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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선생시권 서〔圃隱先生詩卷序〕 [하륜(河崙)]   

嘗謂孔子刪詩止于三百篇。然而原於天理人倫。而達乎政敎風俗。上自郊廟朝廷之樂歌。下至閭閻委巷之諷詠。凡可以感發善心而懲創逸志者無不具焉。則詩之爲詩。豈在多乎哉。詩變而爲騷。騷變而爲詞賦。再變而五七言出。至于律詩則詩之變極矣。然而思無邪之一言。可以蔽三百篇。則詩之道亦豈多乎哉。圃隱先生鄭公以天人之學。經濟之才。大鳴前朝之季。今其子宗誠,宗本以其遺藁來示予。且請予曰。吾先子所著詩與文。喪亂之中。失亡殆盡。幸此若
干百篇僅存。欲鋟諸梓以傳不朽。子之於吾先子。平生相許不淺矣。幸題一言于卷端也。予感其言。受而讀之。辭語豪放。意思飄逸。和不至於流。麗不至於靡。忠厚之氣不以進退而異。義烈之志不以夷險而殊。可見其存養之得其正。而發見於聲律之間者亦然矣。則思之無邪。豈係乎詩之正變也哉。他日中國有採詩之擧。則此篇當與牧隱,陶隱二先生之集並傳於中國。而使中國之士。知海東有邦文學之盛矣。顧不偉哉。嗚呼。先生出處始終大致。有國乘在。玆不贅焉。晉山府院君浩亭河崙。序。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일찍이 생각하건대, 공자가 《시경》의 시를 산삭(刪削)하여 남긴 것이 300편에 그쳤으나 천리와 인륜에 근본하고 정교와 풍속에 통달하여 위로는 교묘(郊廟)와 조정(朝庭)의 악가(樂歌)로부터 아래로는 여염(閭閻)과 위항(委巷)의 민요에까지 이르러, 무릇 착한 마음을 감발시키고 방탕한 뜻을 징계할 수 있는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시경》이 《시경》이 됨이 어찌 숫자의 많음에 달려 있겠는가.

시가 변하여 소(騷)가 되고 소가 변하여 사(詞)와 부(賦)가 되고 다시 변하여 오언시(五言詩)와 칠언시(七言詩)가 나왔는데, 율시(律詩)에 이르러서는 시의 변화가 극도에 달하였다. 그러나 “생각에 바르지 않음이 없다.[思無邪]”라는 한마디 말이 300편을 포괄할 수 있으니, 시의 도가 또한 어찌 많다고 하겠는가.
포은 선생 정공(鄭公)이 천인의 학문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를 갖고서 고려 시대의 끝을 크게 울렸다. 지금 그 아들 정종성(鄭宗誠)과 정종본(鄭宗本)이 유고를 갖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청하기를 “우리 선고(先考)가 저술한 시(詩)와 문(文)이 상란(喪亂)을 겪는 중에 거의 다 없어졌으나 다행히 이렇게 몇백 편이 겨우 남아 있어 목판에 새겨 영원히 후세에 전하려고 합니다. 그대는 우리 선고와 평소에 서로 깊이 허여한 사이였으니, 부디 시권의 머리에 한마디 서문을 써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에 감동하여 받아서 읽어 보니, 사어(辭語)가 호방(豪放)하고 의사(意思)가 표일(飄逸)하며, 조화로우면서도 휩쓸리는 데에 이르지 않았고 수려하면서도 사치한 데에 이르지 않았으며, 충후(忠厚)한 기상이 진퇴(進退)로 인하여 달라지지 않고 의열(義烈)한 뜻이 이험(夷險)으로 인하여 바뀌지 않았다. 이에 존양(存養)이 바름을 얻으면 성률의 사이에 발현된 것 또한 바름을 알 수 있으니 “생각에 바르지 않음이 없다.”라는 것이 어찌 시의 정변(正變)과 관계된 것이겠는가.
뒷날 중국에서 시를 채집하는 일이 있으면 이 시편은 응당 목은(牧隱)과 도은(陶隱) 두 선생의 문집과 나란히 중국에 전해져서 중국의 인사들로 하여금 해동의 나라에 문학이 성대함을 알게 할 것이니, 돌아보건대 위대하지 않겠는가.
아아, 선생의 출처는 시종의 대략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으니, 여기에 덧붙이지 않는다.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호정(浩亭) 하륜(河崙)이 서문을 쓰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1

 

포은 선생 본전〔圃隱先生本傳〕

鄭夢周字達可。知奏事襲明之後。母李氏有娠。夢抱蘭盆忽墮。驚寤而生。因名夢蘭。生而秀異。肩上有黑子七。列如北斗。年至九歲。母晝夢黑龍升園中梨樹。驚覺出視。乃夢蘭也。因改夢龍。旣冠改今名。恭愍九年。應擧連魁三塲。遂擢第一人。十一年。選補藝文檢閱。十三年。從我太祖擊三善三介于和州。累遷典農寺丞。時喪制紊弛。士大夫皆百日卽吉。夢周於父母喪。獨廬墓。哀禮俱盡。命旌表其閭。十六年。以禮曹正郞。兼成均博士。時經書至東方者唯朱子集註耳。夢周講說發越。超出人意。聞者頗疑。及得胡炳
文四書通。無不脗合。諸儒尤加嘆服。李穡亟稱之曰。夢周論理。橫說竪說。無非當理。推爲東方理學之祖。十七年。轉成均司藝。二十年。改太常少卿。俄遷成均司成。二十一年。以書狀從洪師範如京師。賀平蜀。還至海中許山遭颶風。船敗漂抵岩島。師範溺死。其得免者纔什二。夢周濱死乃生。割韂而食者十三日。事聞。帝具舟楫取還。厚加恩恤遣還。辛禑元年。拜右司議大夫。移成均大司成。初。皇明肇興。夢周力請于朝。首先歸附。至是恭愍被弑。金義殺使。國人恟恟。不敢通使朝廷。夢周又陳大義。以謂邇來變故。當
早詳奏。使上國釋然無惑。豈可先自疑貳。構禍生靈。於是始遣使告哀。且辨釋金義事。時北元遣使賜詔。權臣李仁任,池奫欲復事元。議迎其使。夢周與文臣十數人上書云云。書在文集。 池李深忌之。貶流彦陽二年許。任便居住。時倭冦充斥。濱海州郡。蕭然一空。國家患之。嘗遣羅興儒。使覇家臺說和親。其主將拘囚興儒。幾餓死僅得生還。三年。權臣嗛前事。擧夢周報聘于覇家臺請禁賊。人皆危之。夢周略無難色。及至。極陳古今交隣利害。主將敬服。館待甚厚。倭僧有求詩者。援筆立就。緇徒坌集。日擔肩輿請觀奇勝。及
歸。與九州節度使所遣周孟仁偕來。且刷還俘尹明,安遇世等數百人。且禁三島侵掠。倭人久稱慕不已。後聞夢周卒。莫不嗟惋。至有齋僧薦福者。夢周憫倭賊奴我良家子弟。乃謀贖歸。力勸諸相各出私貲若干。且爲書授尹明以遣。賊魁見書辭懇惻。還俘百餘人。自是每明之往。必得俘歸。四年。拜右散騎常侍。歷典工,禮儀,典法,版圖判書。六年。從我
太祖擊倭雲峯。還拜密直提學。明年。簽書司事。十年。拜政堂文學。本國與朝廷多釁。帝怒將加兵于我。增定歲貢。乃以五歲貢不如約。杖流使
臣洪尙載,金寶生,李子庸等于遠地。至是當遣使賀聖節。人皆憚行規避。最後乃擬遣密直副使陳平仲。平仲以臧獲數十口賂林堅味。遂辭疾。堅味卽擧夢周。禑召面諭曰。邇來我國見責朝廷。皆大臣過也。卿博通古今。且悉予意。今平仲疾不能行。乃代以卿。卿意何如。對曰。君父之命。水火尙不避。况朝天乎。然我國去南京凡八千里。除候風渤海。實九十日程。今去聖節纔六旬。脫候風旬浹。則餘日僅五十。此臣恨也。禑曰。何日就道。對曰。安敢留宿。遂行。晨夜倍道。及節日進表。帝覽表畫日曰。爾國陪臣。必相托故
不肯來。日迫乃遣爾也。爾得非往者以賀平蜀來者乎。夢周悉陳其時船敗狀。帝曰。然則應解華語。特賜慰撫。勑禮部優禮以送。遂放還尙載等。十一年。同知貢擧取士。故事每試一塲。輒考較出榜。初塲不合格者。不得入中塲。終塲亦如之。懿妃弟盧龜山童騃無學。中塲不入格。禑大怒欲罷試。李成林,廉興邦等詣龜山父英壽第。請使龜山赴終塲。英壽辭以不可獨入。於是幷試不合格者十數人。竟取龜山。德昌府行首文允慶。本䆠官李匡從者。竊書其友策。夢周黜之。知貢擧廉國寶乃取之。崔瑩戱語人曰。前月
監試學士尹就棄寒士取昏童。致天大雹。盡殺我麻。今東堂學士復致何等天變耶。十二年。如京師請冠服。又請蠲免歲貢。夢周奏對詳明。得除五年貢未納者及增定歲貢常數。及還。禑喜甚。賜衣帶鞍馬。拜門下評理。明年。請解職。封永原君。與河崘,廉廷秀,姜淮伯,李崇仁建議革胡服襲華制。十四年。拜三司左使。辛昌元年。改爲藝文館大提學。從我
太祖定策立恭讓。拜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司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觀事。封益陽郡
忠義君。賜純忠論道佐命功臣號。敎曰。云云。詳載行狀。 王御經筵。夢周進言曰。儒者之道。皆日用平常之事。飮食男女。人所同也。至理存焉。堯舜之道亦不外此。動靜語默之得其正。卽是堯舜之道。初非甚高難行。彼佛氏之敎則不然。辭親戚絶男女。獨坐巖穴。草衣木食。觀空寂滅爲宗。是豈平常之道。時王欲迎僧粲英爲師。故夢周講及此。然王方惑佛不納。彝初獄起。臺諫論其黨甚力。夢周請因封崇四代大赦。臺諫猶論執不已。王下都堂議。夢周以爲罪狀不白。今又經赦。不宜復論。刑曹劾夢周右彝初黨。夢周再上牋
辭。皆不允。召夢周宴慰之。尋拜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三年。王謂經筵官曰。今人知中國故事。而不知本朝之事可乎。夢周對曰。近代史皆未修。先代實錄亦不詳悉。請置編修官。依通鑑綱目修撰。以備省覽。王納之。卽命李穡,李崇仁等修實錄。不果行。成均博士金貂上書毀佛。上怒欲抵以死罪。兵曹佐郞鄭擢上疏曰。竊聞金貂排斥異端。極言不諱。上以其破毀先王成典。將置極刑。臣竊爲殿下惜之。書曰。監
于先王成憲。其永無愆。所謂先王成典者。不過三綱五常。而佛氏皆背之。非貂毀先王成典。乃殿下自毀之也。願赦貂狂直之罪。代言等畏上怒不敢啓。夢周與同列上疏曰。信者人君之大寶也。國保於民。民保於信。近日殿下下敎求言曰。言之者無罪。於是人皆抗疏極論政事之得失。民生之休戚。眞所謂不諱之朝也。有國子博士生員等亦以排斥異端。上書陳說。言語不謹。觸犯天威。在朝之臣。不勝恐懼。臣等以爲斥詆佛氏。儒者之常事。自古君王置而不論。况以殿下寬大之量。蕞爾狂生。在所優容。乞霈寬恩。一
皆原宥。示信國人。王從之。貂等得免。又疏曰。賞罰。國之大典。賞一人而千萬人勸。罰一人而千萬人懼。非至公至明。不足以得其中而服一國之人心也。自殿下踐祚以來。省憲,法司交章擧劾。以爲某人乃沮立王氏之議。扶立子昌者。某人與於逆賊金宗衍之謀。於行在所爲內應者。某人於諸將承天子之命。以辛禑父子爲非王氏。議復王氏之時謀迎辛禑。永絶王氏者。某人送彝初於上國。請親王動天下兵者。某人陰養先王孽孫。潛謀不軌者。章疏屢上。雖勞聖慮之勤。至今未見明白。必於其間。有罪者曲蒙肆宥。
無辜者未能昭雪。其於公道。似乎兩失。是以。言者紛紛至今不已。臣等以謂宜令省憲,法司。共議商確。將連涉人等獄詞文案。更加詳覆。某人罪在不宥。宜置于法。某人情在可疑。宜從輕典。某人無罪被誣。宜令辨釋。獄章旣上。殿下坐朝門。召宰輔臣僚。親臨審錄。使無寃抑。然後加以罪黜。施以肆宥。則人心服而公道行矣。從之。於是省憲,刑曹論列五罪曰。沮立王氏之議。扶立子昌者。曹敏修,李穡也。與於金宗衍之謀。爲內應者。朴可興,池湧奇,李茂,鄭煕啓,李彬,尹師德,陳乙瑞,朴葳,李沃,李仲華,陳元瑞,金軾,李龜哲
也。但湧奇,葳,茂,煕啓,彬,師德,乙瑞,元瑞,沃,仲華等。皆不問流貶。又無供辭。情在可疑。然湧奇,葳。名在功臣之列。位至將相。宜盡心輔佐。而多聚軍官。使宗衍有所依賴。欲遂其謀。其情難測。軾,龜哲等雖有供辭。辭不分明。情亦可疑。謀迎辛禑。永絶王氏者。邊安烈,李乙珍,李庚道,元庠,李貴生,鄭地,禹玄寶,禹洪壽,王安德,禹仁烈及穡,煕啓也。大逆安烈。雖無供辭。旣已伏誅。然不籍產。擧國缺望。乙珍與安烈同謀。擾亂國家。供辭明白。今據乙珍之辭。則庚道之與謀亦無疑矣。且以安烈腹心。爲其都鎭撫。豈有安烈謀事而
庚道不知者乎。宜與乙珍同處較問。庠,貴生知情不首。且據李琳父子供辭。則洪壽雖涉迎禑。而無供辭。其情可疑。以鄭地供辭觀之。地之無罪被誣明矣。以朴義龍供辭觀之。則穡之謀迎辛禑固可罪也。玄寶,安德,仁烈,煕啓等已皆免職分配于外。皆無供辭。故問其時問事巡軍官。皆云。玄寶等之與謀。金佇已明言矣。然不以其時與佇對辨。又無供辭。情在可疑。而仁烈則以委官坐巡軍不明取佇之供辭。安德則都屯串敗軍後往見禑於驪興累日之程。其間難測。又觀李琳父子供辭。則安烈之欲使仁烈,安德迎
禑明矣。其見於彝初書者。邊安烈,金宗衍已伏誅。李琳,曹敏修病死。禹仁烈,鄭地,李崇仁,權近,李貴生,禹玄寶,權仲和,張夏,李種學,慶補已承服。李穡,陳乙瑞,李仁敏,韓浚,鄭龍,仇天富,李大卿皆無供辭。其不在彝初書中。而見於洪仁桂供辭者。崔公哲已杖死。崔七夕,安柱,公義,郭宣,鄭丹鳳,曹彦,王承貴,張忠立已承服。趙卿病死。陰養先王孽孫者亦池湧奇也。湧奇陰養益富。事狀明白。其罪不可赦也。王御正殿。召夢周及判三司事裵克廉,兼大司憲金湊,門下評理柳曼殊,左常侍許應,右常侍全五倫,諫議朴子文,
全伯英,獻納權軫,正言柳沂,金汝知,掌令崔咸,金畝,持平李元緝,李作,刑曹判書具成祐,揔郞成溥,正郞河係宗,佐郞朴猗等議定五罪。王曰。自寡人卽位以來。臺諫每以五罪交章上疏。然罪狀不白。難可罪之。不唯予之軫念。臺諫因此或落職或左遷。紛紛不已。卽今宜以明辨其有罪者。不可以私赦。被誣者亦不可不赦。卿等毋面從退有後言。乃問立昌迎禑之事欲寬李穡曰。戊辰年諸將回軍。議立王氏。問計於穡。而曹敏修以辛昌外戚。爲時大將。穡實怯懦。故曰。父廢子立。有國之常。乃立昌襲位。罪可恕也。夢周
對曰。然。但穡無節操耳。何有罪乎。湊駁曰。當殿下龍潛之日。僞辛稱玄陵之後。穡知其非王氏。而倡立子昌曰。父廢子立。是成辛氏爲君也。成辛氏爲君。則殿下以辛氏之臣。而簒辛氏之位矣。穡爲世大儒。就斷國論。貪生忘義。罪可恕乎。當時大將如
諸軍事可不恃賴。而固畏敏修乎。諸郞舍但唯唯。汝知獨希旨曰。臣亦以謂穡等無罪也。王又欲原禹玄寶,朴可興。湊又曰。殿下似有私意。王勃然變色曰。卿以予私耶。遂釋穡,玄寶等以無供辭。而但有金佇,鄭得厚之言也。王命敏修,安烈
籍其家。湧奇,可興依舊付處。仁烈,安德,葳外方從便。餘皆京外從便。初。安德亦在京外從便中。湊曰。安德藍浦之役。專軍覆沒。其還也。必道驪興而謁辛禑議迎立。謂之罪狀未白可乎。外方從便。其賜亦大矣。王從之。夢周啓王著令曰。今後如有論上項人等罪者。以誣告論。尋賜夢周安社功臣號。四年。夢周取大明律至正條格本朝法令。參酌刪定。撰新律以進。夢周忌我太祖威德日盛。中外歸心。又知趙浚,南誾,鄭道傳等有推戴之謀。嘗欲乘機圖之。及世子奭朝見而還。
太祖出迎黃州。遂畋于海州墜馬。體甚不平。夢周聞之有喜色。遣人嗾臺諫曰。李 太祖舊諱 今墜馬病篤。宜先剪羽翼。然後可圖也。遂劾浚,道傳,誾及素所歸心者五六人將殺之。以及
太祖。太祖還至碧瀾渡將宿。太宗馳至告曰。夢周必陷我家。太祖不答。又告不可留宿於此。太祖不許。固請然後力疾。遂以肩輿夜還于邸。夢周憂不濟事。不食已三日。太宗又白曰。勢已急矣。將若何。
太祖曰。死生有命。但當順受而已。太宗與太祖弟和,壻李濟等議於麾下士曰。李氏之忠於王室。國人所知。今爲夢周所陷。加以惡名。後世誰能辨之。乃謀去夢周。太祖兄元桂之壻卞仲良洩其謀於夢周。夢周詣太祖邸欲觀變。太祖待之如初。太宗曰。時不可失。及夢周還。乃遣趙英珪等四五人。要於路擊殺之。年五十六。太宗入告。
太祖震怒。力疾而興。謂太宗曰。汝等擅殺大臣。國人以我爲不知乎。吾家素以忠孝聞。汝等敢爲不孝乃爾。太宗對曰。夢周等將陷我家。豈可坐而待亡。此乃所以爲孝也。宜召麾下士備不虞。太祖不得已使黃希碩白王曰。夢周等黨庇罪人。陰誘臺諫。誣陷忠良。今已伏罪。請召浚,誾等與臺諫辨明。於是鞫臺諫流之。幷流其黨。梟夢周首于市揭榜曰。飾虛事誘臺諫。謀害大臣。擾亂國家。太祖麾下士又上疏籍其家。夢周天分至高。豪邁
絶倫。有忠孝大節。少好學不倦。硏窮性理。深有所得。太祖素器重。每分閫。必引與之偕。屢加薦擢。同升爲相。時國家多故。機務浩繁。夢周處大事决大疑。不動聲色。左酬右答。咸適其宜。時俗喪祭。專尙桑門法。夢周始令士庶放朱子家禮。立家廟奉先祀。又以守令雜用參外吏胥。秩卑人劣。始選用參官有淸望者。嚴其黜陟。又以金穀出納。都評議司錄事白牒施行。事多猥濫。始置經歷都事。籍其出納。又內建五部學堂。外設鄕校以興儒術。其他如立義倉賑窮乏。設水站便漕運。
皆其畫也。所著詩文豪放峻潔。有圃隱集行于世。本朝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館大提學兼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謚文忠。子宗誠,宗本。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정몽주는 자(字)가 달가(達可)이고, 지주사(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다. 모친 이씨(李氏)가 임신했을 때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서 낳았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빼어나고 남달랐으며, 어깨 위에 북두칠성처럼 늘어선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아홉 살 때 모친이 낮에 검은 용이 정원 안의 배나무에 올라가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서 나가 보니, 바로 몽란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몽룡(夢龍)으로 바꾸었고, 관례(冠禮)를 치른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응시하여 연이어 삼장(三場)에 장원하고 드디어 제일인으로 뽑혔다.
11년(1362)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보임되었다.
13년(1364)에 우리 태조를 따라 화주(和州)에서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를 격파하였고, 여러 번 벼슬을 옮겨서 전농시 승(典農寺丞)이 되었다. 당시에 상제(喪制)가 문란하고 해이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100일이면 탈상하였으나 정몽주는 부모상에 홀로 시묘하였고 슬픔과 예법이 모두 극진하였으므로, 정려(旌閭)를 내려서 표창하도록 명하였다.
16년(1367)에 예조 정랑으로 성균관 박사를 겸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서는 오직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뿐이었다. 정몽주는 강설이 탁월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크게 뛰어넘었기 때문에 듣는 이들이 자못 의심하였으나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을 얻어 보게 되어서는 합치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선비들이 더욱 탄복하였다. 이색(李穡)이 자주 일컫기를 “정몽주의 논리는 횡으로 말하든 종으로 말하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으니,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추중(推重)하노라.”라고 하였다.
17년(1368)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옮겨 갔다.
20년(1371)에 태상시 소경(太常寺少卿)으로 바뀌었다가 이윽고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옮겨 갔다.
21년(1372)에 서장관(書狀官)으로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남경에 가서 촉(蜀) 땅을 평정한 일을 축하하였다. 돌아올 때에 해중(海中)의 허산(許山)에 이르러 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 표류하다 암도(岩島)에 닿았다. 홍사범은 익사하고 죽음을 면한 사람은 겨우 열에 둘뿐이었다. 정몽주는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서 말다래를 베어 먹은 것이 13일이나 되었다. 이 일이 보고되자 황제가 배를 마련하여 데리고 돌아가 후하게 보살펴서 돌려보냈다.
신우(辛禑) 1년(1375)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제수되었고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겨 갔다. 이보다 앞서, 명(明)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정몽주가 조정에 힘껏 청하여 맨 먼저 명나라에 귀부(歸附)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김의(金義)가 사신을 죽이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다. 정몽주가 또 대의를 진달하기를 “근래의 변고는 응당 일찍 상세히 아뢰어 상국(上國)으로 하여금 한 점의 의혹도 없게 해야 하거늘, 어찌 먼저 스스로 의심스럽게 하여 백성들에게 재앙을 당하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상(喪)을 고하고, 또 김의의 사건을 해명하였다. 이때에 북원(北元)이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내리니,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다시 원나라를 섬기려고 그 사신을 맞아들이려는 논의를 하였다. 정몽주가 문신 십수 인과 함께 글을 올려 부당함을 운운하니, - 글이 문집에 있다. - 지윤과 이인임이 몹시 싫어하여 언양(彦陽)으로 유배 보내었다.
2년(1376)에 편리한 대로 거주하도록 허락하였다. 그 당시 왜구가 가득하여 바닷가 고을들이 쓸쓸히 텅 비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이를 걱정하였다. 일찍이 나흥유(羅興儒)를 패가대(覇家臺)에 사신으로 보내어 화친을 설득하게 하니, 그 주장(主將)이 나흥유를 잡아 가두어 거의 아사(餓死) 지경이 되었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일이 있었다.
3년(1377)에 권신들이 전날의 일에 앙심을 품고 정몽주를 천거하여 패가대에 보빙(報聘)하여 왜구의 침략을 금지시켜 주기를 청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정몽주는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패가대에 이르러서는 고금의 외교의 득실을 극진히 설명하니, 주장이 경복(敬服)하여 객관의 대접이 매우 후하였다. 시를 구하는 왜승(倭僧)이 있으면 붓을 잡아 곧바로 지어 주니, 승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날마다 가마를 메고 절경을 구경하기를 청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가 보낸 주맹인(周孟仁)과 함께 왔고, 또 잡혀갔던 윤명(尹明)과 안우세(安遇世) 등 수백 인을 쇄환(刷還)하였고 또 삼도(三島)의 침략을 금지시켰다. 왜인들이 오래도록 일컫고 사모해 마지않아 뒤에 정몽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애석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재를 올려 명복을 비는 사람까지 있었다.
정몽주가 왜적이 우리 양가(良家)의 자제를 종으로 삼은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값을 지불하고 데려오려고 재상들에게 힘껏 권하여 각각 사재를 조금씩 내게 하고 또 글을 써서 윤명에게 주어서 보내니, 왜적의 우두머리가 글의 내용이 간절한 것을 보고 포로 100여 인을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윤명이 갈 때마다 반드시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다.
4년(1378)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되었고, 전공사 판서(典工司判書), 예의사 판서(禮儀司判書), 전법사 판서(典法司判書), 판도사 판서(版圖司判書)를 역임하였다.
6년(1380)에 우리 태조를 따라 운봉(雲峯)에서 왜적을 격파하였고, 돌아와서 밀직사 제학(密直司提學)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첨서사사(簽書司事)가 되었다.
10년(1384)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되었다. 본국이 명나라와 문젯거리가 많았기 때문에 황제가 노하여 장차 우리나라로 출병하려 하였고, 또 세공(歲貢)을 늘려서 정하고는 5년 치의 세공이 약속한 숫자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사신 홍상재(洪尙載), 김보생(金寶生), 이자용(李子庸) 등을 먼 곳으로 장류(杖流)에 처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어 성절(聖節)을 축하해야 하나,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려서 핑계를 대고 피하였다. 최후에 밀직사 부사 진평중(陳平仲)을 보내기로 결정했으나, 진평중이 노비 수십 구(口)를 임견미(林堅味)에게 뇌물로 바치고 병을 핑계하니, 임견미가 곧 정몽주를 천거하였다.
우(禑)가 불러서 대면하고 말하기를 “근래에 우리나라가 명나라에게 책망을 받게 된 것은 모두 대신들의 잘못이오. 경(卿)은 고금에 널리 통할뿐더러 내 뜻도 잘 알 것이오. 지금 진평중이 병 때문에 갈 수가 없어 경으로 대신하려 하니, 경의 뜻은 어떠하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군부의 명은 물과 불도 오히려 피하지 않거늘, 하물며 천자를 뵙는 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남경까지는 거리가 모두 8000리이니, 발해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날을 제외하면 실제 90일의 노정입니다. 지금 성절까지 겨우 60일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가령 순풍을 기다리는 시간이 열흘이라면 남는 날이 겨우 50일뿐이니, 이것이 신이 한스러운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우가 말하기를 “어느 날 길에 오르겠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머물러 묵겠습니까.”라고 하고, 드디어 출발하여 밤낮을 쉬지 않고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 성절의 날짜에 맞추어 표문(表文)을 올렸다.
황제가 표문을 보고는 날짜를 헤아리고 말하기를 “그대 나라 신하들이 필시 서로 일을 핑계 대고 오려 하지 않다가 날짜가 닥쳐서 그대를 보냈을 것이다. 그대는 지난번에 촉 땅을 평정한 일을 축하하러 왔던 사람이 아니던가.”라고 하였다. 정몽주가 그 당시 배가 부서졌던 정상을 모두 아뢰니, 황제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응당 중국말을 알겠구나.”라고 하고는 특별히 위무(慰撫)해 주며 예부(禮部)에 명하여 후하게 예우하여 보내게 하고, 드디어 홍상재 등도 돌려보내 주었다.
11년(1385)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선비를 선발하였다. 전례에 의하면, 매번의 시험장마다 곧 성적을 매겨서 방(榜)을 내기 때문에 초장(初場)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중장(中場)에 들어갈 수 없고, 종장(終場)도 마찬가지였다. 의비(毅妃)의 아우 노귀산(盧龜山)은 어리고 어리석으며 학식도 없어 중장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우가 크게 노하여 과시(科試)를 파하려고 하니, 이성림(李成林), 염흥방(廉興邦) 등이 노귀산의 아비 노영수(盧英壽)의 집에 가서 노귀산을 종장에 나가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노영수가 혼자 들어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불합격한 십수 인을 함께 시험하여 마침내 노귀산을 선발하였다.
덕창부(德昌府)의 행수(行首) 문윤경(文允慶)은 본래 환관 이광(李匡)의 종자(從者)였다. 친구의 책문(策文)을 훔쳐서 적었기 때문에 정몽주가 쫓아냈으나 지공거 염국보(廉國寶)가 그를 선발하였다. 최영(崔瑩)이 사람들에게 농담하기를 “지난달에 감시(監試)의 시관 윤취(尹就)가 한미한 선비를 버리고 혼매한 아이를 선발했기 때문에 하늘이 큰 우박을 내려 내 집 삼[麻]을 다 죽이더니, 이번에 동당(東堂)의 시관이 다시 어떤 하늘의 변고를 가져오게 하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12년(1386)에 남경에 가서 관복을 청하고 또 세공을 견감해 주기를 청하였다. 정몽주의 주대(奏對)가 상세하고 명확하여 5년 동안 미납한 공물과 늘려서 정한 세공의 상수(常數)를 면제받게 되었다. 돌아왔을 때에 우가 매우 기뻐하여 의대(衣帶)와 안마(鞍馬)를 하사하고 문하부 평리(門下府評理)에 제수하였다.
이듬해에 해직을 청하였고 영원군(永原君)에 봉해졌다. 하륜(河崙), 염정수(廉廷秀), 강회백(姜淮伯), 이숭인(李崇仁)과 함께 건의하여 호복(胡服)을 혁파하고 중국의 복제를 따랐다.
14년(1388)에 삼사 좌사(三司左使)에 제수되었다.
신창(辛昌) 1년(1389)에 예문관 대제학으로 바뀌었다. 우리 태조를 따라 계책을 정하여 공양왕(恭讓王)을 세우니, 문하부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사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府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司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領書雲觀事)를 제수하고,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하고, 순충논도좌명 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교서에 운운하였다. - 교서는 〈행장〉에 상세히 실려 있다. -
공양왕이 경연에 나왔을 때 정몽주가 진언하기를 “유자(儒者)의 도는 모두 일상적인 평상의 일입니다. 음식과 남녀는 사람마다 똑같은 것이지만 지극한 이치가 깃들어 있으니, 요순(堯舜)의 도 또한 이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동정(動靜)과 어묵(語默)이 바름을 얻은 것이 바로 요순의 도이니, 애초에 매우 높아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 불씨(佛氏)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아 친척을 사절하고 남녀를 끊고서 암혈(巖穴)에 홀로 앉아 풀 옷을 입고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공(空)을 관(觀)하여 적멸(寂滅)에 이르는 것을 으뜸으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평상의 도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당시 임금이 승려 찬영(粲英)을 맞아들여 스승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정몽주의 강론이 여기에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한창 불교에 현혹되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이(尹彝)와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대간이 그 무리들을 힘껏 논박하니, 정몽주가 4대(代)를 추존(追尊)하는 일을 계기로 크게 사면하기를 청하였다. 대간이 그래도 논집(論執)해 마지않으니, 임금이 도당(都堂)에 내려보내어 의논하게 하였다. 정몽주가 말하기를 “죄상이 명백하지 않고 지금 또 사면령을 내렸으니, 다시 논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형조에서 정몽주가 윤이와 이초의 무리를 돕는다고 탄핵하니, 정몽주가 두 번 전문(箋文)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고 정몽주를 불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얼마 있다가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 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 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을 제수하였다.
3년(1391) 임금이 경연관에게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중국의 고사는 알고 본조의 일은 알지 못하니 이래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니,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근대의 역사도 모두 수찬하지 못하였고 선대의 실록 또한 상세하지 않으니, 편수관(編修官)을 두어 《통감강목》에 의거하여 수찬하여 살펴볼 수 있게 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받아들이고 즉시 이색과 이숭인 등에게 실록을 수찬하도록 명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성균관 박사 김초(金貂)가 글을 올려 불교를 비방하니, 주상이 노하여 사형으로 처벌하려 하였다. 병조 좌랑 정탁(鄭擢)이 상소하기를 “가만히 듣건대, 김초가 이단을 배척하면서 숨기지 않고 남김없이 말하거늘, 주상께서 선왕(先王)이 이루어 놓은 법을 허물어뜨린다는 이유로 극형에 처하려 하신다고 하니, 신은 가만히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서경》에 말하기를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을 보시어 길이 잘못이 없게 하소서.’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이란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씨가 모두 이를 어기고 있으니, 김초가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을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전하께서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김초의 지나치게 충직한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대언(代言)들이 주상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니, 정몽주가 동렬(同列)과 함께 상소하기를 “신의는 임금의 큰 보배이니, 나라는 백성에 의하여 보전되고 백성은 신의에 의하여 보전되는 것입니다. 근간에 전하가 하교하여 간언을 구하면서 ‘말하는 사람은 죄가 없다.’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과감히 소를 올려 정사의 득실과 민생의 고락을 극진히 논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숨기지 않는 조정입니다. 국자감의 박사와 생원들 또한 이단을 배척하라는 내용으로 글을 올려 주장을 펼치되 말이 신중하지 못하여 성상의 노여움을 범하고 말았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두려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불씨를 배척하는 것은 유자의 일상적인 일이라서 예로부터 군왕들이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전하의 너그럽고 큰 도량으로 보면 하찮은 광생(狂生)쯤이야 넉넉히 포용하실 것이니, 너그러운 은혜를 크게 내려서 한번 모두 용서하시어 나라 사람들에게 신의를 보여 주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받아들여 김초 등이 모면할 수 있었다.
또 상소하기를 “상벌은 나라의 큰 법입니다. 한 사람에게 상을 주면 천만 사람이 권면되며 한 사람을 벌주면 천만 사람이 두려워하니,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분명한 상벌이 아니면 그 중도를 얻어 온 나라의 민심을 복종시킬 수 없습니다. 전하가 즉위하신 이래로 성헌(省憲)과 법사(法司)가 번갈아 글을 올려 논핵하기를 ‘아무개는 바로 왕씨(王氏)를 세우려는 의논을 저지하고 아들 창(昌)을 도와서 세운 자이며, 아무개는 역적 김종연(金宗衍)의 모의에 참여하여 행재소(行在所)에서 내응한 자이며, 아무개는 장수들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신우(辛禑) 부자(父子)를 왕씨가 아니라고 하며 왕씨를 회복하기를 의논할 때에 신우를 맞아들여 왕씨를 영원히 끊으려고 모의한 자이며, 아무개는 윤이와 이초를 중국에 보내어 친왕(親王)이 천하의 군대를 움직여 주기를 청한 자이며, 아무개는 선왕의 얼손(孼孫)을 몰래 길러 가만히 불궤(不軌)를 꾀한 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상소가 여러 번 올라와서 성상이 몹시 수고롭게 염려하셨지만 지금까지도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아 필시 그 사이에 죄가 있는 자가 그릇되게 용서받거나 죄가 없는 자가 억울함을 씻어 내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니, 공도(公道)로 볼 때 양쪽 모두 잘못된 듯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분분하여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마땅히 성헌과 법사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고 헤아리게 하되 관련된 사람들의 옥사(獄詞) 문안(文案)을 더욱 상세히 살펴서 ‘아무개는 용서할 수 없는 죄라서 의당 법으로 조치해야 하고, 아무개는 의심할 만한 정상이라서 의당 가벼운 법을 따라야 하고, 아무개는 죄도 없이 무고를 당했으므로 의당 변석(辨釋)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옥안(獄案)이 올라오거든 전하께서 조문(朝門)에 앉아 재보(宰輔)의 신료를 불러 친히 심리한 기록을 살펴보고서 억울함이 없도록 한 뒤에 죄를 주어 내치거나 풀어 주어 용서하신다면 인심이 복종하고 공도가 행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 말을 따랐다.
이에 성헌과 형조가 다섯 가지 죄를 논열(論列)하기를 “왕씨를 세우려는 의논을 저지하고 아들 창(昌)을 도와서 세운 자는 조민수(曺敏修)와 이색(李穡)입니다. 김종연의 모의에 참여하여 내응한 자는 박가흥(朴可興), 지용기(池湧奇), 이무(李茂), 정희계(鄭煕啓), 이빈(李彬), 윤사덕(尹師德), 진을서(陳乙瑞), 박위(朴葳), 이옥(李沃), 이중화(李仲華), 진원서(陳元瑞), 김식(金軾), 이귀철(李龜哲)입니다. 다만 지용기, 박위, 이무, 정희계, 이빈, 윤사덕, 진을서, 진원서, 이옥, 이중화 등은 모두 죄를 따지지 않고 유배하였고 또 공사(供辭)도 없기 때문에 정상이 의심할 만합니다. 그러나 지용기와 박위는 이름이 공신의 반열에 있고 지위가 장상(將相)에 이르렀으므로 의당 마음을 다하여 보좌해야 하는데도 군관을 많이 모아 김종연으로 하여금 믿는 바가 있어 그 모의를 이루고 싶어 하게 만들었으니, 그 정상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김식과 이귀철 등은 비록 공사가 있기는 하나 공사가 분명하지 않아 정상이 또한 의심할 만합니다.
신우를 맞아들여 왕씨를 영원히 끊으려고 모의한 자는 변안열(邊安烈), 이을진(李乙珍), 이경도(李庚道), 원상(元庠), 이귀생(李貴生), 정지(鄭地), 우현보(禹玄寶), 우홍수(禹洪壽), 왕안덕(王安德), 우인열(禹仁烈) 및 이색과 정희계입니다. 대역 죄인 변안열은 비록 공사가 없더라도 이미 복주(伏誅)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산을 적몰하지 않아 온 나라가 실망하고 있습니다. 이을진은 변안열과 공모하여 국가를 어지럽힌 것이 공사에 명백합니다. 지금 이을진의 공사에 의거하면, 이경도가 모의에 가담한 것 또한 의심할 것이 없는 데다가 변안열의 심복으로서 도진무(都鎭撫)가 되었으니, 어찌 변안열이 일을 도모하는데도 이경도가 알지 못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의당 이을진과 같은 곳에서 대질하여 신문해야 할 것입니다. 원상과 이귀생은 정상을 알면서도 자수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림(李琳) 부자의 공사에 의거하면, 우홍수가 비록 신우를 맞아들이는 일에 관련되었다지만 공사가 없어 그 정상이 의심할 만합니다. 정지의 공사로 보면, 정지가 죄도 없이 무고를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박의룡(朴義龍)의 공사로 보면, 이색이 신우를 맞아들이려고 도모한 것은 참으로 죄줄 만합니다. 우현보, 왕안덕, 우인열, 정희계 등은 이미 모두 면직되어 외방에 나누어 유배되었으나 모두 공사가 없기 때문에 그 당시 심문했던 순군관(巡軍官)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두 ‘우현보 등이 모의에 가담한 것은 김저(金佇)가 이미 분명하게 말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김저와 대질하여 분변하지 않은 데다 공사도 없으므로 정상이 의심할 만합니다. 다만 우인열은 위관(委官)으로서 순군(巡軍)에 앉아 김저의 공사를 분명하게 취하지 않았고, 왕안덕은 도둔곶(都屯串)에서 패군한 뒤에 여흥(驪興)으로 가서 신우를 만났는데, 여러 날 걸리는 일정이라서 그사이에 있었던 일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또 이림 부자의 공사를 보면, 변안열이 우인열과 왕안덕으로 하여금 신우를 맞아들이게 한 것이 분명합니다.
윤이와 이초의 글에 보이는 자 중에 변안열과 김종연은 이미 복주되었고, 이림과 조민수는 병사(病死)하였고, 우인열, 정지, 이숭인, 권근, 이귀생, 우현보, 권중화(權仲和), 장하(張夏), 이종학(李種學), 경보(慶補)는 이미 승복하였고, 이색, 진을서, 이인민(李仁敏), 한준(韓浚), 정룡(鄭龍), 구천부(仇天富), 이대경(李大卿)은 모두 공사가 없습니다. 윤이와 이초의 글에 들어 있지는 않으나 홍인계(洪仁桂)의 공초에 보이는 자 중에 최공철(崔公哲)은 이미 장사(杖死)하였고, 최칠석(崔七夕), 안주(安柱), 공의(公義), 곽선(郭宣), 정단봉(鄭丹鳳), 조언(曺彦), 왕승귀(王承貴), 장충립(張忠立)은 이미 승복하였고, 조경(趙卿)은 병사하였습니다. 몰래 선왕의 얼손을 기른 자는 또한 지용기입니다. 지용기가 몰래 왕익부(王益富)를 기른 것은 일의 정상이 명백하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양왕이 정전에 나아가 정몽주 및 판삼사사(判三司事) 배극렴(裵克廉), 겸 대사헌(兼大司憲) 김주(金湊), 문하부 평리 유만수(柳曼殊), 좌상시(左常侍) 허응(許應), 우상시 전오륜(全五倫), 간의(諫議) 박자문(朴子文)ㆍ전백영(全伯英), 헌납 권진(權軫), 정언 유기(柳沂)ㆍ김여지(金汝知), 장령 최함(崔咸)ㆍ김묘(金畝), 지평 이원집(李元緝)ㆍ이작(李作), 형조 판서 구성우(具成祐), 총랑(摠郞) 성보(成溥), 정랑 하계종(河係宗), 좌랑 박의(朴猗) 등을 불러 다섯 가지 죄를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공양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즉위한 이래로 대간이 매양 다섯 가지 죄를 번갈아 상소하였으나 죄상이 명백하지 않아 처벌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나만 염려했을 뿐 아니라 대간이 이로 인하여 파직되기도 하고 좌천되기도 하여 분분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의당 분명하게 가려서 죄가 있는 자를 사사로이 용서해서도 안 될 것이고 무고를 당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아서도 안 될 것이니, 경들은 면전에서 따르다가 물러나서 뒷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에 창(昌)을 세우고 우(禑)을 맞이한 일을 물으면서 이색을 용서하려고 말하기를 “무진년(1388, 우왕14)에 장수들이 회군하여 왕씨를 세우기를 논의할 때에 이색에게 그 계책을 물었었다. 조민수가 신창(辛昌)의 외척으로 당시의 대장이라서 이색이 실로 겁이 났기 때문에 ‘아버지가 폐출되면 아들이 즉위하는 것은 나라의 떳떳한 법이다.’라고 하여 창을 세워서 왕위를 이었던 것이니, 그 죄는 용서할 만하다.”라고 하니,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다만 이색은 절조가 없었을 뿐이니, 어찌 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주가 논박하기를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시던 시절에 가짜 신우(辛禑)가 공민왕의 아들이라 일컬어졌으나 이색은 그가 왕씨가 아닌 줄 알면서도 아들 창을 세우기를 주창하여 ‘아버지가 폐출되면 아들이 즉위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신씨(辛氏)가 임금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신씨가 임금이 되도록 하였다면 전하께서는 신씨의 신하로서 신씨의 자리를 빼앗은 것입니다. 이색은 시대의 큰 선비로서 국론을 결단할 때에 목숨을 탐하느라 의리를 잊었으니, 죄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의 제군사(諸軍事)와 같은 대장은 신뢰하지 않고 굳이 조민수를 두려워한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낭사(郞舍)들은 그저 옳다고만 하였고, 김여지 홀로 비위를 맞추어 아뢰기를 “신 또한 이색 등은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양왕이 또 우현보와 박가흥을 용서하려고 하자, 김주가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사사로운 뜻이 있는 듯합니다.”라고 하니, 공양왕이 발끈 낯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경은 나를 사사롭다고 여기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이색과 우현보 등을 공사가 없고 단지 김저와 정득후(鄭得厚)의 말만 있다는 이유로 풀어 주었다. 공양왕이 명하여 조민수와 변안열은 가산을 적몰하고, 지용기와 박가흥은 예전대로 부처(付處)하고, 변인열, 왕안덕, 박위는 외방종편(外方從便)하고, 나머지는 모두 경외종편(京外從便)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안덕 또한 경외종편 중에 있었다. 김주가 아뢰기를 “왕안덕이 남포(藍浦)의 전투에서 군사를 도맡았다가 패배하였고, 돌아올 때에 필시 여흥으로 가서 신우를 만나 영립(迎立)하기를 의논했을 것이니, 죄상이 명백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외방종편하는 것은 내려 준 은혜가 또한 큰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정몽주가 아뢰자 공양왕이 영을 내리기를 “지금 이후로 만일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의 죄를 논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죄로 논하겠다.”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정몽주에게 안사 공신(安社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4년(1392)에 정몽주가 《대명률(大明律)》과 《지정조격(至正條格)》과 본조의 법령을 취하여 참작하고 산정하여 《신율(新律)》을 편찬하여 올렸다.
정몽주가 우리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대해져서 중외(中外)의 민심이 돌아가는 것을 꺼리고 또 조준(趙浚),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이 추대하려는 모의가 있음을 알고는 일찍이 기회를 틈타 일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세자(世子) 석(奭)이 명나라에 조회하고 돌아올 때에 태조가 황주(黃州)에 나가서 맞이하고 드디어 해주(海州)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정몽주가 이 소식을 듣고 기쁜 기색을 띠며 사람을 보내어 대간(臺諫)에게 사주하기를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의당 먼저 그의 우익(羽翼)을 없앤 뒤라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조준, 정도전, 남은 및 평소에 귀복(歸服)한 대여섯 사람을 탄핵하여 장차 죽여서 태조에게 미치려 하였다.
태조가 벽란도(碧瀾渡)로 돌아와서 묵으려고 할 때에 태종이 달려와서 고하기를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안을 무너뜨릴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태조가 답하지 않았다. 또 여기에서 유숙해서는 안 된다고 고하였으나 태조가 허락하지 않더니, 굳이 청한 뒤에야 병을 무릅쓰고 견여(肩輿)를 타고 밤에 사저(私邸)로 돌아왔다. 정몽주가 일을 이루지 못할까 근심하여 밥도 먹지 않은 지가 이미 사흘이 되었다.
태종이 또 아뢰기를 “형세가 너무 급박합니다.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순리대로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태조의 아우 이화(李和)와 사위 이제(李濟) 등과 더불어 휘하의 군사와 의논하기를 “이씨(李氏)가 왕실(王室)에 충성한 것은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이나, 지금 정몽주에게 모함을 당하여 악명(惡名)이 더해진다면 후세에 누가 분변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정몽주를 제거하기를 모의하였다. 태조의 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누설하자, 정몽주가 태조의 사저에 이르러 변고를 엿보려고 하였는데, 태조가 이전처럼 대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정몽주가 돌아갈 때에 조영규(趙英珪) 등 네댓 사람을 보내어 길에서 기다렸다가 그를 쳐서 죽이니, 나이가 56세였다.
태종이 들어가서 고하니, 태조가 진노하며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태종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몰랐다고 하겠느냐. 우리 집안은 본래 충효로써 알려졌거늘, 너희들이 감히 이렇게 불효를 하였구나.”라고 하였다. 태종이 대답하기를 “정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안을 무너뜨리려고 하거늘,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의당 휘하의 인사를 불러 뜻밖의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마지못하여 황희석(黃希碩)을 시켜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몽주 등이 죄인과 한편이 되어 몰래 대간(臺諫)을 꾀어 충량(忠良)을 모함하다가 지금 이미 복죄(伏罪)되었으니, 조준과 남은 등을 불러 대간과 함께 가려서 밝히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대간을 국문하여 유배 보내고, 그 무리들도 함께 유배 보냈다. 정몽주의 머리를 저자에 매달고 방을 걸기를 “없는 일을 꾸미고 대간을 꾀어서 대신을 모해하고 국가를 어지럽혔다.”라고 하였다. 태조의 휘하 인사들이 또 상소하여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정몽주는 천품이 지극히 높고 호매(豪邁)함이 절륜하고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고 성리(性理)를 연구하여 깊이 터득한 바가 있었다. 태조가 평소에 큰 그릇으로 중하게 여겨서 매번 출정할 때마다 반드시 이끌어 함께 갔고 여러 번 천거하여 같이 재상에 올랐다. 당시 국가에 일이 많아 긴요한 업무가 수없이 쌓였으나, 정몽주는 큰일을 처리하고 큰 의혹을 결단하되 목소리와 낯빛을 바꾸지 않고서도 좌우로 수응하는 것이 모두 꼭 들어맞았다.
당시의 풍속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오로지 불가의 법을 숭상하였는데, 정몽주가 비로소 사서인(士庶人)으로 하여금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본떠서 가묘(家廟)를 세우고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또 수령은 참외(參外)와 이서(吏胥)를 섞어 임용하였기 때문에 품계가 낮고 인물이 용렬하였는데, 비로소 청망(淸望)이 있는 참관(參官)을 뽑아 쓰고 그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하였다. 또 금곡(金穀)의 출납을 도평의사사의 녹사(錄事)가 백첩(白牒)으로 시행하기 때문에 외람된 일이 많았는데, 비로소 경력(經歷)과 도사(都事)를 두어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또 안으로는 오부 학당(五部學堂)을 건립하고 밖으로는 향교를 설치하여 유술(儒術)을 일으켰다. 그 밖에 의창(義倉)을 세워서 궁핍한 사람을 구휼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한 일들도 모두 그가 계획한 것이었다.
저술한 시문은 호방하고 준결(峻潔)하다. 《포은집》이 세상에 전해진다. 본조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 수문관대제학 겸 예문춘추관사(領議政府事修文館大提學兼藝文春秋館事)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아들은 정종성(鄭宗誠)과 정종본(鄭宗本)이다.
[주-D001] 포은 선생 본전(圃隱先生本傳) : 《고려사》 권117 〈제신열전(諸臣列傳) 30〉에 실려 있다.[주-D002] 허산(許山) : 지금의 항주만(杭州灣) 북쪽 봉현(奉賢) 앞바다인 탄허산(灘許山)을 가리킨다.[주-D003] 김의(金義)가 사신을 죽이니 : 본래 호인(胡人)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공민왕 말년에 밀직사 부사, 동지밀직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374년(공민왕23) 명나라 사신 임밀(林密)과 채빈(蔡斌) 등이 말을 구해 남경으로 돌아갈 때 말 300필을 요동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임밀과 채빈은 이르는 곳마다 지체하였고 채빈이 술주정이 심하여 매번 김의를 죽이려 하니, 개주참(開州站)에 이르러 김의가 채빈을 죽이고 임밀을 납치하여 갑사(甲士) 300명과 말 200필을 갖고 북원(北元)으로 달아났다. 《高麗史節要 卷29 恭愍王4 甲寅23年》[주-D004] 글이 문집에 있다 : 《포은집》 제3권에 실려 있는 〈북원의 사신을 맞아들이지 말기를 청하는 소[請勿迎元使疏]〉를 가리킨다.[주-D005] 패가대(覇家臺) : 일본 규슈 지방의 하카다(博多)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고려 때 일본의 외교를 관장하던 태재부(太宰府)가 있었다고 한다.[주-D006] 의비(毅妃) : 우왕의 세 번째 비(妃)인 노씨(盧氏)이다. 대본에는 ‘懿妃’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절요》 권31 〈신우(辛禑) 2〉 등에 근거하여 ‘懿’를 ‘毅’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7] 윤이(尹彝)와 이초(李初)의 옥사 : 《고려사》를 보면, 1390년(공양왕2) 5월 초하루에 왕방(王昉)과 조반(趙胖) 등이 남경에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명나라 예부(禮部)에서 신 등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 나라 사람 윤이와 이초가 와서 황제께 호소하기를 「고려의 이 시중(李侍中)이 왕요(王瑤)를 세워서 왕으로 삼았으나 왕요는 종실이 아니고 바로 그의 인친(姻親)입니다. 왕요가 이성계와 함께 병마를 움직여서 상국(上國)을 범하려고 하자, 재상 이색(李穡) 등이 불가하다고 하니, 즉시 이색 등 10여 인을 살해하고 우현보(禹玄寶) 등 9인을 멀리 유배하였습니다. 그 유배된 재상들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천자에게 고하게 하고 인하여 친왕(親王)이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토벌하여 주기를 청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라고 하며 윤이와 이초가 기록한 이색 등의 성명을 꺼내어 보이고 말하기를 ‘그대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과 재상에게 말하여 윤이의 글 속에 있는 사람들을 힐문하고 와서 보고하라.’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윤이와 이초의 옥사가 일어났다. 《高麗史 卷45 恭讓王世家1 2年》[주-D008] 선왕이 …… 하소서 :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나온다.
[주-D009] 제군사(諸軍事)와 같은 대장 : 제군사는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이고, 대장은 이성계를 가리킨다.
[주-D010] 외방종편(外方從便) : 죄가 있는 사람을 외방에서 편의대로 거주하게 하는 유배 형벌의 하나이다.
[주-D011] 경외종편(京外從便) : 죄가 있는 사람을 도성 밖의 지역에서 편의대로 거주하게 하는 가벼운 유배 형벌의 하나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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