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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주 전 3차 강의 리뷰를 시작으로 여해 인문학 스터디 4차 모임이 시작되었다. 최근 이순신 관련 영화에서부터 이순신 )장군 동상이 시사하는 바를 생각하고 그리고 임진년 총 4차 출동 (1차 출동: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 (2차 출동: 사천, 당포, 당항포, 웅포 해전), (3차 출동: 한산 해전, 안골포해전), (4차 출동: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 해전)의 상황표를 보며 '이순신 장군은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웠다' 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몇 년 전 어느 기회에 임 교수님의 임진년 출동 상황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머릿속이 확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임교수님의 강의를 몇차례 들으면서 왜 역사와 철학이, 음악과 철학이, 모든 학문과 철학이 연결되어야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이라도 하는 계기가 되었다.  

 

4차 모임에는 문화해설사 정기화 선생님, 김인동 선생님, 전 준 선생님, 김혜량 회원이 처음 참여해 주셨다.

참석자(존칭 생략): 임원빈, 오희연, 김경은, 박동수, 김명란, 이영선, 김혜량, 권혁분, 이주화, 이상숙, 정기화, 김인동, 표영춘, 연경연, 엄대진, 전 준(16명)  

 

이 모임의 취지와 수준 높은 강의를 알아봐 주시고 적극적 홍보와 만족도를 보여주시는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주인장에게 잘했다 칭찬해주시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중 큰 성과라고 한다면 충주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들께서 관심을 가져주셨다는 것인데 워낙 역사 공부를 많이 하는 선생님들을 사실 개별적으로라도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장마철에 바쁘신 중에 짬을 계속 내주시니 그저 감사드릴 뿐이다. 충주에는 20여분의 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들이 계시는데 이 모임에는 1회부터 4회까지 총 6분의 충주문화관광 해설사 선생님들께서 참여해 주고 계신다. 이 사업과 별도로 이후 자체적인, 지속적인 스터디 의견에 동의도 해주셨다. 선생님들의 역량 강화에도 도움을 받으실 수 있겠지만 충주에 관해 어느 누구 보다 많이 알고 계시는 선생님들을 통해 보다 진~한 충주사람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자~각설하고 4차 모임의 강의를 복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임원빈 교수님은 강의 동안 여러 질문을 던져주시는 데 그 중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일본의 함선 척수가 훨씬 많을 텐데, 구체적인 해전 국면에서 어떻게 조선의 함선 척수가 더 많을까?  2. 이순신 장군이 아무리 탁월한 리더라 해도 어떻게 한척도 격파당하지 않고 적선 330척을 격파할 수 있었을까?

(임진년 제1차~4차 출동에 걸쳐 전체 조선 수군이 격파한 함선 수는 약 330여척)  

 

정답은 '조선 수군은 세계 최고의 전투력을 보유한 군'이라는 것이다. 일반 상식과 크게 다른 점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조선은 준비되지 않은 전쟁에 닥쳐 모든 것이 열세였을 것이고, 그래서 20일 만에 전국이 초토화되지 않았던가 ㅜ.ㅜ 

세계 최고의 전투력을 보유했던 수군이라는 것이 과연 맞는 말일까? 아이러니하고도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분명하다.

일본은 섬나라로 바다에서 싸우는 수군력이 막강한 것이 아니었었나? 당시 조선은 전쟁 준비가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일본 함선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쳐들어왔을텐데? 최악의 열세 상황에서 일본에 맞서 싸워 이긴 구국의 영웅, 피눈물의 영광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상식이 깨지는 순간...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리더십 역량 이외에 다른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기! 대형 화학 무기, 함포

조선수군이 일본 함선을 격파할 수 있는 무기를 지닌 반면 일본 수군은 조선수군의 배를 격파할 무기가 없었다!

 

* 조선의 화약 무기 : 우리 민족의 화약 무기는 고려 말 최무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화포를 만들어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무찔러 승리했으며 그의 아들 최해산은 조선시대 아버지 최무선의 뒤를 이어 화약 전문가가 되었다.  태종과 세종 때 조선의 화약 무기들을 개발하는 일을 맡았음. 최해산은 주로 화살을 쏘던 화약 무기들을 돌이나 쇠로 만든 탄환을 쏠 수 있도록 바꾸고 한 번에 수십 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화차도 개발했다. 

  세종 때 가장 많은 화약 무기가 개발되었는데 당시 만들어진 화약 무기들은 1592년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하게 된다. 

 

- 천자총통(길이 136Cm)

- 지자총통(길이 89Cm)

- 현자총통(길이 79Cm)

- 황자총통(길이 50Cm)

- 승자총통(길이 58Cm)

- 신기전기 화차

- 총통기 화차

- 대장군전

 

- 비격진천뢰 : 조선의 비밀 병기, 일본이 조선 침략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조선의 화포장이었던 이장손은 비밀리에 포탄 하나를 개발, 임진왜란 일어나기 직전에 비격진천뢰를 완성했다. 폭발할 때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고 하여 이름 붙였다. 이전의 포탄은 날아가 적선이나 성벽을 깨부수는 역할을 했지만 이장손이 개발한 비격진천뢰는 포탄 내부에 설치한 대나무 통 안에 점화선을 감아 놓아서 탄환이 날아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터지게 되어있다. 일종의 시한폭탄...

포탄을 빨리 폭발시키려면 점화선을 10번 감고, 늦게 폭발시키려면 15번을 감았다. 포탄 속에는 날카로운 쇳조각들도 들어있어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비격진천뢰는 점화선에 불을 붙여 손으로 던지기도 했지만, 주로 '완구'라는 총통을 사용했다. 대완구를 사용하여 발사하면 포탄이 500~600보 정도 날아갔으며 적진 속에서 굴러가다 강한 폭발음과 함께 터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무기가 바로 비격진천뢰였다고 하는데 비격진천뢰를 처음 본 일본군들은 포탄 주변에 모여 구경하다 폭발과 함께 죽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 대열의 한가운데를 굴러가다 강한 폭발음과 함께 터지는 폭탄의 위력에 크게 겁을 먹고 일본군은 비격진천뢰를 '귀신폭탄'이라 부르기도 했다. 진주대첩, 행주대첩, 한산도대첩등 여러 전투에서 사용되었다. 

 

- 대완구(길이 65Cm)

 

  조선 수군은 멀리 있는 적선을 향해 큰 쇠 탄환이나 장군전을 쏘았으며, 적선이 장군전을 피해 조선의 판옥선에 가까이 오면 조란환을 총통으로 쏘았다. 지자총통에는 200여 발, 현자총통에는 100여 발의 조란환을 넣어 한꺼번에 발사!

조선 수군의 총통은 일본군 조총보다 더 멀리 쏠 수 있었고 동시에 많은 탄환을 쏠 수 있었던 만큼 성능이 좋았다. 이렇게 총통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것이 승리의 주요 요인 중 하나이다. 

 

 일본 수군의 해전 전술은 원거리에서 조총이나 활을 쏘고, 근거리에서는 빠르게 적군의 배에 올라타서 일본의 장기인 칼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즉 조총 전술로는 인명 살상은 가능하지만 조선 수군의 배를 격파할 수 없고 임진년( 1592 ) 첫 해기간 일본 함선 330여척이 격파된 데 비해 조선 함선이 단 한 척도 격파되지 않았던 전적, 해전 양상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함대에 올라 오지 못했다= 백병전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간 결론은! 조선 수군은 일본군보다 훨씬 막강한 첨단 수군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의 완벽한 승리는 바로 이러한 세계 최고의 질적 전투력을 보유한 조선 수군을 말그대로 영끌해서? 열세의 상황을 우세한 상황으로 만들어 버린 탁월한 리더십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임원빈 교수님은 이러한 우세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병법의 요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수적으로 열배나 많은 열세한 상황을 어떻게 우세한 상황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또다시 던지신 질문이었다. 

조선 수군에 대한, 영웅에 대한 일반 상식이다 시피 한 개념을 하나씩 하나씩 증거와 논리로 분석해서 떠먹여 주시니 꼭꼭 씹어서 잘 받아먹고 소화를 잘 해서 좋은 에너지로 만들어야 할 텐데.. 이렇게 해서 우리의 역사를 일부라도 복원시킬 수 있는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훌륭한 리더의 조건 첫 번째는 바로 실력!

자신이 속한 조직의 직무 지식에 정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좋은 리더가 될 수 없다....다음 강의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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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오리엔트의 사회와 문화

 

  기원전 5000년으로부터 3000년 사이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신석기문화가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급속도로 발전하여 문자를 가진 청동기 문명이 탄생하였다. 이는 세계역사상 문명단계로의 가장 빠른 발전이었으며, 인류는 이제 기나긴 석기시대의 문자 없는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서 문명단계로, 역사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나일강 하구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 두 지역을 연결하는 동부 지중해 연안을 포함한 이른바 '기름진 초승달(fertile crescent) 지역을 중심으로 오리엔트 세계의 사회구조와 문화의 기본적인 틀이 잡힌 것은 기원전 3000년기이며, 그것은 그 후 근본적인 구조적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기원전 2000년기에 이르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이외에 새로이 소아시아와 동부 지중해 연안 그리고 에게해가 오리엔트세계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고, 기원전 1000년기에는 철기시대로의 발전과 더불어 에게문명을 제외한 오리엔트 세계의 모든 지역이 하나의 역사적 세계로 통합된다. 

  오리엔트문화 자체는 오늘의 유럽문화의 원천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리엔트 세계는 많은 역사적 변천을 겪으면서 오늘의 중동지역 내지 아랍 세계로 이어졌다. 그러나 오리엔트문화는 그리스, 로마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리스문화의 형성에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 에게문명 또한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제1절 오리엔트 세계의 역사적 발전

 

  문명의 탄생

  기원 전 5000년기와 4000년기(5000~3000 B.C)에 걸쳐 나일 강변의 이집트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고대동방 또는 오리엔트에서는 여러 방면에 걸친 급속한 문화발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즉, 청동기의 사용, 문자의 발명, 도시의 출현, 정치조직의 발생, 사회계급의 형성, 조직적인 종교의 발달과 신전 및 신관의 출현, 선박과 차륜의 발명 등, 석기시대의 미개 상태를 벗어나 역사시대의 문명단계로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리엔트 지방의 대하 유역에서 가장 일찍이 문명이 탄생한 요인의 하나는 확실히 그곳의 지리적 조건이었다. 나일강이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은 풍부한 물과 기름진 땅을 제공하였고, 그 유역에는 다양한 식용식물이 풍부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역에는 중요한 여러 발명에 필요한 자원이 있었다. 그리고 강력한 사회조직을 촉구하고 대규모의 협동으로써 푸짐한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고, 또한 새로운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고 필요한 물자를 운반할 교통의 편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하 유역의 무성한 갈대의 밀림을 개척하고, 소택지의 물을 뽑고, 수로나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다는 일은 촌락을 넘어선 규모가 큰 사회 전체의 협동을 필요로 하는 거대한 사업이요 도전이었다. 이러한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려면 견고한 조직과 강력한 통제, 그리고 일꾼들의 급식을 위한 다량의 잉여 식량이 필요하였고, 잉여 식량의 전제조건이 되는 생산력의 발전을 위하여 각종의 개량과 발명이 또한 필요하였다. 일단 치수사업이 완성된 후에도 끊임없는 감시와 보수작업이 필요하였고, 그렇게 많은 정력을 기울여 확보한 땅을 수호하기 위하여 군대도 필요하였다. 이러한 모든 필요조건을 충족시킨다는 신석기시대의 씨족 단위의 촌락으로서는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촌락으로부터 도시로 씨족사회로부터 국가로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미개사회로부터 문명사회로의 발전이 진행되어야 했다. 

 

   역사적 발전

  오리엔트 세계는 그 속에 부분적으로 서로 다른 사회와 문명을 내포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통합된 역사 세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리엔트세계의 역사적 전개는 크게 ➀ 형성기(기원전 3000년기), ➁ 발전기(기원전 2000년기), ➂ 통일기(기원전 1000년기)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오리엔트 세계의 형성기인 기원전 3000년기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오리엔트 세계의 정치와 사회구조, 그리고 문화의 기본적인 틀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두 지역 간에는 문물의 교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독자적인 발전을 하고, 다른 지역은 아직 오리엔트 세계의 역사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리엔트 세계의 발전기인 기원전 2000년기에는 그 전반기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바빌로니아(Babylonia)왕국이 그리고 후반기에는 신왕국 시대의 이집트가 저마다 그 세력과 문화의 전성기를 자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소아시아에서 히타이트(Hittite), 두 강 살류지역에서 미탄니(Mitanni)가 새로 일어나고, 에게해에서는 크레타문명이 또한 발전하게 된다. 이리하여 오리엔트 문화는 백화난만의 양상을 띠게 될 뿐 아니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그리고 미탄니 등이 특히 이 시기의 후반기에 전쟁과 외교문서의 교환 등, 직접적인 접촉이 활발해짐으로써 오리엔트 세계는 역사적인 상호연관성을 가진 하나의 국제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기원전 12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오리엔트 세계를 주름잡던 강대국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쇠퇴하고, 크레타문명을 계승한 미케네문명 또한 이 시기에 파괴된다. 이렇듯 강대국들이 때를 같이하여 쇠퇴하고 미케네문명이 몰락한 데는 그 나름대로 저마다 내부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지만 이 시기는 오리엔트 세계 전체로 본다면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일대 전환기이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이 시기에 이른바 '해상민족'으로 알려진 정체불명의 종족들이 동부 지중해를 무대로 바다와 육지에서 오리엔트 세계의 여러 국가와 도시들을 침범하고 파괴를 자행하여 그들의 쇠퇴를 촉진하였다. 

  이처럼 오리엔트의 강대국들이 쇠퇴한 틈을 타서 활발한 활약을 시작한 것이 동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던 페니키아(Phoenicia)와 헤브라이(Hebrews)와 같은 작은 나라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오리엔트 세계는 얼마 안 가서 통일기를 맞이하게 된다. 

  최초로 통일에 성공한 것은 미탄니의 쇠퇴로 흥기하게 된 아시리아(Assyria)였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통일은 견고하지 못하고 완전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오리엔트 세계는 곧 칼데아(Chaldea, 신바빌로니아왕국)를 비롯한 4국으로 분립하게 되었으나,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Persia)가 이집트를 포함한 오리엔트의 전지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이와 같이 전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하여 견고한 대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는 그 세력을 서방으로 뻗쳐 기원전 5세기 전반에 그리스와 역사적인 충돌을 하게 되었으며(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세기 말경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정복되었다. 이로써 기원전 3000년경에 청동기문화를 성립시켰던 오리엔트 세계의 역사는 일단락을 짓게 된다.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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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인류의 기원과 선사문화

 

  오늘날 인류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은 인류(Homo)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백만년 이전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아득한 옛날이다. 최초의 인류를 포함한 고생인류(古生人類)는 해부학적으로 오늘의 인류(현생인류)와는 달랐고 그들이 살았던 자연환경도 지금보다 가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직립보행하고 자유롭게 된 손으로 도구를 제작하고 불을 사용할 줄 알았다. 그리하여 생김새는 원숭이와 비슷하였으나 그들은 동물의 세계를 등지고 문화창조의 길에 나섰다. 

  주로 사냥과 고기잡이에 의존하던 기나긴 구석기시대를 거친 후 농경과 가축사육으로 식량을 생산하게 된 신석기시대에 이르면 문화발전의 속도가 전보다 훨씬 빨라진다. 그리하여 지금으로부터 6천년 내지 5천년 전에 문자가 발명되고 청동기가 제작되고, 국가가 형성되어 인류는 미개 상태를 벗어나서 문명단계로 발전하였다. 

 

  적어도 300만년에 달하는 기나긴 인류의 역사는 문자의 기록 유무로 크게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되며, 문자의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를 인류학, 고생물학, 지질학 등의 여러 학문의 힘을 빌려 연구하는 학문이 고고학이며 고고학에서 인류 역사를 구분하는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중 석기시대가 선사시대에 해당한다. 

 

   제1절 인류의 기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장 오래된 인류의 화석유골  '루시'라는 애칭, 아프리카 동부에서 발견,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

 

   제2절 구석기문화

 

문자로 된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는 고고학에서 말하는 석기시대(Stone Age)에 해당한다. 역사시대의 길이는 전이나 다름없는 5천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사시대, 즉 석기시대가 물리적인 시간으로만 따진다면 엄청나게 길다. 

  200만년에 달하는 긴 석기시대는 다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구분되며, 구석기시대가 끝나는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이므로 구석기시대가 압도적으로 길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는 종래 석기를 때려 깎아서 만들었느냐, 또는 곱게 갈아서 만들었느냐, 즉 타제석기냐 마제석기냐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그것에 보태어 그들의 생활에 가장 중요한 식량을 자연에 의존하고 이를 자연에서 채집하는 식량 채집자(food-gatherers)였느냐, 또는 식량을 직접 생산하는 식량 생산자(food-producers)였느냐, 다시 말하여 식량획득의 방법을 구분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구석기시대는 타제석기를 사용한 식량 채집자의 시대이고, 신석기시대는 마제석기를 사용한 식량 생산자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의 변동에 따라 초원 대신 삼림이 나타나고, 들소, 사슴, 맘모스 등이 추위를 따라 북으로 이동하면서 그 모습을 감추자, 구석기 말기인과 그들의 동굴예술도 사라졌다. 그 후 유럽대륙에는 신석기 시대로의 과도기인 중석기시대(Mesolithic Age)가 나타난다. 이 시기의 유럽인들은 동굴 대신 해변, 하천 또는 호숫가에 떼를 지어 산재하면서 새로 나타난 삼림의 짐승이나 물고기를 잡아서 생활하였다. 그들의 문화는 빈약하였으며 새로운 문화발전은 그들에게서가 아니라 멀리 서남아시아와 나일강변에서 일어났다...이  시기의 유럽의 여러 유적에서 개의 뼈가 발견되는 보아 개의 사육은 중석기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생각되며, 주로 사냥에 이용되었다. 나무를 처리하는 쐐기, 도끼, 까뀌, 정과 같은 목수용 도구가 발달하였으며 설원을 달리는 썰매가 나타났다. 

 

   제3절 신석기문화

 

  빙하시대가 끝난 후 얼마 안 가서 서남아시아 일대에서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생활자료를 생산하기 시작함으로써 환경에 대한 인류의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즉, 농경과 가축사육으로써 식량 채집자로부터 식량 생산자로 변하고, 이에 따라 인구의 증가에 대응하여 식량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잠재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일부 고고학자들은 신석기혁명(Neolithic Revolution)이라고 부르고 있다.

 

  토기와 직조 

  신석기시대의 특징인 토기 제작은 농경으로 인한 잉여 식량의 저장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처음 간단한 토기 제작에 성공한 신석기시대의 도공은 그것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형태와 문양을 다듬고 채색까지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토기 제작은 신석기인의 예술적 감각, 창조 의욕 그리고 고도의 지식과 기술의 산물이었다.

  신석기시대 초에 이미 이집트나 서남아시아의 여인들은 옷감을 짜고 있었다. 나일강변에서는 아마(亞麻)가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양털이 원료로 사용되었다. 북과 베틀이 발명되고 후에는 면사와 생사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신석기인은 또한 진흙, 갈대, 통나무, 돌, 실가지 등으로 오막살이나마 가옥을 지었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각종의 도구가 발달하고, 석기는 타제석기 대신 마제석기가 사용되었다. 그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이 돌도끼로서 한때 고고학자들은 이를 신석기시대의 가장 중요한 표지로 삼기도 하였다. 

 

  촌락생활 

  대체로 핏줄을 같이하는 씨족에 의하여 점거되었으며 신석기사회는 이와 같은 씨족단위의 촌락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초기 신석기시대의 묘지나 주택에 권세있는 사람의 것으로 지목되는 무덤이나 궁전같은 건물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사회가 비교적 평등하고 민주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서부 및 북부유럽에 널리 퍼져있는 고인돌, 선돌과 같은 거석기념물 내지 분묘는 역사시대로 들어간 오리엔트 정치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신석기시대의 농경사회에서는 대지의 생산력이 매우 중요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은 성적 특징을 과장한 여상을 만들어 대지의 생산력을 상징시켰다. 이러한 여상은 지모신(地母神 Mother Goddess)이었다고 생각되며, 대지의 생산력을 확보하고 풍작을 기원하는 마술적인 의식이나 축제와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신석기문화의 전파

  신석기사회의 발전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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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 계속되는 비로 뉴스가 넘쳐나고 이 우중에도 여해 인문학 스터디의 열의는 점점 더해 가고 있다.

 

여러 인문학 강의와 콘텐츠들이 현수막에 걸리지만 임진왜란과 관련이 적을 것만 같은 충주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 관련한 수준 높은 강의를 연속해서 들을 수 있고 자발인 관심과 열의를 보여주시는 선생님들을 만나며 여러 분에게 꼭 필요한 사업이고 모임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2~30년 연구의 정수를 아낌없이 쏟아 주시는 임원빈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지금 우리는 공부할 때...' 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시의성 적절한 사업과 주인장의 운영이 곧 타이밍이 아니고 무엇이랴.

 

문화해설사 연경연 선생님, 숲해설가 엄대진 선생님, 박순덕 선생님께서 처음 참여해 주셨다.

참석자(존칭 생략): 임원빈, 오희연, 김경은, 박동수, 김명란, 이영선, 권혁분, 이주화, 연경연, 엄대진, 박순덕, 초등학생 이주영, 이하영, 어머님(14명) 

 

비 많이 오는 초복 날 여해 인문학 스터디 3회차 모임이 진행되었다. 

복날에 빠질 수 없는 수박! 준비~

 

영화 명량, 한산에서 보았던 배 위에서의 백병전은 과연 사실이었을까? 

 

* 백병전(白兵戰, hand-to-hand combat) : 적에게 접근해서 이나 , 총검, 개머리판, 맨몸 등으로 근접전을 펼치는 것. 

 

* 명량해전 : 13척 vs 133척 중 조선 수군의 배는 1척도 손상을 입지 않고 왜선 31척이 격파됨 ( 최소 3000명 이상 사망)

선두에서 싸운 이순신 통제사 배에서의 전사자는 2명, 부상자 3명(적의 조총에 의한) (난중일기) 

당시 해전이 대량 살상 전투 양상이었다면 절체절명의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위 기록은 엄청난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 것. 명량해전 당시 전투는 일정한 정도의 거리를 두고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즉 접전이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배 위에서의 백병전이 없었다 = 칼싸움이 없었다. 

 

* 한산해전 : 영화에서 보인 거북선의 충돌전술, 용머리 들락날락, 백병전, 학익진을 펼쳐서 59척 모두 격파는 모두 사실과 다르다. (사실 - 개전 초기에 학익진을 펼쳐서 적의 선두의 2~3척을 집중 포격 격파를 통해 기선을 제압함)

전라 좌수군(이순신), 전라 우수군(이억기), 경상 우수군(원균) 삼도의 수군이 함께 전투를 벌였으나 장계의 기록에는 전라 좌수군만 전사자 19명, 부상자 115명 기록,  인구비례로 살펴보면 한산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 전체적 전사자 50여명, 일본 왜선 59척 격파 및 납포(8000~9000명 전사)

 

* 새로운 관점에서 한산 해전을 살펴보면 '한산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벌인 대표적인 해전'이었다. 

이길까, 질까의 고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왜적선을 모조리 전멸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전과를 확대시킬 수 있을까? 적선뿐만 아니라 적선 위의 병사들까지 모조리 섬멸할 수 있을까? 를 고민하고 작전 계획을 세웠다. 

 

* 거북선의 전과: 영화에서처럼 좌충우돌했다면 최소한 적선이 5~10척 파괴됬을 법 하지만 실제 전과는 좌돌격장 이기남이 일본 대선 1척 나포(충돌해서 격파한 것이 아니라), 일본 수군 머리 7급 베었고, 우돌격장 박이량이 일본 수군 머리 1급을 베었다. 즉 정리하면 한산 해전에 참전한 거북선은 2척이고 전과는 왜 대선 1척 나포, 왜군 머리 8급으로 영화에서 처럼 좌충우돌 충돌 전술을 행한 것은 아니다. 

 

* 나포(拿捕) : 사람이나 배, 비행기 등을 사로잡음. 

 

 

*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통해서 알아야 할 이순신 선양의 역사와 사실

 

  이순신의 선양 역사는 나라의 위기 상황이 있을 때 어김없이 소환되었다. 조선의 제2 부흥기를 주도했던 정조대왕은 조선사에서 이순신 장군을 가장 선양한 임금이셨고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 아산 현충사, 광화문 동상)

 

이순신 장군의 최초의 동상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1952년 (6.25 전쟁 진행될 때)  

어김없이 칼을 들고 있는 동상들이지만 활을 든 최초의 동상이 제작되었다(2015년 해군사관학교)

조선은 활의 나라 vs 일본은 칼의 나라 

이순신의 어린 시절 부터 전쟁놀이 활쏘기 등장, 난중일기에 거의 매일 같이 등장하는 활쏘기 훈련 (칼싸움 훈련은 한 곳도 없다), 조선은 동이족, 유학의 나라 유학자로서 선비로서의 수양 덕목 중 활쏘기(전쟁 때는 무기, 평시에는 정신 수양)는 기본.

 

* 유능한 장수의 조건 (손자병법 - 군형편) 

古之所謂善戰者,  勝於易勝也     옛날에 이른바 싸움을 잘하는 자는 쉬운 승리에서 승리하는 자이다

 故善戰者之勝也, 無智名, 無勇功”   고로 싸움을 잘하는 승리는 지혜롭다는 명성도 없고 , 용맹스럽다는 공도 없다

 

보통은 일당백이면 멋지고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쉬운 승리는 당연하다고 여겨 일당백의 승리에 도취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 모든 강의의 킬포인트가 숨어 있는 듯! (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 숨죽여서 머리를 계속 써야 했다ㅜ.ㅜ)

 

위대한 병법가의 큰 문장을 통해 그것을 시종일관 그대로 적용한 이순신 장군의 '이기는 싸움'에 관해 우리는 당연한 생각에서 벗어나 '쉬운 승리로 만들어 놓고 싸우는 것', '쉬운 승리를 만드는 과정'에 주목하고 공부해야 한다. 

당연한 듯하지만 사실 엄청난 행간이 아닐 수 없다. 간과할 수 있는 '쉬운 승리'의 과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 이순신이 유능한 장수인 진짜 이유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공부라는 것이 이런 것이지...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괜히 마음이 뿌듯하다... '준비없는 승리는 없다' 

 

* 이순신이 유능한 장수인 이유 - 관점 바꾸기 

 - 열세한 상황에서 우세한 적과 싸워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웠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대한 증명도 거침없이 자료로 보여주셨다. (임원빈 교수님 강의 강력하게 추천!)

성웅 이순신 장군의 생애, 임진왜란 사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지만 그것들과 함께 꼭 가져야 할 공부를 제대로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쁘고 절로 감사함이 든다. 임원빈 교수님 좋은 강의 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공부는 속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말이 비로소 실감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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