이와 비슷하였으나 그들은 동물의 세계를 등지고 문화창조의 길에 나섰다. 

  주로 사냥과 고기잡이에 의존하던 기나긴 구석기시대를 거친 후 농경과 가축사육으로 식량을 생산하게 된 신석기시대에 이르면 문화발전의 속도가 전보다 훨씬 빨라진다. 그리하여 지금으로부터 6천년 내지 5천년 전에 문자가 발명되고 청동기가 제작되고, 국가가 형성되어 인류는 미개 상태를 벗어나서 문명단계로 발전하였다. 

 

  적어도 300만년에 달하는 기나긴 인류의 역사는 문자의 기록 유무로 크게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되며, 문자의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를 인류학, 고생물학, 지질학 등의 여러 학문의 힘을 빌려 연구하는 학문이 고고학이며 고고학에서 인류 역사를 구분하는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중 석기시대가 선사시대에 해당한다. 

 

   제1절 인류의 기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장 오래된 인류의 화석유골  '루시'라는 애칭, 아프리카 동부에서 발견,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

 

   제2절 구석기문화

 

문자로 된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는 고고학에서 말하는 석기시대(Stone Age)에 해당한다. 역사시대의 길이는 전이나 다름없는 5천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사시대, 즉 석기시대가 물리적인 시간으로만 따진다면 엄청나게 길다. 

  200만년에 달하는 긴 석기시대는 다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구분되며, 구석기시대가 끝나는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이므로 구석기시대가 압도적으로 길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는 종래 석기를 때려 깎아서 만들었느냐, 또는 곱게 갈아서 만들었느냐, 즉 타제석기냐 마제석기냐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그것에 보태어 그들의 생활에 가장 중요한 식량을 자연에 의존하고 이를 자연에서 채집하는 식량 채집자(food-gatherers)였느냐, 또는 식량을 직접 생산하는 식량 생산자(food-producers)였느냐, 다시 말하여 식량획득의 방법을 구분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구석기시대는 타제석기를 사용한 식량 채집자의 시대이고, 신석기시대는 마제석기를 사용한 식량 생산자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의 변동에 따라 초원 대신 삼림이 나타나고, 들소, 사슴, 맘모스 등이 추위를 따라 북으로 이동하면서 그 모습을 감추자, 구석기 말기인과 그들의 동굴예술도 사라졌다. 그 후 유럽대륙에는 신석기 시대로의 과도기인 중석기시대(Mesolithic Age)가 나타난다. 이 시기의 유럽인들은 동굴 대신 해변, 하천 또는 호숫가에 떼를 지어 산재하면서 새로 나타난 삼림의 짐승이나 물고기를 잡아서 생활하였다. 그들의 문화는 빈약하였으며 새로운 문화발전은 그들에게서가 아니라 멀리 서남아시아와 나일강변에서 일어났다...이  시기의 유럽의 여러 유적에서 개의 뼈가 발견되는 보아 개의 사육은 중석기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생각되며, 주로 사냥에 이용되었다. 나무를 처리하는 쐐기, 도끼, 까뀌, 정과 같은 목수용 도구가 발달하였으며 설원을 달리는 썰매가 나타났다. 

 

   제3절 신석기문화

 

  빙하시대가 끝난 후 얼마 안 가서 서남아시아 일대에서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생활자료를 생산하기 시작함으로써 환경에 대한 인류의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즉, 농경과 가축사육으로써 식량 채집자로부터 식량 생산자로 변하고, 이에 따라 인구의 증가에 대응하여 식량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잠재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일부 고고학자들은 신석기혁명(Neolithic Revolution)이라고 부르고 있다.

 

  토기와 직조 

  신석기시대의 특징인 토기 제작은 농경으로 인한 잉여 식량의 저장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처음 간단한 토기 제작에 성공한 신석기시대의 도공은 그것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형태와 문양을 다듬고 채색까지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토기 제작은 신석기인의 예술적 감각, 창조 의욕 그리고 고도의 지식과 기술의 산물이었다.

  신석기시대 초에 이미 이집트나 서남아시아의 여인들은 옷감을 짜고 있었다. 나일강변에서는 아마(亞麻)가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양털이 원료로 사용되었다. 북과 베틀이 발명되고 후에는 면사와 생사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신석기인은 또한 진흙, 갈대, 통나무, 돌, 실가지 등으로 오막살이나마 가옥을 지었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각종의 도구가 발달하고, 석기는 타제석기 대신 마제석기가 사용되었다. 그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이 돌도끼로서 한때 고고학자들은 이를 신석기시대의 가장 중요한 표지로 삼기도 하였다. 

 

  촌락생활 

  대체로 핏줄을 같이하는 씨족에 의하여 점거되었으며 신석기사회는 이와 같은 씨족단위의 촌락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초기 신석기시대의 묘지나 주택에 권세있는 사람의 것으로 지목되는 무덤이나 궁전같은 건물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사회가 비교적 평등하고 민주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서부 및 북부유럽에 널리 퍼져있는 고인돌, 선돌과 같은 거석기념물 내지 분묘는 역사시대로 들어간 오리엔트 정치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신석기시대의 농경사회에서는 대지의 생산력이 매우 중요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은 성적 특징을 과장한 여상을 만들어 대지의 생산력을 상징시켰다. 이러한 여상은 지모신(地母神 Mother Goddess)이었다고 생각되며, 대지의 생산력을 확보하고 풍작을 기원하는 마술적인 의식이나 축제와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신석기문화의 전파

  신석기사회의 발전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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