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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BC404)

패권전쟁 = 페르시아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 vs. 스파르타 공격/승리

 

펠로폰네소스전쟁의 배경

아테네 vs. 스파르타

- 해외진출 문제: 페르시아 전쟁 승리를 주도한 아테네의 패권/해외 팽창. 스파르타(소극적인 자급자족적 농업국. 견제심리)

- 성벽/신전 문제: 아테네(재건!) vs. 스파르타(반대!). 스파르타 해명 요구에 아테네 사절단(“우리는 동맹국의 지지를 얻었고 그 결과 제국을 현재보다 확장하지 않을 수 없다!”)

- 민주화 문제: 페르샤전쟁에 기여한 하층민에 참정권 부여. 아테네 민주정(자유로운 시민 기풍)의 에게해 확산에 스파르타 불안

- 헤일로타이(helot) 문제: 이주민(스파르타인)이 원주민을 정복/노예화. 스파르타인(5) vs. 헤일로타이(10). 국가 소유. 경장병 참전. 노예 반란의 불안노예 억압/군국주의화

 

- 헤일로타이 반란(BC 465) 진압: 스파르타는 반란 진압 동맹군 소집에서 아테네군 거부. 진압 후 추방된 반란군을 아테네가 수용 후 스파르타 주변에 정착 스파르타 분노

- 델로스동맹(Delian League, 아테네) vs. 펠로폰네소스동맹(Peloponnesian League, 스파르타 중심).

- 스파르타(농업국. 무역/이윤에 무지) vs. 아테네(델로스동맹의 기금/회의장소, 델로스 아테네 이전. 해상권/이윤 장악)

 

펠로폰네소스전쟁의 무기

- Phalanx & 장비의 경량화

- 팔랑크스(Phalanx) vs. 팔랑크스(밀집 장창 보병대), 소수의 기병 등장. /투창 사용. 펠타스트(투창병 Peltast)

- 청동 흉갑(토락스, 18kg) 아마포 흉갑

   호플론 방패(9kg, 직경 60cm 이상) 아스피스(2kg, 45cm, 목재)

-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는 제국화, 경량화로 넓은 영토를 걸어 다녀야 

- 코린트식 투구, (Sarrissa)과 함께 검 사용

 

펠로폰네소스전쟁의 전개

- 1 ROUND(무승부와 평화조약)

/동맹 내 코린토스와 메가라 분쟁 메가라, /동맹 탈퇴, /동맹 가입. 아이 싸움 어른 싸움. 스파르타의 개전

아테네 방어 전략: 청야전술(scorched earth tactics) = 농작물 태워 스파르타군의 현지 식량 조달에 타격주고 성벽 안으로 이주/농성전. 해군으로 스파르타 해상 봉쇄.

지루한 전쟁: 부유한 아테네(해외 농작물 수입). 스파르타(농업 자급자족. 해상봉쇄는 타격 없어. 노예반란 걱정으로 장기간 원정 어려워).

아테네 성내 전염병: 인구 1/4 피해. 페리클레스/아들 사망. 리더십 붕괴

 

페리클레스(#1, BC 495~429)

- 페르시아/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아테네 지도자

- 아테네의 황금시대

- 예술/문학 장려. 아크로폴리스/파르테논신전 건설

- 귀족파에 맞서 민중파 지지, 민주주의 확보

- 투키디데스: 그는 아테네의 제1 시민

 

- 투키디데스[고대 아테네의 역사가,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저술]: “페리클레스는 명망과 판단력을 겸비한 청렴결백한 지도자. 그는 항상 대중을 이끌었고 대중이 너무 의지하면 불안케 만들고 대중이 낙담하면 자신감을 회복시켰다.”

- 행운: 아테네의 스팍테리아 전투 승리. 아테네는 경보병 활용하여 기동성 약한 스파르타 중장보병을 공격. 뜨거운 햇볕에 철갑에 화상^^

- 스파르타군 200명 포로 획득[당시 스파르타 완전 시민(상류층 지배계급)3,500명뿐이라 피해 커]

스파르타 굴욕(항복보다 전사!), 최초의 패배. 포로 교환과 휴전

니키아스 평화조약(아테네 총사령관 니키아스, 각 점령지를 반환. 원점)

 

- 2 ROUND(스파르타 승리)

아테네: 경제/해군력 재건 위해 약소국 약탈(: 멜로스 파괴. 성인 남자 학살, 여자/아동은 노예로 판매)

시칠리아 원정: 원래 이오니아, 이집트, 시칠리아(지중해 무역 거점) 곡물 수입. 시칠리아 분쟁. 세게스타(아테네 이민자. 지원 요청) vs. 셀리누스(스파르타 이민자)

- 주전파(페리클레스 조카, 소크라테스 제자. 미남/연설/정치가/군인 알키비아데스) vs. 평화파(니키아스 장군) 논쟁

- 알키비아데스(#): 능력/연설/미남/가문 탁월. 품성x. 음모가. 소크라테스가 스승 자청/애제자. 라파엘로(1511)<아테네학당>

- 스파르타 협상단을 농락

- 민회(시민총회)에서 투표로 사령관 3인 선출 = 알키+니키아스(군사행정)+라마코스(장비 스타일). 리더십 혼란. 아테네 해군 패전.

- 신전 파손 사건: 신전의 헤르메스(상업/나그네/목동/도둑의 신) 파손.)파손. 시민의 분노/불경죄. 용의자 = 알키비아데스.

 

- 알키비아데스, 스파르타로 망명. 의회 연설. “내가.“ 너희에게 준 피해보다 더 많은 피해를 아테네에 주겠다. 스파르타인이여, 청하건대 여러분의 위험한 일이나 힘든 일에는 나를 이용하시오.”

- 알키비아데스의 전략

시칠리아에 스파르타 파병을 설득 아테네 해군의 패전

아테네 인근 도시국가 점령, 교두보 확보 후 상시 공격. 농사 불가 & 곡물 전량 수입, 재정 파탄.

아테네의 자금줄인 소아시아 식민도시의 반란 유도.

- 스파르타 왕비와 스캔들(임신)과 사형 선고. 페르시아 망명.

- 알키비아데스 = 소아시아지역의 페르시아 총독 참모 등극. 당시 페르시아는 스파르타 해군의 월급을 대신 지급 중.

알키비아데스의 전략: 월급 지원 중지. 아테네가 세지면 스파르타 지원, 스파르타 세지면 아테네 지원. 이이제이(以夷制夷) &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cf. bandwagon effect.

 

- 3 ROUND(스파르타 승리)

-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 해전 중 알키비아데스 등장(각국에서 빌린 사설 함대). 아테네가 알키비아데스를 환영/수용. 스파르타 육해군 격퇴.

- 그러나... 노티움 해전 패배, 알키비아데스 영구 추방

- 아리스토파네스(고대 그리스 희극작가): “모두 알키를 무서워하고 싫어하면서도 그리워한다

- 마지막 전투(아이고스 포타모이 해전). 아테네 사령관(6. 패전시 책임/사형/추방 회피 위해 1일 지휘권 윤번제). 리더십의 분절화

- 스파르타: 사회개혁 단행. 1등 시민(완전자유민) = 병력 부족. 2~3등 시민에게도 지휘권/권한/시민권을 부여. 리산드로스(스파르타 해군 제독)가 페르시아 해군 원조 설득 아테네 해군 격파.

알키비아데스 재등장, 아테네의 거부/패배. 소아시아 은둔/피살

 

펠로폰네소스전쟁의 결과

- 4 ROUND(스파르타 패배. 테베 신흥강국)

그리스제국의 패권 확보. 그러나 쇠락 징후

1) 청탁/공훈에 따라 병역 면제(1/4로 감소), 군사력 약화

2) 타국도 전쟁으로 군사력 증강

3) 테베가 신흥 강국 등장. 테베의 정예군 신성대.

레욱트라전투(BC스파르타 vs. 테베). 테베의 사선진 전술 주효

테베 지배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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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그리스 세계와 그 문화 

  

   제3절 페르시아전쟁과 아테네의 민주정치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 히피아스의 추방(510 B.C.)으로 참주정치 쓰러지자 이를 타도하는 데 협력했던 귀족과 평민사이 대립, 분쟁 발생

-  이 분쟁에서 추방된 귀족 클레이스테네스, 아테네로 귀환, 평민의 지지 획득, 스파르타 지원, 반대파 귀족 분쇄, 민주개혁

-  개혁 목표 혈연, 지연적 유대, 경제적 이해관계 배제, 아테네 전 시민 평등한 참정권 부여, 새로운 행정 구획 마련

-  촌락 단위 기본 행정구 마련, 노예, 재유 외인 제외한 모든 구민 등록, 등록 구민 핏줄, 재산, 직업 무관 동한 참정권 부여

- 솔론 때의 4백인회의 대신 5백 인 회의 새로운 행정기관, 실질적 통치기관으로 아테네 재정, 전쟁, 외교 등 관장

  50명씩 10개의 워원회, 각 위원회는 1년의 10분의 1, 즉 36일간 원형청사에 집무, 위원장은 매일 교대

- 클레이스테네스의 국제는 기원전 502년 발효 시작, 아테네 결정적으로 민주정치로 발전

 도편추방(Ostracism)는 클레이스테네스의 정신 계승, 이후 제정된 것, 참주 될 위험인물, 6,000개 이상, 10년간 추방

- 아테네 시민 사이 다른 폴리스에서 볼 수 없는 강한 자부심, 애국심

 

   페르시아전쟁 

- 아테네 민주정치 기반 구축하지 얼마 안 가서, 아테네뿐만 아니라 그리스 전체 위협

- 오리엔트 통일한 페르시아의 서방으로 진출, 일찍부터 소아시아의 해안지대 그리스식민 시들 경제, 문화 본토보다 발달 선도적 지위에 있었으나 약한 정치적 유대, 당파, 계층 대립의 내분이 계속, 소아시아 강대국 리디아 격파(548 B.C) 후 그리스 본토 겨냥

- 이오니아식민시들의 반란(499~494 B.C) 진압 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 대군을 헬레스폰트와 트라키아 방면 파견, 폭풍 함대 손상, 철수

- 2년 후 기원전 490년 아테네 북방 약 25마일 지점, 마라톤에 상륙, 아테네, 그리스 전체 위기 였으나 아테네와 적대 폴리스 기회 노리고, 지원 약속 스파르타 군대 파견 하지 않음, 아테네 홀로 동방의 강적과 대결, 승산 없었으나 

밀티아데스 지휘, 애국심 아테네 시민의 중장보병 밀집대, 페르시아 격퇴, 승리 소식을 아테네로, 마라톤경주의 유래.

- 중장보병 밀집대전술 기원전 7세기에 이미 출현  기원전 6세기 후반 아테네 무겁고 값비싼 청동 흉갑 대신 마, 가죽, 금속의 장점을 살린 가볍고 값싼 복합형 흉갑 발명, 작은 모자 비슷한 헬멧 사용, 농촌, 도시 중산하층도 자담 무장 가능, 

밀집대의 견고성에 기민한 기동성 첨가, 마라톤 승리 '달리는 중장보병'이 큰 역할. 

- 페르시아 국내사정으로 재침까지 10년 기간, 휴전기에 준비, 아테네 대함대 건조, 폴리스들 아테네 중심 단결

-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 계승자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스파르타 용사 들 테르모필레 전투, 레오니다스왕 이하 전원 전사

중부 그리스 폴리스들 항복, 페르시아군 앗티카 평야로, 지상 대적 불가로 테미스토클래스는 아테네 시민을 살라미스로 철수, 해전에서 결전 시도, 교묘한 유도작전으로 살라미스해전 아테네 함대 대승, 페르시아 침공 단념, 귀국. 

- 다음 해(479 B.C) 페르시아 아테네와 스파르타 이간, 재차 앗티카 점령, 아테네시 완전 파괴. 아테네 비롯 10만여의 그리스연합군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 격파, 아테네 주축 그리스 함대 에게해 사모스섬 진공 페르시아함대 대파

- 페르시아전쟁 그리스의 승리, 동방 전제주의 대한 폴리스의 시민적 자유의 승리 의미, 기원전 5세기의 찬란 고전기문화를 앞둔  유럽사의 결정적 중요성이 있다. 

 

  아테네제국

-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를 맹주로 한 해상동맹 델로스(Delos)동맹 탄생. 동맹 시 제공 자금 관리 금고 델로스섬에 두고 아테네 관리, 위임, 아테네제국 변모 가능성 강, 페르시아 위협 약화, 

- 기원전 5세기 중엽 아테네 대도시 팽창, 에게해 해상무역과 그리스세계의 상공업의 중심지

- 동맹 시에 지배 강화, 강제적 공납금으로 변질, 델로스 섬의 공동금고 아테네로 이동(454B.C) , 동맹시 대부분 종속적 지위로 격하, 아테네 요구하는 공납금 납부, 재판도 아테네의 시민재판의 결정에 따르게 됨

- 동맹 시의 공납금, 해상무역에서의 아테네 패권, 기원전 5세기 중엽 이후 아테네의 경제적 번영 가장 중요한 기반

 

 아테네의 민주정치

- 살라미스 해전 승리, 수병 속한 최하층 세력 강화, 대함대 건조, 해상무역 발전, 상공인 경제적 지위, 발언권 증대

클레이스테네스의 기초 마련 민주정치 페르시아 전쟁 후 한층 발전, 페리클레스시대(457~429 B.C)에 민주정치 완성 

- 성년 남자 전원 참석, 발언 민회 권한 대폭 강화, 입법 관여, 5백 인 회의 권한 축소, 10명 장군 권한 확대, 최고정무위원회 기능 수행, 오늘날의 내각에 해당

- 국고에 의한 수당제 확대, 1년 임기제, 시민으로 원하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게, 민회의 권한 강화는 시민 누구나 직접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 의미

- 페리클레스의 펠로폰네소스전쟁 초기 전사 시민에 대한 추도연설 : 우리의 정체는 이웃 나라의 것을 흉내 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타국을 모방하는 경우보다 그들이 우리를 모범으로 삼는 경우가 더욱 많다. 우리의 국제를 민주정치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권력이 소수의 수중에 있지 않고 전시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 개인적인 분쟁을 해결하는 경우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개인을 타자보다 우선하여 공직에 임명할 때 그것은 그가 어느 특정한 계층에 속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실질적인 재능 때문이다. 국가에 대하여 유익한 봉사를 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빈곤 때문에 정치적으로 햇빛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다. 우리의 정치생활도 그러하다. 우리는 사생활에 있어 자유롭고 관대하지만 공사에 있어서는 법을 준수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지만 사치나 화려함에 흐르지 않으며, 지적인 사물을 사랑하지만 유약해지는 일이 없다. 우리는 부를 자랑으로 생각하지 않고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빈곤을 수치로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오직 가난을 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우리에게 있어 각 개인은 그의 사사로운 일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국사에도 관심을 가진다...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우리의 폴리스야말로 전그리스인이 배워야 할 배움터이다.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6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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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그리스 세계와 그 문화 

 

  제2절 폴리스의 성립과 발전 

 

자연환경 

-  그리스 기후와 지세는 지중해형 풍토. 그리스 본토는 산이 많고 평야 적고 산줄기가 종횡으로 달려 산에 둘러싸인 골짜기나 평지는 하나의 자연적인 지리적 단위를 이루고 있다. 폴리스라는 소단위의 국가를 성립시킨 주요 원인. 

- 해안선의 굴곡 심하여 톱니 연상, 자연 바다로 진출, 본토에서 소아시아로의 항해 용이.

- 기후 건조, 더운 여름과 약간 냉기 도는 겨울의 두 계절, 겨울에 약간의 비, 여름에 비가 오지 않는다. 물 부족이 고민거리.

- 보리, 밀 곡물 재배 곤란, 건조하고 메마른 땅 적합한 포도, 올리브 재배 유리, 중요 농산품, 필수품, 수출품은 포도주, 올리브유

- 유리하지 않은 그리스 자연환경으로 일찍 해외 진출, 해외무역 종사

 

폴리스(Polis)의 성립

- 도리아족 남하로 미케네 문명 파괴, 그리스의 '암흑시대(1100~800 B.C.)' , 이 시기 생활, 사회 문서 없고

끝날 무렵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유일하게 약간의 정보 제공하기 때문에 이 시기를 호메로스시대(Homeric Age)라고도 한다. 

- 이오니아(Ionia) : 도리아족이  펠로폰네소스반도, 크레타 정착했을 때 이를 피해 이주 무리 일부 아테네 위치한 앗티카 지방에 모여들고, 일부는 소아시아 방면 이동, 이주민들 정착한 소아시아 해안지대, 인접한 섬들을 이오니아라 부름. 

미케네문명의 유산을 지닌 채 이주, 이오니아 지방이 오리엔트문화 접촉 용이한 곳으로 폴리스도 소아시아의 서해안지역에 먼저 성립하였다. 

- 도리아족 남하에 따른 혼란과 타국가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여러 촌락이 지리적, 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에 모여들어 도시가 형성되고, 그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촌락들이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인 폴리스를 형성했다. 

- 대체로 해안으로부터 멀지 않은 평지에 위치, 도시는 폴리스의 정치, 군사 및 종교의 중심.

- 아크로폴리스(acropolis) :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에 도시 위 수호신을 모신 신전이 건립된 작은 성체와도 같은 小丘.

  유사시 시민들 피난처, 침입자에 대한 항거의 최후거점

- 아고라(agora) : 아크로폴리스에 인접한 광장, 시장인 동시 정치를 포함한 모든 공공생활의 장소, 시민들 사교의 장.

- 종교적, 경제적 유대로 결합하고 법에 의해 규제되는 완전한 독립성과 주권을 가진 시민 공동체

- 고전기 본토에 200개 이상, 식민시까지 1,000개 이상 

- 그리스인들든 스스로 헬레네스(Hellenes)라 부르고, 헬레네스가 사는 곳을 본토와 식민시를 합쳐 헬라스(Hellas)라 했다.

- 폴리스들은 델피(Delphi)의 아폴로(Apollo)신전을 중심으로 인보동맹, 정치, 군사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부, 올림피아(Olympia)의 제우스신전에서 기원전 776년 부터 4년마다 모든 폴리스가 참가하는 체전을 열고 그 기간 동안 폴리스 상호 간 전쟁을 금지

- 동족의식, 부분적 결합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전체 통일 국가 형성하지 못하고 결국 폴리스라는 작은 도시국가 분립상태를 벗어나지 못함. 

 

식민활동과 사회의 변화 

- 폴리스 성립한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시대 왕들이  존속한 경우라도 실권없는 명목상의 존재, 정치권력은 귀족에게  

  따라서 폴리스 성립을 귀족정치와 연관시키려는 견해도 있다. 

- 귀족 신, 영웅, 왕의 후예임을 자랑하는 가장 유력한 씨족 출신, 기사로서 폴리스방위의 가장 중요한 존재

- 당시 미케네시대 전투 주역 담당하던 전차는 사라지고, 중무장 기사들의 1대1 싸움으로 전투양식 변화

 말 사육 많은 비용, 기사의 자부담, 감당 가능 귀족만 출전

- 가문과 혈통 자랑, 폴리스 방위 전사단 구성한 귀족 정권 장악, 주요관직 독점

- 평민 대다수는 클레로스, 분배지를 소유한 중소 농민(약간의 수공업자, 상인 포함)

- 기원전 8세기 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의 <노동과 세월> (Works and Days) - 농민 생활 생생 전달 귀한 자료

  당시 농민은 2,3명 노예 소유, 농번기 일꾼 고용해 농사 종사하는 자영농민

- 폴리스에서의 귀족 지배에 동요- 식민운동, 폴리스의 사회경제적 변화

- 기원전 8세기 중엽~ 2세기 해외진출, 식민운동 활발 - 북동쪽으로 다나넬스와 보스포러스 해협, 흑해연안, 지중해연안에서는 멀리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남부, 에스파냐 해안까지 진출, 

가장 대표적 식민시- 프랑스의 맛실리아(지금의 마르세유),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이탈리아의 네아폴리스 등을 포함한 마그나 그래키아, 보스포러스 해협의 비잔티움(로마시대 콘스탄티노플, 현 이스탄불)

- 흑해 연안, 나일강 입구, 에스파냐에 무역거점 건설

- 해상무역 왕성, 본토 내의 상공업 발전, 아테네-직물, 도자기, 금속세공품이 해외무역 주된 공산품

아테네산 독특 고급도자기는 멀리 메소포타미아, 갈리아, 에스파냐에까지 운반, 소규모의 가내공업으로 수행

- 기원전 7세기 소아시아의 리디아로부터 화폐 전해지고 상공업 발달 더욱 촉진, 본토 주된 도시국가들이 저마다 화폐 주조

- 아테네 라우리옹 은광, 국가소유, 개인기업가에 임대, 수천 명 노예 사역, 채굴방법, 제련 기술 매우 우수 

라우리옹 은광에서의 국가수익, 기업가의 소득은 아테네 군사력유지, 경제적 발전, 문화적 풍요에 크게 공헌.

- 해상무역과 교환경제 발달함 시장을 위한 대규모 과수재배, 대규모 경영의 발달, 소농에게 경제적 압박, 소작농, 농업노동자, 노예 전락자 다수, 도시의 평민들 귀족의 정치권력 독점에 불만 귀족정치에 도전

- 평민세력의 대두, 기원전 8세기말, 7세기 전반 중장보명의 밀집대가 종전의 귀족기사들 대신 전투의 중심

 청동제 헬멧, 흉갑, 정강이받이, 원형방패, 장검, 단검, 4열 이상의 두껍고 긴 밀집대를 이루어 전투

- 중무장의 비용 각자의 부담, 유산시민에 한정, 귀족만이 전투 주역 시대는 지나고 도시, 농촌 중산층 이상 유산시민이 국방 주력, 이런 전술 변화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평민의 정치에 대한 발언권 증대.

 

귀족정치의 동요와 참주정치

- 아테네 귀족정치의 중심- 집정관인 아르콘(archon), 아레오파구스(areopagus) 회의.

  아르콘 군사, 종교, 민사의 3명에서 후에 9명 증가, 임기는 종신에서 1년, 임기 후 자동 아레오파구스회의 의원. 

  부유한 명문출신 귀족들로 구성, 귀족지배의 가장 핵심적 기관. 

  일반시민으로 구성되는 민회, 아르콘도 여기서 선출되었으나 실질 권한 없었음.

- 기원전 594년 아르콘으로 선출된 솔론(Solon) 아테네 당면 위기 극복 위한 개혁 단행, 부채 말소, 부채로 노예 된 자유민 해방, 부채로 인한 인신의 예속화 금지, 상공업 장려, 최하층에 민회 참석 권리, 새로 설치한 시민법정에 계층 구별 없이 추첨으로 참석, 각 부족의 100명씩 골라 4 백인회를 만들어 민회에 제출할 안건 마련. 

- 솔론의 개혁 귀족, 평민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고 귀족 평민 사이 대립, 분쟁 재발, 내부 문제를 안은 채 인근 메가라와 싸워 살라미스를 획득- 최초의 대외전쟁, 최하층을 포함 시민 전체 참여에 의미. 

- 기원전 561년 이 전쟁의 군사지도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빈농층포함 평민 지지 바탕으로 정권 장악, 참주(tyrant)가 됨.

귀족 추방, 토지를 빈농에 분배, 상공업 장려, 은광 개발, 시민 세금부담 감소, 귀족세력 크게 약화. 

트라키아 방면으로 진출, 흑해로부터의 식량공급로에 해당하는 섬들을 확보. 

- 참주정치: 사회경제적 변화와 전술의 변화로 귀족지배가 동요, 귀족과 평민의 대립과 분쟁이 격화 상황 이용, 비합법적으로 정권 장악 독재적으로 정치를 행한 것을 말하며, 결국 귀족정치로부터 민주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정치현상.

 

스파르타

- 도리아족인 스파르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남하, 기름진 라코니아에 정착할 때

  1. 페리오이코이(변두리사람 이라는 뜻) : 지배를 허용하고 종속적 지위 감수한 원주민은 자유신분이지만 시민권 없음

      도시, 주변 촌락 거주, 상공업 종사(스파르타시민에게 금지)

  2. 헤일로타이:  처음부터 예속적 신분, 완강 저항한 원주민은 노예신분, 할당한 분배지에 거주,

      스파르타시민에 비해 훨씬 많은 절대다수, 반란의 위험, 감시의 대상.  

- 두 차례 메세니아 전쟁(725~705 B.C)(640~620 B.C.) 영토확장을 위한 정복전쟁, 스파르타의 가혹한 지배에 반란

 전쟁 후 메세니아 주민 대부분을 헤일로타이로 만들고 토지를 스파르타 시민에 분배

- 실권 없는 두 사람의 왕과 장로회( 두 왕 포함 30명의 유력한 가문 출신 구성)가 국정의 중요안건 마련, 민회의 승인 절차

국정운영의 실권은 민회가 선출하는 임기 1년의 5명의 에포르(ephor)=집정관, 원 임무는 왕을 포함한 여러 관직자의 행동 감시, 스파르타 특유의 생활양식 준수 여부 감시하는 감사관의 기능도 겸유. 

- 왕정과 귀족정치의 유제를 내포한 민주정치, 전형적인 중장보명 민주정

제2차 메세니아전쟁 전 중장보병의 밀집대 전술 도입, 성년남자시민 전원이 분배 지를 가진 동등자로서 준장보병의 의무

-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스파르타시민은 주민전체의 5~10% , 교육, 전시체제 조직의 스파르타 독특 생활양식 유래

- 탄생 후 심사 거쳐 허약 버림받고 건장한 아이만 성장, 7세부터 집단훈련(신체단련, 군사훈련), 여아도 엄격 훈련,

20세부터 성인 ~30세까지 병영생활, 이후 시민전사단 소속 특수 집단생활, 저녁마다 집단별 공동식사 참여. 

시민 생산업 종사 금지, 외국 무역 억제, 자급자족 원칙, 외국인 왕래 감시, 폐쇄적 쇄국주의 

- 강력한 군대의 힘으로 펠로폰네소스반도 대부분의 폴리스를 망라한 펠로폰네소스동맹 결성( 560 B.C) 패자 군림했으나

  그리스문화에는 직접적으로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았다.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5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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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그리스 세계와 그 문화 

 

  오리엔트문화는 에게문명을 꽃피우고, 그리스인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는 오리엔트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오늘의 유럽문화의 참된 원천이 되었다. 

  에게문명은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으며 성립하였으나, 오리엔트문화와는 성격을 달리하였고, 특히 후기의 미케네문명은 그리스의 직접적인 선구가 되었다. 미케네문명이 파괴되고, 그리스사의 암흑기가 시작되었을 때, 오리엔트 세계에서는 강대국들이 쇠망하여 일종의 '힘의 공백 상태'가 나타났다. 그리스는 바로 이 힘의 공백 상태 속에서 그들의 독자적인 생활 기반인 '폴리스'를 형성시키고, 독창적인 문화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스는 그 지리적 여건으로 바다와 친숙했고, 해외로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여기저기에 식민시를 건설함으로써 지중해 일대가 하나의 역사적 세계로 형성될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가 수많은 폴리스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을 무렵, 동방에서는 오리엔트 세계가 아시리아와 페르시에 의하여 통일되고, 기원전 5세기에 두 나라는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이 대결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은 그리스 문화를 계승하고, 오리엔트 세계를 정복하여 그리스 문화를 그곳에 전파시켰다. 그리하여 성립한 헬레니즘 문화는 다시 로마에 의하여 계승됨으로써 유럽의 고전문화가 형성되게 되었다. 

 

  제1절 에게문명

 

에게문명= 미노아문명(미노스 왕 이름을 땀, 크레타 중심 발전) + 미케네문명(그리스 본토와 트로이 포함)

 

발견

19세기 중엽까지 전설상 존재, 땅속에 묻혀있던 에게문명이 1870년대 이후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애독하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이만(1822~1890)에 의해 드러나게 됨.

 

하인리히 슐리만 : 집안이 가난하여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점원으로 일하다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주제인 트로이전쟁이 단순한 전설이나 시인의 창작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전쟁임을 증명하려는 꿈을 품고, 독학으로 공부했으며, 사업으로 돈을 벌게 된 수 1870년 소아시아의 서북부에 있는 트로이로 지목되는 곳을 발굴해서 9개의 성채와 도시를 발견한다. 나아가 트로이 공격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Agamemnon)의 미케네(Mycenae)를 발굴하여 분묘와 황금마스크를 비롯해 많은 유물을 발견했다. 

 

1900년 영국 고고학자 아더 에반스는 미노스왕(Minos)이 지배하는 해상왕국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크레타(Crete)섬의 북쪽에 있는 크놋소스를 발굴하고 '미노스와의 미궁'으로 알려진 궁전을 발견.  선상문자가 기록된 토판문서를 많이 발견.

 

이로써 트로이전쟁의 사실성이 확실해졌고, 그리스문화보다 앞선 시기에 에게해 주변의 고도의 청동기문명이 성립해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짐.

 

1925년 영국 건축가 벤트리스  암호 풀리 방식 적용, 선상 B문자 해독에 성공, 초기 그리스어임을 확인 ( 크레타 섬에서 주로 사용된 선상A문자는 아직 미해독), 에게문명, 미케네문명에 관한 연구 획기적인 단계로 접어들게 됨. 

 

미노아문명

  크레타를 중심으로 발전,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으며 기원전 3000년기 중엽에서 청동기 시대로 들어섰으며, 기원전 2000년을 지나서 선상 A문자 사용. 이 문명의 담당자는 소아시아로부터의 이주민으로 추정.

기원전 2000년기 부터 비약적 발전, 전성기. 정교한 도자기, 크놋소스에 미노스왕의 장려한 궁전 건조. 

기원전 16세기 두 번 파괴었다가 재건, 기원전 1450년 선상 A문자 대신 선상 B문자 출현(미케네인이 크레타를 지배 의미)

기원전 14세기 크놋소스의 궁전 돌연 파괴, 미노아문명 종말(미케네인 칩입이라고 생각되었으나 1960년대 발굴에 의해 크레타 북쪽에 있는 테라(Thera, Santorin)섬의 화산폭발로 인한 화재와 대해일의 결과라고 생각되고 있다.)

 

   바다를 무대로 활발한 해상무역, 우수한 건축가, 기술자, 예술가

미노아 사회는 전체적으로 활달하고 유복하여 즐거운 양상을 보여주며, 상류층은 축제와 스포츠를 즐기면서 쾌적한 생활을 보냈다. 노예 거주지나 거처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회계층으로서 노예계급이 존재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장대한 궁전건축에는 상당히 많은 노예가 사역되었을 것이다. 

미노아 예술의 대표적인 것은 아름답고 정교한 도자기와 '파리의 여인'이라는 별칭이 붙은 매우 개성적인 여인의 그림에서 보듯이 궁전의 프레스코 벽화이다. 

 

미케네문명

  선상 B문자의 해독으로 미케네문명의 담당자는 그리스인의 선조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그리스인은 일찍이 기원전 2000년경부터 남하하여 그리스 본토에 자리잡고 원주민과 혼합하였다.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반도에 많은 소왕국을 건설하였고, 미케네는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왕국 중 '황금의 미케네'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부강한 맹주격이었다. 

  선진문화인 미노아문명을 흡수하면서 발전했으며 특히 기원전 16세기 그리스 본토의 '미노아化'라고 할 만큼 미노아의 영향은 컸다.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Theseus)가 미노스왕의 딸 아드리아네(Adriane)의 도움을 받아 반인반우 괴물 미노타우루스(Minotaurus) ( 아테네가 보내는 젊은 남녀를 잡아먹는 반인반우 괴물) 를 퇴치했다는 전설은 당시 미노아와 그리스본토와의 관계의 일단을 말해주는 것.

  기원전 15세기 중엽 미케네가 크놋소스를 지배하게 된 것 같으며, 미노아문명이 몰락한 후 미케네가 에게해의 패자가 되었다. 

트로이전쟁(1240~30 B.C.경) 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Paris)가 아가멤논의 동생인 스파르타왕 메넬라우스(Menelaus)의 왕비 헬렌을 유괴한 원인보다 강대해진 그리스본토의 소왕국들이 미케네를 맹주로 결합, 소아시아로 진출한 대원정이었다.

그 후 미케네 쇠퇴, 해상 민족에게 시달림 받고 기원전 12세기에 그리스인의 마지막 이주자인 도리아족(Dorians)에게 파괴되었다.  

 

  미노아 못지않게 번영, 왕족을 위한 커다란 벌집 같은 원형 분묘, 도시주변에 두꺼운 거석으로 견고한 성벽 축조. 

후대 그리스인들은 그 성벽을 '키클로프스의 성벽'이라고 불렀다.( 그 돌들이 워낙 커서  신화에 나오는 애꾸눈 거인 키클로프스만이 쌓을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기본적으로 미노아 예술을 계승하면서도 사무적이고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다.

 기본적인 생산은 농업과 목축, 왕실 중심 분업화한 수공업도 발달. 국내 교환경제는 미미했으나 외국 교역 매우 활발, 광범위하여 에게해를 지배하고 히타이트, 페니키아, 이집트 등과 접촉.

 

  제우스, 포세이돈 등 후대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신들을 신봉했으나 미노아인들이 믿었던 뱀 여신(snake-god-dess)을 더 신봉한 것 같았다. 

사회구조 : 국왕- 귀족적인 전사 계급- 일종의 관료, 서기- 상인, 농민- 노예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4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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