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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선생시권 서〔圃隱先生詩卷序〕 [하륜(河崙)]   

嘗謂孔子刪詩止于三百篇。然而原於天理人倫。而達乎政敎風俗。上自郊廟朝廷之樂歌。下至閭閻委巷之諷詠。凡可以感發善心而懲創逸志者無不具焉。則詩之爲詩。豈在多乎哉。詩變而爲騷。騷變而爲詞賦。再變而五七言出。至于律詩則詩之變極矣。然而思無邪之一言。可以蔽三百篇。則詩之道亦豈多乎哉。圃隱先生鄭公以天人之學。經濟之才。大鳴前朝之季。今其子宗誠,宗本以其遺藁來示予。且請予曰。吾先子所著詩與文。喪亂之中。失亡殆盡。幸此若
干百篇僅存。欲鋟諸梓以傳不朽。子之於吾先子。平生相許不淺矣。幸題一言于卷端也。予感其言。受而讀之。辭語豪放。意思飄逸。和不至於流。麗不至於靡。忠厚之氣不以進退而異。義烈之志不以夷險而殊。可見其存養之得其正。而發見於聲律之間者亦然矣。則思之無邪。豈係乎詩之正變也哉。他日中國有採詩之擧。則此篇當與牧隱,陶隱二先生之集並傳於中國。而使中國之士。知海東有邦文學之盛矣。顧不偉哉。嗚呼。先生出處始終大致。有國乘在。玆不贅焉。晉山府院君浩亭河崙。序。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일찍이 생각하건대, 공자가 《시경》의 시를 산삭(刪削)하여 남긴 것이 300편에 그쳤으나 천리와 인륜에 근본하고 정교와 풍속에 통달하여 위로는 교묘(郊廟)와 조정(朝庭)의 악가(樂歌)로부터 아래로는 여염(閭閻)과 위항(委巷)의 민요에까지 이르러, 무릇 착한 마음을 감발시키고 방탕한 뜻을 징계할 수 있는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시경》이 《시경》이 됨이 어찌 숫자의 많음에 달려 있겠는가.

시가 변하여 소(騷)가 되고 소가 변하여 사(詞)와 부(賦)가 되고 다시 변하여 오언시(五言詩)와 칠언시(七言詩)가 나왔는데, 율시(律詩)에 이르러서는 시의 변화가 극도에 달하였다. 그러나 “생각에 바르지 않음이 없다.[思無邪]”라는 한마디 말이 300편을 포괄할 수 있으니, 시의 도가 또한 어찌 많다고 하겠는가.
포은 선생 정공(鄭公)이 천인의 학문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를 갖고서 고려 시대의 끝을 크게 울렸다. 지금 그 아들 정종성(鄭宗誠)과 정종본(鄭宗本)이 유고를 갖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청하기를 “우리 선고(先考)가 저술한 시(詩)와 문(文)이 상란(喪亂)을 겪는 중에 거의 다 없어졌으나 다행히 이렇게 몇백 편이 겨우 남아 있어 목판에 새겨 영원히 후세에 전하려고 합니다. 그대는 우리 선고와 평소에 서로 깊이 허여한 사이였으니, 부디 시권의 머리에 한마디 서문을 써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에 감동하여 받아서 읽어 보니, 사어(辭語)가 호방(豪放)하고 의사(意思)가 표일(飄逸)하며, 조화로우면서도 휩쓸리는 데에 이르지 않았고 수려하면서도 사치한 데에 이르지 않았으며, 충후(忠厚)한 기상이 진퇴(進退)로 인하여 달라지지 않고 의열(義烈)한 뜻이 이험(夷險)으로 인하여 바뀌지 않았다. 이에 존양(存養)이 바름을 얻으면 성률의 사이에 발현된 것 또한 바름을 알 수 있으니 “생각에 바르지 않음이 없다.”라는 것이 어찌 시의 정변(正變)과 관계된 것이겠는가.
뒷날 중국에서 시를 채집하는 일이 있으면 이 시편은 응당 목은(牧隱)과 도은(陶隱) 두 선생의 문집과 나란히 중국에 전해져서 중국의 인사들로 하여금 해동의 나라에 문학이 성대함을 알게 할 것이니, 돌아보건대 위대하지 않겠는가.
아아, 선생의 출처는 시종의 대략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으니, 여기에 덧붙이지 않는다.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호정(浩亭) 하륜(河崙)이 서문을 쓰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1

 

포은 선생 본전〔圃隱先生本傳〕

鄭夢周字達可。知奏事襲明之後。母李氏有娠。夢抱蘭盆忽墮。驚寤而生。因名夢蘭。生而秀異。肩上有黑子七。列如北斗。年至九歲。母晝夢黑龍升園中梨樹。驚覺出視。乃夢蘭也。因改夢龍。旣冠改今名。恭愍九年。應擧連魁三塲。遂擢第一人。十一年。選補藝文檢閱。十三年。從我太祖擊三善三介于和州。累遷典農寺丞。時喪制紊弛。士大夫皆百日卽吉。夢周於父母喪。獨廬墓。哀禮俱盡。命旌表其閭。十六年。以禮曹正郞。兼成均博士。時經書至東方者唯朱子集註耳。夢周講說發越。超出人意。聞者頗疑。及得胡炳
文四書通。無不脗合。諸儒尤加嘆服。李穡亟稱之曰。夢周論理。橫說竪說。無非當理。推爲東方理學之祖。十七年。轉成均司藝。二十年。改太常少卿。俄遷成均司成。二十一年。以書狀從洪師範如京師。賀平蜀。還至海中許山遭颶風。船敗漂抵岩島。師範溺死。其得免者纔什二。夢周濱死乃生。割韂而食者十三日。事聞。帝具舟楫取還。厚加恩恤遣還。辛禑元年。拜右司議大夫。移成均大司成。初。皇明肇興。夢周力請于朝。首先歸附。至是恭愍被弑。金義殺使。國人恟恟。不敢通使朝廷。夢周又陳大義。以謂邇來變故。當
早詳奏。使上國釋然無惑。豈可先自疑貳。構禍生靈。於是始遣使告哀。且辨釋金義事。時北元遣使賜詔。權臣李仁任,池奫欲復事元。議迎其使。夢周與文臣十數人上書云云。書在文集。 池李深忌之。貶流彦陽二年許。任便居住。時倭冦充斥。濱海州郡。蕭然一空。國家患之。嘗遣羅興儒。使覇家臺說和親。其主將拘囚興儒。幾餓死僅得生還。三年。權臣嗛前事。擧夢周報聘于覇家臺請禁賊。人皆危之。夢周略無難色。及至。極陳古今交隣利害。主將敬服。館待甚厚。倭僧有求詩者。援筆立就。緇徒坌集。日擔肩輿請觀奇勝。及
歸。與九州節度使所遣周孟仁偕來。且刷還俘尹明,安遇世等數百人。且禁三島侵掠。倭人久稱慕不已。後聞夢周卒。莫不嗟惋。至有齋僧薦福者。夢周憫倭賊奴我良家子弟。乃謀贖歸。力勸諸相各出私貲若干。且爲書授尹明以遣。賊魁見書辭懇惻。還俘百餘人。自是每明之往。必得俘歸。四年。拜右散騎常侍。歷典工,禮儀,典法,版圖判書。六年。從我
太祖擊倭雲峯。還拜密直提學。明年。簽書司事。十年。拜政堂文學。本國與朝廷多釁。帝怒將加兵于我。增定歲貢。乃以五歲貢不如約。杖流使
臣洪尙載,金寶生,李子庸等于遠地。至是當遣使賀聖節。人皆憚行規避。最後乃擬遣密直副使陳平仲。平仲以臧獲數十口賂林堅味。遂辭疾。堅味卽擧夢周。禑召面諭曰。邇來我國見責朝廷。皆大臣過也。卿博通古今。且悉予意。今平仲疾不能行。乃代以卿。卿意何如。對曰。君父之命。水火尙不避。况朝天乎。然我國去南京凡八千里。除候風渤海。實九十日程。今去聖節纔六旬。脫候風旬浹。則餘日僅五十。此臣恨也。禑曰。何日就道。對曰。安敢留宿。遂行。晨夜倍道。及節日進表。帝覽表畫日曰。爾國陪臣。必相托故
不肯來。日迫乃遣爾也。爾得非往者以賀平蜀來者乎。夢周悉陳其時船敗狀。帝曰。然則應解華語。特賜慰撫。勑禮部優禮以送。遂放還尙載等。十一年。同知貢擧取士。故事每試一塲。輒考較出榜。初塲不合格者。不得入中塲。終塲亦如之。懿妃弟盧龜山童騃無學。中塲不入格。禑大怒欲罷試。李成林,廉興邦等詣龜山父英壽第。請使龜山赴終塲。英壽辭以不可獨入。於是幷試不合格者十數人。竟取龜山。德昌府行首文允慶。本䆠官李匡從者。竊書其友策。夢周黜之。知貢擧廉國寶乃取之。崔瑩戱語人曰。前月
監試學士尹就棄寒士取昏童。致天大雹。盡殺我麻。今東堂學士復致何等天變耶。十二年。如京師請冠服。又請蠲免歲貢。夢周奏對詳明。得除五年貢未納者及增定歲貢常數。及還。禑喜甚。賜衣帶鞍馬。拜門下評理。明年。請解職。封永原君。與河崘,廉廷秀,姜淮伯,李崇仁建議革胡服襲華制。十四年。拜三司左使。辛昌元年。改爲藝文館大提學。從我
太祖定策立恭讓。拜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司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觀事。封益陽郡
忠義君。賜純忠論道佐命功臣號。敎曰。云云。詳載行狀。 王御經筵。夢周進言曰。儒者之道。皆日用平常之事。飮食男女。人所同也。至理存焉。堯舜之道亦不外此。動靜語默之得其正。卽是堯舜之道。初非甚高難行。彼佛氏之敎則不然。辭親戚絶男女。獨坐巖穴。草衣木食。觀空寂滅爲宗。是豈平常之道。時王欲迎僧粲英爲師。故夢周講及此。然王方惑佛不納。彝初獄起。臺諫論其黨甚力。夢周請因封崇四代大赦。臺諫猶論執不已。王下都堂議。夢周以爲罪狀不白。今又經赦。不宜復論。刑曹劾夢周右彝初黨。夢周再上牋
辭。皆不允。召夢周宴慰之。尋拜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三年。王謂經筵官曰。今人知中國故事。而不知本朝之事可乎。夢周對曰。近代史皆未修。先代實錄亦不詳悉。請置編修官。依通鑑綱目修撰。以備省覽。王納之。卽命李穡,李崇仁等修實錄。不果行。成均博士金貂上書毀佛。上怒欲抵以死罪。兵曹佐郞鄭擢上疏曰。竊聞金貂排斥異端。極言不諱。上以其破毀先王成典。將置極刑。臣竊爲殿下惜之。書曰。監
于先王成憲。其永無愆。所謂先王成典者。不過三綱五常。而佛氏皆背之。非貂毀先王成典。乃殿下自毀之也。願赦貂狂直之罪。代言等畏上怒不敢啓。夢周與同列上疏曰。信者人君之大寶也。國保於民。民保於信。近日殿下下敎求言曰。言之者無罪。於是人皆抗疏極論政事之得失。民生之休戚。眞所謂不諱之朝也。有國子博士生員等亦以排斥異端。上書陳說。言語不謹。觸犯天威。在朝之臣。不勝恐懼。臣等以爲斥詆佛氏。儒者之常事。自古君王置而不論。况以殿下寬大之量。蕞爾狂生。在所優容。乞霈寬恩。一
皆原宥。示信國人。王從之。貂等得免。又疏曰。賞罰。國之大典。賞一人而千萬人勸。罰一人而千萬人懼。非至公至明。不足以得其中而服一國之人心也。自殿下踐祚以來。省憲,法司交章擧劾。以爲某人乃沮立王氏之議。扶立子昌者。某人與於逆賊金宗衍之謀。於行在所爲內應者。某人於諸將承天子之命。以辛禑父子爲非王氏。議復王氏之時謀迎辛禑。永絶王氏者。某人送彝初於上國。請親王動天下兵者。某人陰養先王孽孫。潛謀不軌者。章疏屢上。雖勞聖慮之勤。至今未見明白。必於其間。有罪者曲蒙肆宥。
無辜者未能昭雪。其於公道。似乎兩失。是以。言者紛紛至今不已。臣等以謂宜令省憲,法司。共議商確。將連涉人等獄詞文案。更加詳覆。某人罪在不宥。宜置于法。某人情在可疑。宜從輕典。某人無罪被誣。宜令辨釋。獄章旣上。殿下坐朝門。召宰輔臣僚。親臨審錄。使無寃抑。然後加以罪黜。施以肆宥。則人心服而公道行矣。從之。於是省憲,刑曹論列五罪曰。沮立王氏之議。扶立子昌者。曹敏修,李穡也。與於金宗衍之謀。爲內應者。朴可興,池湧奇,李茂,鄭煕啓,李彬,尹師德,陳乙瑞,朴葳,李沃,李仲華,陳元瑞,金軾,李龜哲
也。但湧奇,葳,茂,煕啓,彬,師德,乙瑞,元瑞,沃,仲華等。皆不問流貶。又無供辭。情在可疑。然湧奇,葳。名在功臣之列。位至將相。宜盡心輔佐。而多聚軍官。使宗衍有所依賴。欲遂其謀。其情難測。軾,龜哲等雖有供辭。辭不分明。情亦可疑。謀迎辛禑。永絶王氏者。邊安烈,李乙珍,李庚道,元庠,李貴生,鄭地,禹玄寶,禹洪壽,王安德,禹仁烈及穡,煕啓也。大逆安烈。雖無供辭。旣已伏誅。然不籍產。擧國缺望。乙珍與安烈同謀。擾亂國家。供辭明白。今據乙珍之辭。則庚道之與謀亦無疑矣。且以安烈腹心。爲其都鎭撫。豈有安烈謀事而
庚道不知者乎。宜與乙珍同處較問。庠,貴生知情不首。且據李琳父子供辭。則洪壽雖涉迎禑。而無供辭。其情可疑。以鄭地供辭觀之。地之無罪被誣明矣。以朴義龍供辭觀之。則穡之謀迎辛禑固可罪也。玄寶,安德,仁烈,煕啓等已皆免職分配于外。皆無供辭。故問其時問事巡軍官。皆云。玄寶等之與謀。金佇已明言矣。然不以其時與佇對辨。又無供辭。情在可疑。而仁烈則以委官坐巡軍不明取佇之供辭。安德則都屯串敗軍後往見禑於驪興累日之程。其間難測。又觀李琳父子供辭。則安烈之欲使仁烈,安德迎
禑明矣。其見於彝初書者。邊安烈,金宗衍已伏誅。李琳,曹敏修病死。禹仁烈,鄭地,李崇仁,權近,李貴生,禹玄寶,權仲和,張夏,李種學,慶補已承服。李穡,陳乙瑞,李仁敏,韓浚,鄭龍,仇天富,李大卿皆無供辭。其不在彝初書中。而見於洪仁桂供辭者。崔公哲已杖死。崔七夕,安柱,公義,郭宣,鄭丹鳳,曹彦,王承貴,張忠立已承服。趙卿病死。陰養先王孽孫者亦池湧奇也。湧奇陰養益富。事狀明白。其罪不可赦也。王御正殿。召夢周及判三司事裵克廉,兼大司憲金湊,門下評理柳曼殊,左常侍許應,右常侍全五倫,諫議朴子文,
全伯英,獻納權軫,正言柳沂,金汝知,掌令崔咸,金畝,持平李元緝,李作,刑曹判書具成祐,揔郞成溥,正郞河係宗,佐郞朴猗等議定五罪。王曰。自寡人卽位以來。臺諫每以五罪交章上疏。然罪狀不白。難可罪之。不唯予之軫念。臺諫因此或落職或左遷。紛紛不已。卽今宜以明辨其有罪者。不可以私赦。被誣者亦不可不赦。卿等毋面從退有後言。乃問立昌迎禑之事欲寬李穡曰。戊辰年諸將回軍。議立王氏。問計於穡。而曹敏修以辛昌外戚。爲時大將。穡實怯懦。故曰。父廢子立。有國之常。乃立昌襲位。罪可恕也。夢周
對曰。然。但穡無節操耳。何有罪乎。湊駁曰。當殿下龍潛之日。僞辛稱玄陵之後。穡知其非王氏。而倡立子昌曰。父廢子立。是成辛氏爲君也。成辛氏爲君。則殿下以辛氏之臣。而簒辛氏之位矣。穡爲世大儒。就斷國論。貪生忘義。罪可恕乎。當時大將如
諸軍事可不恃賴。而固畏敏修乎。諸郞舍但唯唯。汝知獨希旨曰。臣亦以謂穡等無罪也。王又欲原禹玄寶,朴可興。湊又曰。殿下似有私意。王勃然變色曰。卿以予私耶。遂釋穡,玄寶等以無供辭。而但有金佇,鄭得厚之言也。王命敏修,安烈
籍其家。湧奇,可興依舊付處。仁烈,安德,葳外方從便。餘皆京外從便。初。安德亦在京外從便中。湊曰。安德藍浦之役。專軍覆沒。其還也。必道驪興而謁辛禑議迎立。謂之罪狀未白可乎。外方從便。其賜亦大矣。王從之。夢周啓王著令曰。今後如有論上項人等罪者。以誣告論。尋賜夢周安社功臣號。四年。夢周取大明律至正條格本朝法令。參酌刪定。撰新律以進。夢周忌我太祖威德日盛。中外歸心。又知趙浚,南誾,鄭道傳等有推戴之謀。嘗欲乘機圖之。及世子奭朝見而還。
太祖出迎黃州。遂畋于海州墜馬。體甚不平。夢周聞之有喜色。遣人嗾臺諫曰。李 太祖舊諱 今墜馬病篤。宜先剪羽翼。然後可圖也。遂劾浚,道傳,誾及素所歸心者五六人將殺之。以及
太祖。太祖還至碧瀾渡將宿。太宗馳至告曰。夢周必陷我家。太祖不答。又告不可留宿於此。太祖不許。固請然後力疾。遂以肩輿夜還于邸。夢周憂不濟事。不食已三日。太宗又白曰。勢已急矣。將若何。
太祖曰。死生有命。但當順受而已。太宗與太祖弟和,壻李濟等議於麾下士曰。李氏之忠於王室。國人所知。今爲夢周所陷。加以惡名。後世誰能辨之。乃謀去夢周。太祖兄元桂之壻卞仲良洩其謀於夢周。夢周詣太祖邸欲觀變。太祖待之如初。太宗曰。時不可失。及夢周還。乃遣趙英珪等四五人。要於路擊殺之。年五十六。太宗入告。
太祖震怒。力疾而興。謂太宗曰。汝等擅殺大臣。國人以我爲不知乎。吾家素以忠孝聞。汝等敢爲不孝乃爾。太宗對曰。夢周等將陷我家。豈可坐而待亡。此乃所以爲孝也。宜召麾下士備不虞。太祖不得已使黃希碩白王曰。夢周等黨庇罪人。陰誘臺諫。誣陷忠良。今已伏罪。請召浚,誾等與臺諫辨明。於是鞫臺諫流之。幷流其黨。梟夢周首于市揭榜曰。飾虛事誘臺諫。謀害大臣。擾亂國家。太祖麾下士又上疏籍其家。夢周天分至高。豪邁
絶倫。有忠孝大節。少好學不倦。硏窮性理。深有所得。太祖素器重。每分閫。必引與之偕。屢加薦擢。同升爲相。時國家多故。機務浩繁。夢周處大事决大疑。不動聲色。左酬右答。咸適其宜。時俗喪祭。專尙桑門法。夢周始令士庶放朱子家禮。立家廟奉先祀。又以守令雜用參外吏胥。秩卑人劣。始選用參官有淸望者。嚴其黜陟。又以金穀出納。都評議司錄事白牒施行。事多猥濫。始置經歷都事。籍其出納。又內建五部學堂。外設鄕校以興儒術。其他如立義倉賑窮乏。設水站便漕運。
皆其畫也。所著詩文豪放峻潔。有圃隱集行于世。本朝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館大提學兼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謚文忠。子宗誠,宗本。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정몽주는 자(字)가 달가(達可)이고, 지주사(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다. 모친 이씨(李氏)가 임신했을 때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서 낳았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빼어나고 남달랐으며, 어깨 위에 북두칠성처럼 늘어선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아홉 살 때 모친이 낮에 검은 용이 정원 안의 배나무에 올라가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서 나가 보니, 바로 몽란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몽룡(夢龍)으로 바꾸었고, 관례(冠禮)를 치른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응시하여 연이어 삼장(三場)에 장원하고 드디어 제일인으로 뽑혔다.
11년(1362)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보임되었다.
13년(1364)에 우리 태조를 따라 화주(和州)에서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를 격파하였고, 여러 번 벼슬을 옮겨서 전농시 승(典農寺丞)이 되었다. 당시에 상제(喪制)가 문란하고 해이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100일이면 탈상하였으나 정몽주는 부모상에 홀로 시묘하였고 슬픔과 예법이 모두 극진하였으므로, 정려(旌閭)를 내려서 표창하도록 명하였다.
16년(1367)에 예조 정랑으로 성균관 박사를 겸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서는 오직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뿐이었다. 정몽주는 강설이 탁월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크게 뛰어넘었기 때문에 듣는 이들이 자못 의심하였으나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을 얻어 보게 되어서는 합치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선비들이 더욱 탄복하였다. 이색(李穡)이 자주 일컫기를 “정몽주의 논리는 횡으로 말하든 종으로 말하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으니,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추중(推重)하노라.”라고 하였다.
17년(1368)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옮겨 갔다.
20년(1371)에 태상시 소경(太常寺少卿)으로 바뀌었다가 이윽고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옮겨 갔다.
21년(1372)에 서장관(書狀官)으로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남경에 가서 촉(蜀) 땅을 평정한 일을 축하하였다. 돌아올 때에 해중(海中)의 허산(許山)에 이르러 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 표류하다 암도(岩島)에 닿았다. 홍사범은 익사하고 죽음을 면한 사람은 겨우 열에 둘뿐이었다. 정몽주는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서 말다래를 베어 먹은 것이 13일이나 되었다. 이 일이 보고되자 황제가 배를 마련하여 데리고 돌아가 후하게 보살펴서 돌려보냈다.
신우(辛禑) 1년(1375)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제수되었고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겨 갔다. 이보다 앞서, 명(明)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정몽주가 조정에 힘껏 청하여 맨 먼저 명나라에 귀부(歸附)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김의(金義)가 사신을 죽이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다. 정몽주가 또 대의를 진달하기를 “근래의 변고는 응당 일찍 상세히 아뢰어 상국(上國)으로 하여금 한 점의 의혹도 없게 해야 하거늘, 어찌 먼저 스스로 의심스럽게 하여 백성들에게 재앙을 당하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상(喪)을 고하고, 또 김의의 사건을 해명하였다. 이때에 북원(北元)이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내리니,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다시 원나라를 섬기려고 그 사신을 맞아들이려는 논의를 하였다. 정몽주가 문신 십수 인과 함께 글을 올려 부당함을 운운하니, - 글이 문집에 있다. - 지윤과 이인임이 몹시 싫어하여 언양(彦陽)으로 유배 보내었다.
2년(1376)에 편리한 대로 거주하도록 허락하였다. 그 당시 왜구가 가득하여 바닷가 고을들이 쓸쓸히 텅 비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이를 걱정하였다. 일찍이 나흥유(羅興儒)를 패가대(覇家臺)에 사신으로 보내어 화친을 설득하게 하니, 그 주장(主將)이 나흥유를 잡아 가두어 거의 아사(餓死) 지경이 되었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일이 있었다.
3년(1377)에 권신들이 전날의 일에 앙심을 품고 정몽주를 천거하여 패가대에 보빙(報聘)하여 왜구의 침략을 금지시켜 주기를 청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정몽주는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패가대에 이르러서는 고금의 외교의 득실을 극진히 설명하니, 주장이 경복(敬服)하여 객관의 대접이 매우 후하였다. 시를 구하는 왜승(倭僧)이 있으면 붓을 잡아 곧바로 지어 주니, 승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날마다 가마를 메고 절경을 구경하기를 청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가 보낸 주맹인(周孟仁)과 함께 왔고, 또 잡혀갔던 윤명(尹明)과 안우세(安遇世) 등 수백 인을 쇄환(刷還)하였고 또 삼도(三島)의 침략을 금지시켰다. 왜인들이 오래도록 일컫고 사모해 마지않아 뒤에 정몽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애석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재를 올려 명복을 비는 사람까지 있었다.
정몽주가 왜적이 우리 양가(良家)의 자제를 종으로 삼은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값을 지불하고 데려오려고 재상들에게 힘껏 권하여 각각 사재를 조금씩 내게 하고 또 글을 써서 윤명에게 주어서 보내니, 왜적의 우두머리가 글의 내용이 간절한 것을 보고 포로 100여 인을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윤명이 갈 때마다 반드시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다.
4년(1378)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되었고, 전공사 판서(典工司判書), 예의사 판서(禮儀司判書), 전법사 판서(典法司判書), 판도사 판서(版圖司判書)를 역임하였다.
6년(1380)에 우리 태조를 따라 운봉(雲峯)에서 왜적을 격파하였고, 돌아와서 밀직사 제학(密直司提學)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첨서사사(簽書司事)가 되었다.
10년(1384)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되었다. 본국이 명나라와 문젯거리가 많았기 때문에 황제가 노하여 장차 우리나라로 출병하려 하였고, 또 세공(歲貢)을 늘려서 정하고는 5년 치의 세공이 약속한 숫자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사신 홍상재(洪尙載), 김보생(金寶生), 이자용(李子庸) 등을 먼 곳으로 장류(杖流)에 처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어 성절(聖節)을 축하해야 하나,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려서 핑계를 대고 피하였다. 최후에 밀직사 부사 진평중(陳平仲)을 보내기로 결정했으나, 진평중이 노비 수십 구(口)를 임견미(林堅味)에게 뇌물로 바치고 병을 핑계하니, 임견미가 곧 정몽주를 천거하였다.
우(禑)가 불러서 대면하고 말하기를 “근래에 우리나라가 명나라에게 책망을 받게 된 것은 모두 대신들의 잘못이오. 경(卿)은 고금에 널리 통할뿐더러 내 뜻도 잘 알 것이오. 지금 진평중이 병 때문에 갈 수가 없어 경으로 대신하려 하니, 경의 뜻은 어떠하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군부의 명은 물과 불도 오히려 피하지 않거늘, 하물며 천자를 뵙는 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남경까지는 거리가 모두 8000리이니, 발해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날을 제외하면 실제 90일의 노정입니다. 지금 성절까지 겨우 60일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가령 순풍을 기다리는 시간이 열흘이라면 남는 날이 겨우 50일뿐이니, 이것이 신이 한스러운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우가 말하기를 “어느 날 길에 오르겠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머물러 묵겠습니까.”라고 하고, 드디어 출발하여 밤낮을 쉬지 않고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 성절의 날짜에 맞추어 표문(表文)을 올렸다.
황제가 표문을 보고는 날짜를 헤아리고 말하기를 “그대 나라 신하들이 필시 서로 일을 핑계 대고 오려 하지 않다가 날짜가 닥쳐서 그대를 보냈을 것이다. 그대는 지난번에 촉 땅을 평정한 일을 축하하러 왔던 사람이 아니던가.”라고 하였다. 정몽주가 그 당시 배가 부서졌던 정상을 모두 아뢰니, 황제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응당 중국말을 알겠구나.”라고 하고는 특별히 위무(慰撫)해 주며 예부(禮部)에 명하여 후하게 예우하여 보내게 하고, 드디어 홍상재 등도 돌려보내 주었다.
11년(1385)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선비를 선발하였다. 전례에 의하면, 매번의 시험장마다 곧 성적을 매겨서 방(榜)을 내기 때문에 초장(初場)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중장(中場)에 들어갈 수 없고, 종장(終場)도 마찬가지였다. 의비(毅妃)의 아우 노귀산(盧龜山)은 어리고 어리석으며 학식도 없어 중장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우가 크게 노하여 과시(科試)를 파하려고 하니, 이성림(李成林), 염흥방(廉興邦) 등이 노귀산의 아비 노영수(盧英壽)의 집에 가서 노귀산을 종장에 나가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노영수가 혼자 들어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불합격한 십수 인을 함께 시험하여 마침내 노귀산을 선발하였다.
덕창부(德昌府)의 행수(行首) 문윤경(文允慶)은 본래 환관 이광(李匡)의 종자(從者)였다. 친구의 책문(策文)을 훔쳐서 적었기 때문에 정몽주가 쫓아냈으나 지공거 염국보(廉國寶)가 그를 선발하였다. 최영(崔瑩)이 사람들에게 농담하기를 “지난달에 감시(監試)의 시관 윤취(尹就)가 한미한 선비를 버리고 혼매한 아이를 선발했기 때문에 하늘이 큰 우박을 내려 내 집 삼[麻]을 다 죽이더니, 이번에 동당(東堂)의 시관이 다시 어떤 하늘의 변고를 가져오게 하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12년(1386)에 남경에 가서 관복을 청하고 또 세공을 견감해 주기를 청하였다. 정몽주의 주대(奏對)가 상세하고 명확하여 5년 동안 미납한 공물과 늘려서 정한 세공의 상수(常數)를 면제받게 되었다. 돌아왔을 때에 우가 매우 기뻐하여 의대(衣帶)와 안마(鞍馬)를 하사하고 문하부 평리(門下府評理)에 제수하였다.
이듬해에 해직을 청하였고 영원군(永原君)에 봉해졌다. 하륜(河崙), 염정수(廉廷秀), 강회백(姜淮伯), 이숭인(李崇仁)과 함께 건의하여 호복(胡服)을 혁파하고 중국의 복제를 따랐다.
14년(1388)에 삼사 좌사(三司左使)에 제수되었다.
신창(辛昌) 1년(1389)에 예문관 대제학으로 바뀌었다. 우리 태조를 따라 계책을 정하여 공양왕(恭讓王)을 세우니, 문하부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사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府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司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領書雲觀事)를 제수하고,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하고, 순충논도좌명 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교서에 운운하였다. - 교서는 〈행장〉에 상세히 실려 있다. -
공양왕이 경연에 나왔을 때 정몽주가 진언하기를 “유자(儒者)의 도는 모두 일상적인 평상의 일입니다. 음식과 남녀는 사람마다 똑같은 것이지만 지극한 이치가 깃들어 있으니, 요순(堯舜)의 도 또한 이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동정(動靜)과 어묵(語默)이 바름을 얻은 것이 바로 요순의 도이니, 애초에 매우 높아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 불씨(佛氏)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아 친척을 사절하고 남녀를 끊고서 암혈(巖穴)에 홀로 앉아 풀 옷을 입고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공(空)을 관(觀)하여 적멸(寂滅)에 이르는 것을 으뜸으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평상의 도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당시 임금이 승려 찬영(粲英)을 맞아들여 스승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정몽주의 강론이 여기에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한창 불교에 현혹되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이(尹彝)와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대간이 그 무리들을 힘껏 논박하니, 정몽주가 4대(代)를 추존(追尊)하는 일을 계기로 크게 사면하기를 청하였다. 대간이 그래도 논집(論執)해 마지않으니, 임금이 도당(都堂)에 내려보내어 의논하게 하였다. 정몽주가 말하기를 “죄상이 명백하지 않고 지금 또 사면령을 내렸으니, 다시 논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형조에서 정몽주가 윤이와 이초의 무리를 돕는다고 탄핵하니, 정몽주가 두 번 전문(箋文)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고 정몽주를 불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얼마 있다가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 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 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을 제수하였다.
3년(1391) 임금이 경연관에게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중국의 고사는 알고 본조의 일은 알지 못하니 이래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니,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근대의 역사도 모두 수찬하지 못하였고 선대의 실록 또한 상세하지 않으니, 편수관(編修官)을 두어 《통감강목》에 의거하여 수찬하여 살펴볼 수 있게 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받아들이고 즉시 이색과 이숭인 등에게 실록을 수찬하도록 명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성균관 박사 김초(金貂)가 글을 올려 불교를 비방하니, 주상이 노하여 사형으로 처벌하려 하였다. 병조 좌랑 정탁(鄭擢)이 상소하기를 “가만히 듣건대, 김초가 이단을 배척하면서 숨기지 않고 남김없이 말하거늘, 주상께서 선왕(先王)이 이루어 놓은 법을 허물어뜨린다는 이유로 극형에 처하려 하신다고 하니, 신은 가만히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서경》에 말하기를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을 보시어 길이 잘못이 없게 하소서.’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이란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씨가 모두 이를 어기고 있으니, 김초가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을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전하께서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김초의 지나치게 충직한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대언(代言)들이 주상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니, 정몽주가 동렬(同列)과 함께 상소하기를 “신의는 임금의 큰 보배이니, 나라는 백성에 의하여 보전되고 백성은 신의에 의하여 보전되는 것입니다. 근간에 전하가 하교하여 간언을 구하면서 ‘말하는 사람은 죄가 없다.’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과감히 소를 올려 정사의 득실과 민생의 고락을 극진히 논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숨기지 않는 조정입니다. 국자감의 박사와 생원들 또한 이단을 배척하라는 내용으로 글을 올려 주장을 펼치되 말이 신중하지 못하여 성상의 노여움을 범하고 말았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두려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불씨를 배척하는 것은 유자의 일상적인 일이라서 예로부터 군왕들이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전하의 너그럽고 큰 도량으로 보면 하찮은 광생(狂生)쯤이야 넉넉히 포용하실 것이니, 너그러운 은혜를 크게 내려서 한번 모두 용서하시어 나라 사람들에게 신의를 보여 주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받아들여 김초 등이 모면할 수 있었다.
또 상소하기를 “상벌은 나라의 큰 법입니다. 한 사람에게 상을 주면 천만 사람이 권면되며 한 사람을 벌주면 천만 사람이 두려워하니,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분명한 상벌이 아니면 그 중도를 얻어 온 나라의 민심을 복종시킬 수 없습니다. 전하가 즉위하신 이래로 성헌(省憲)과 법사(法司)가 번갈아 글을 올려 논핵하기를 ‘아무개는 바로 왕씨(王氏)를 세우려는 의논을 저지하고 아들 창(昌)을 도와서 세운 자이며, 아무개는 역적 김종연(金宗衍)의 모의에 참여하여 행재소(行在所)에서 내응한 자이며, 아무개는 장수들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신우(辛禑) 부자(父子)를 왕씨가 아니라고 하며 왕씨를 회복하기를 의논할 때에 신우를 맞아들여 왕씨를 영원히 끊으려고 모의한 자이며, 아무개는 윤이와 이초를 중국에 보내어 친왕(親王)이 천하의 군대를 움직여 주기를 청한 자이며, 아무개는 선왕의 얼손(孼孫)을 몰래 길러 가만히 불궤(不軌)를 꾀한 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상소가 여러 번 올라와서 성상이 몹시 수고롭게 염려하셨지만 지금까지도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아 필시 그 사이에 죄가 있는 자가 그릇되게 용서받거나 죄가 없는 자가 억울함을 씻어 내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니, 공도(公道)로 볼 때 양쪽 모두 잘못된 듯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분분하여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마땅히 성헌과 법사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고 헤아리게 하되 관련된 사람들의 옥사(獄詞) 문안(文案)을 더욱 상세히 살펴서 ‘아무개는 용서할 수 없는 죄라서 의당 법으로 조치해야 하고, 아무개는 의심할 만한 정상이라서 의당 가벼운 법을 따라야 하고, 아무개는 죄도 없이 무고를 당했으므로 의당 변석(辨釋)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옥안(獄案)이 올라오거든 전하께서 조문(朝門)에 앉아 재보(宰輔)의 신료를 불러 친히 심리한 기록을 살펴보고서 억울함이 없도록 한 뒤에 죄를 주어 내치거나 풀어 주어 용서하신다면 인심이 복종하고 공도가 행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 말을 따랐다.
이에 성헌과 형조가 다섯 가지 죄를 논열(論列)하기를 “왕씨를 세우려는 의논을 저지하고 아들 창(昌)을 도와서 세운 자는 조민수(曺敏修)와 이색(李穡)입니다. 김종연의 모의에 참여하여 내응한 자는 박가흥(朴可興), 지용기(池湧奇), 이무(李茂), 정희계(鄭煕啓), 이빈(李彬), 윤사덕(尹師德), 진을서(陳乙瑞), 박위(朴葳), 이옥(李沃), 이중화(李仲華), 진원서(陳元瑞), 김식(金軾), 이귀철(李龜哲)입니다. 다만 지용기, 박위, 이무, 정희계, 이빈, 윤사덕, 진을서, 진원서, 이옥, 이중화 등은 모두 죄를 따지지 않고 유배하였고 또 공사(供辭)도 없기 때문에 정상이 의심할 만합니다. 그러나 지용기와 박위는 이름이 공신의 반열에 있고 지위가 장상(將相)에 이르렀으므로 의당 마음을 다하여 보좌해야 하는데도 군관을 많이 모아 김종연으로 하여금 믿는 바가 있어 그 모의를 이루고 싶어 하게 만들었으니, 그 정상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김식과 이귀철 등은 비록 공사가 있기는 하나 공사가 분명하지 않아 정상이 또한 의심할 만합니다.
신우를 맞아들여 왕씨를 영원히 끊으려고 모의한 자는 변안열(邊安烈), 이을진(李乙珍), 이경도(李庚道), 원상(元庠), 이귀생(李貴生), 정지(鄭地), 우현보(禹玄寶), 우홍수(禹洪壽), 왕안덕(王安德), 우인열(禹仁烈) 및 이색과 정희계입니다. 대역 죄인 변안열은 비록 공사가 없더라도 이미 복주(伏誅)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산을 적몰하지 않아 온 나라가 실망하고 있습니다. 이을진은 변안열과 공모하여 국가를 어지럽힌 것이 공사에 명백합니다. 지금 이을진의 공사에 의거하면, 이경도가 모의에 가담한 것 또한 의심할 것이 없는 데다가 변안열의 심복으로서 도진무(都鎭撫)가 되었으니, 어찌 변안열이 일을 도모하는데도 이경도가 알지 못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의당 이을진과 같은 곳에서 대질하여 신문해야 할 것입니다. 원상과 이귀생은 정상을 알면서도 자수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림(李琳) 부자의 공사에 의거하면, 우홍수가 비록 신우를 맞아들이는 일에 관련되었다지만 공사가 없어 그 정상이 의심할 만합니다. 정지의 공사로 보면, 정지가 죄도 없이 무고를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박의룡(朴義龍)의 공사로 보면, 이색이 신우를 맞아들이려고 도모한 것은 참으로 죄줄 만합니다. 우현보, 왕안덕, 우인열, 정희계 등은 이미 모두 면직되어 외방에 나누어 유배되었으나 모두 공사가 없기 때문에 그 당시 심문했던 순군관(巡軍官)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두 ‘우현보 등이 모의에 가담한 것은 김저(金佇)가 이미 분명하게 말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김저와 대질하여 분변하지 않은 데다 공사도 없으므로 정상이 의심할 만합니다. 다만 우인열은 위관(委官)으로서 순군(巡軍)에 앉아 김저의 공사를 분명하게 취하지 않았고, 왕안덕은 도둔곶(都屯串)에서 패군한 뒤에 여흥(驪興)으로 가서 신우를 만났는데, 여러 날 걸리는 일정이라서 그사이에 있었던 일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또 이림 부자의 공사를 보면, 변안열이 우인열과 왕안덕으로 하여금 신우를 맞아들이게 한 것이 분명합니다.
윤이와 이초의 글에 보이는 자 중에 변안열과 김종연은 이미 복주되었고, 이림과 조민수는 병사(病死)하였고, 우인열, 정지, 이숭인, 권근, 이귀생, 우현보, 권중화(權仲和), 장하(張夏), 이종학(李種學), 경보(慶補)는 이미 승복하였고, 이색, 진을서, 이인민(李仁敏), 한준(韓浚), 정룡(鄭龍), 구천부(仇天富), 이대경(李大卿)은 모두 공사가 없습니다. 윤이와 이초의 글에 들어 있지는 않으나 홍인계(洪仁桂)의 공초에 보이는 자 중에 최공철(崔公哲)은 이미 장사(杖死)하였고, 최칠석(崔七夕), 안주(安柱), 공의(公義), 곽선(郭宣), 정단봉(鄭丹鳳), 조언(曺彦), 왕승귀(王承貴), 장충립(張忠立)은 이미 승복하였고, 조경(趙卿)은 병사하였습니다. 몰래 선왕의 얼손을 기른 자는 또한 지용기입니다. 지용기가 몰래 왕익부(王益富)를 기른 것은 일의 정상이 명백하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양왕이 정전에 나아가 정몽주 및 판삼사사(判三司事) 배극렴(裵克廉), 겸 대사헌(兼大司憲) 김주(金湊), 문하부 평리 유만수(柳曼殊), 좌상시(左常侍) 허응(許應), 우상시 전오륜(全五倫), 간의(諫議) 박자문(朴子文)ㆍ전백영(全伯英), 헌납 권진(權軫), 정언 유기(柳沂)ㆍ김여지(金汝知), 장령 최함(崔咸)ㆍ김묘(金畝), 지평 이원집(李元緝)ㆍ이작(李作), 형조 판서 구성우(具成祐), 총랑(摠郞) 성보(成溥), 정랑 하계종(河係宗), 좌랑 박의(朴猗) 등을 불러 다섯 가지 죄를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공양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즉위한 이래로 대간이 매양 다섯 가지 죄를 번갈아 상소하였으나 죄상이 명백하지 않아 처벌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나만 염려했을 뿐 아니라 대간이 이로 인하여 파직되기도 하고 좌천되기도 하여 분분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의당 분명하게 가려서 죄가 있는 자를 사사로이 용서해서도 안 될 것이고 무고를 당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아서도 안 될 것이니, 경들은 면전에서 따르다가 물러나서 뒷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에 창(昌)을 세우고 우(禑)을 맞이한 일을 물으면서 이색을 용서하려고 말하기를 “무진년(1388, 우왕14)에 장수들이 회군하여 왕씨를 세우기를 논의할 때에 이색에게 그 계책을 물었었다. 조민수가 신창(辛昌)의 외척으로 당시의 대장이라서 이색이 실로 겁이 났기 때문에 ‘아버지가 폐출되면 아들이 즉위하는 것은 나라의 떳떳한 법이다.’라고 하여 창을 세워서 왕위를 이었던 것이니, 그 죄는 용서할 만하다.”라고 하니,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다만 이색은 절조가 없었을 뿐이니, 어찌 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주가 논박하기를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시던 시절에 가짜 신우(辛禑)가 공민왕의 아들이라 일컬어졌으나 이색은 그가 왕씨가 아닌 줄 알면서도 아들 창을 세우기를 주창하여 ‘아버지가 폐출되면 아들이 즉위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신씨(辛氏)가 임금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신씨가 임금이 되도록 하였다면 전하께서는 신씨의 신하로서 신씨의 자리를 빼앗은 것입니다. 이색은 시대의 큰 선비로서 국론을 결단할 때에 목숨을 탐하느라 의리를 잊었으니, 죄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의 제군사(諸軍事)와 같은 대장은 신뢰하지 않고 굳이 조민수를 두려워한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낭사(郞舍)들은 그저 옳다고만 하였고, 김여지 홀로 비위를 맞추어 아뢰기를 “신 또한 이색 등은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양왕이 또 우현보와 박가흥을 용서하려고 하자, 김주가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사사로운 뜻이 있는 듯합니다.”라고 하니, 공양왕이 발끈 낯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경은 나를 사사롭다고 여기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이색과 우현보 등을 공사가 없고 단지 김저와 정득후(鄭得厚)의 말만 있다는 이유로 풀어 주었다. 공양왕이 명하여 조민수와 변안열은 가산을 적몰하고, 지용기와 박가흥은 예전대로 부처(付處)하고, 변인열, 왕안덕, 박위는 외방종편(外方從便)하고, 나머지는 모두 경외종편(京外從便)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안덕 또한 경외종편 중에 있었다. 김주가 아뢰기를 “왕안덕이 남포(藍浦)의 전투에서 군사를 도맡았다가 패배하였고, 돌아올 때에 필시 여흥으로 가서 신우를 만나 영립(迎立)하기를 의논했을 것이니, 죄상이 명백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외방종편하는 것은 내려 준 은혜가 또한 큰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정몽주가 아뢰자 공양왕이 영을 내리기를 “지금 이후로 만일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의 죄를 논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죄로 논하겠다.”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정몽주에게 안사 공신(安社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4년(1392)에 정몽주가 《대명률(大明律)》과 《지정조격(至正條格)》과 본조의 법령을 취하여 참작하고 산정하여 《신율(新律)》을 편찬하여 올렸다.
정몽주가 우리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대해져서 중외(中外)의 민심이 돌아가는 것을 꺼리고 또 조준(趙浚),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이 추대하려는 모의가 있음을 알고는 일찍이 기회를 틈타 일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세자(世子) 석(奭)이 명나라에 조회하고 돌아올 때에 태조가 황주(黃州)에 나가서 맞이하고 드디어 해주(海州)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정몽주가 이 소식을 듣고 기쁜 기색을 띠며 사람을 보내어 대간(臺諫)에게 사주하기를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의당 먼저 그의 우익(羽翼)을 없앤 뒤라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조준, 정도전, 남은 및 평소에 귀복(歸服)한 대여섯 사람을 탄핵하여 장차 죽여서 태조에게 미치려 하였다.
태조가 벽란도(碧瀾渡)로 돌아와서 묵으려고 할 때에 태종이 달려와서 고하기를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안을 무너뜨릴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태조가 답하지 않았다. 또 여기에서 유숙해서는 안 된다고 고하였으나 태조가 허락하지 않더니, 굳이 청한 뒤에야 병을 무릅쓰고 견여(肩輿)를 타고 밤에 사저(私邸)로 돌아왔다. 정몽주가 일을 이루지 못할까 근심하여 밥도 먹지 않은 지가 이미 사흘이 되었다.
태종이 또 아뢰기를 “형세가 너무 급박합니다.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순리대로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태조의 아우 이화(李和)와 사위 이제(李濟) 등과 더불어 휘하의 군사와 의논하기를 “이씨(李氏)가 왕실(王室)에 충성한 것은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이나, 지금 정몽주에게 모함을 당하여 악명(惡名)이 더해진다면 후세에 누가 분변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정몽주를 제거하기를 모의하였다. 태조의 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누설하자, 정몽주가 태조의 사저에 이르러 변고를 엿보려고 하였는데, 태조가 이전처럼 대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정몽주가 돌아갈 때에 조영규(趙英珪) 등 네댓 사람을 보내어 길에서 기다렸다가 그를 쳐서 죽이니, 나이가 56세였다.
태종이 들어가서 고하니, 태조가 진노하며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태종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몰랐다고 하겠느냐. 우리 집안은 본래 충효로써 알려졌거늘, 너희들이 감히 이렇게 불효를 하였구나.”라고 하였다. 태종이 대답하기를 “정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안을 무너뜨리려고 하거늘,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의당 휘하의 인사를 불러 뜻밖의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마지못하여 황희석(黃希碩)을 시켜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몽주 등이 죄인과 한편이 되어 몰래 대간(臺諫)을 꾀어 충량(忠良)을 모함하다가 지금 이미 복죄(伏罪)되었으니, 조준과 남은 등을 불러 대간과 함께 가려서 밝히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대간을 국문하여 유배 보내고, 그 무리들도 함께 유배 보냈다. 정몽주의 머리를 저자에 매달고 방을 걸기를 “없는 일을 꾸미고 대간을 꾀어서 대신을 모해하고 국가를 어지럽혔다.”라고 하였다. 태조의 휘하 인사들이 또 상소하여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정몽주는 천품이 지극히 높고 호매(豪邁)함이 절륜하고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고 성리(性理)를 연구하여 깊이 터득한 바가 있었다. 태조가 평소에 큰 그릇으로 중하게 여겨서 매번 출정할 때마다 반드시 이끌어 함께 갔고 여러 번 천거하여 같이 재상에 올랐다. 당시 국가에 일이 많아 긴요한 업무가 수없이 쌓였으나, 정몽주는 큰일을 처리하고 큰 의혹을 결단하되 목소리와 낯빛을 바꾸지 않고서도 좌우로 수응하는 것이 모두 꼭 들어맞았다.
당시의 풍속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오로지 불가의 법을 숭상하였는데, 정몽주가 비로소 사서인(士庶人)으로 하여금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본떠서 가묘(家廟)를 세우고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또 수령은 참외(參外)와 이서(吏胥)를 섞어 임용하였기 때문에 품계가 낮고 인물이 용렬하였는데, 비로소 청망(淸望)이 있는 참관(參官)을 뽑아 쓰고 그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하였다. 또 금곡(金穀)의 출납을 도평의사사의 녹사(錄事)가 백첩(白牒)으로 시행하기 때문에 외람된 일이 많았는데, 비로소 경력(經歷)과 도사(都事)를 두어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또 안으로는 오부 학당(五部學堂)을 건립하고 밖으로는 향교를 설치하여 유술(儒術)을 일으켰다. 그 밖에 의창(義倉)을 세워서 궁핍한 사람을 구휼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한 일들도 모두 그가 계획한 것이었다.
저술한 시문은 호방하고 준결(峻潔)하다. 《포은집》이 세상에 전해진다. 본조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 수문관대제학 겸 예문춘추관사(領議政府事修文館大提學兼藝文春秋館事)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아들은 정종성(鄭宗誠)과 정종본(鄭宗本)이다.
[주-D001] 포은 선생 본전(圃隱先生本傳) : 《고려사》 권117 〈제신열전(諸臣列傳) 30〉에 실려 있다.[주-D002] 허산(許山) : 지금의 항주만(杭州灣) 북쪽 봉현(奉賢) 앞바다인 탄허산(灘許山)을 가리킨다.[주-D003] 김의(金義)가 사신을 죽이니 : 본래 호인(胡人)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공민왕 말년에 밀직사 부사, 동지밀직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374년(공민왕23) 명나라 사신 임밀(林密)과 채빈(蔡斌) 등이 말을 구해 남경으로 돌아갈 때 말 300필을 요동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임밀과 채빈은 이르는 곳마다 지체하였고 채빈이 술주정이 심하여 매번 김의를 죽이려 하니, 개주참(開州站)에 이르러 김의가 채빈을 죽이고 임밀을 납치하여 갑사(甲士) 300명과 말 200필을 갖고 북원(北元)으로 달아났다. 《高麗史節要 卷29 恭愍王4 甲寅23年》[주-D004] 글이 문집에 있다 : 《포은집》 제3권에 실려 있는 〈북원의 사신을 맞아들이지 말기를 청하는 소[請勿迎元使疏]〉를 가리킨다.[주-D005] 패가대(覇家臺) : 일본 규슈 지방의 하카다(博多)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고려 때 일본의 외교를 관장하던 태재부(太宰府)가 있었다고 한다.[주-D006] 의비(毅妃) : 우왕의 세 번째 비(妃)인 노씨(盧氏)이다. 대본에는 ‘懿妃’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절요》 권31 〈신우(辛禑) 2〉 등에 근거하여 ‘懿’를 ‘毅’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7] 윤이(尹彝)와 이초(李初)의 옥사 : 《고려사》를 보면, 1390년(공양왕2) 5월 초하루에 왕방(王昉)과 조반(趙胖) 등이 남경에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명나라 예부(禮部)에서 신 등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 나라 사람 윤이와 이초가 와서 황제께 호소하기를 「고려의 이 시중(李侍中)이 왕요(王瑤)를 세워서 왕으로 삼았으나 왕요는 종실이 아니고 바로 그의 인친(姻親)입니다. 왕요가 이성계와 함께 병마를 움직여서 상국(上國)을 범하려고 하자, 재상 이색(李穡) 등이 불가하다고 하니, 즉시 이색 등 10여 인을 살해하고 우현보(禹玄寶) 등 9인을 멀리 유배하였습니다. 그 유배된 재상들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천자에게 고하게 하고 인하여 친왕(親王)이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토벌하여 주기를 청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라고 하며 윤이와 이초가 기록한 이색 등의 성명을 꺼내어 보이고 말하기를 ‘그대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과 재상에게 말하여 윤이의 글 속에 있는 사람들을 힐문하고 와서 보고하라.’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윤이와 이초의 옥사가 일어났다. 《高麗史 卷45 恭讓王世家1 2年》[주-D008] 선왕이 …… 하소서 :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나온다.
[주-D009] 제군사(諸軍事)와 같은 대장 : 제군사는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이고, 대장은 이성계를 가리킨다.
[주-D010] 외방종편(外方從便) : 죄가 있는 사람을 외방에서 편의대로 거주하게 하는 유배 형벌의 하나이다.
[주-D011] 경외종편(京外從便) : 죄가 있는 사람을 도성 밖의 지역에서 편의대로 거주하게 하는 가벼운 유배 형벌의 하나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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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오리엔트의 사회와 문화

 

  제3절 메소포타미아

 

  역사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 유역에서도 이집트와 거의 동일한 시기(5000~3000 B.C.)에 신석기시대로부터 문명 단계로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이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문명 탄생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는 나일강의 이집트문명에 대한 것과 비슷하였으나, 이집트의 지세가 비교적 폐쇄적인 데 반하여, 두 강 유역은 주변의 사막이나 고원의 여러 민족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러한 관계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많은 민족의 이주와 정복, 이에 따른 지배자의 교체가 있었다. 새로운 민족의 이주나 정복에 의한 교체는 이미 신석기 시대에도 있었던 모양으로 ''이라고 불리는 문화지층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여러 민족의 이주나 정복은 파괴를 수반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문화의 발전을 촉진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문명의 발생과정을 단계적으로 표시한 할라프(Half, 5100~4300 B.C.), 우바이드(Ubaid, 3900~3500 B.C.), 우루크(Ukr, 3500~3100 B.C.) 및 제므뎃-나스르(Jemdet-Nasr 각 문화기는 새로운 문화 요소의 도입과 새로운 발명으로 문화 내용이 단계적으로 더 풍부해지고 있다. 할라프기의 작고 소박한 신전 건축은 우루크기에 이르러서는 245*100ft. 의 넓이를 가진 거대한 신전 건축으로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진흙과 햇볕에 말린 벽돌로 쌓아 올린 지구라트, 즉 성탑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우루크기의 신전 계산서인 토판문서(clay tablet)에는 문자의 원형이라고도 할 그림과 기호가 적혀 있으며, 그것은 제므뎃-나스라기에 이르러 보다 더 문자에 가까워지고, 기원전 3000년이 초의 우르 고왕조기에는 현대 의학자들이 충분히 해독할 수 있는 문자가 되었다. 이 무렵에는 두 강의 하루에 위치한 수메르에 많은 도시국가가 형성되고, 곧이어 그 북쪽의 아카드에도 도시국가가 나타나 그 수는 15개 내지 20개에 달하였다. 도시의 중심은 신전이었고 도시를 둘러쌓은 성벽 밖에 농경지와 목장이 있었다. 이 도시국가는 신관을 겸한 왕에 의하여 지배되었으며, 도시의 주민은 승려, 전사, 귀족, 상인, 공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의 물과 또한 동일한 공급지로부터 운반되는 외국 산물 자에 의존하는 지리적 통일체였으나, 수메르와 아카드의 도시국가들은 서로 끊임없는 대립과 분쟁을 거듭하였다. 메소포타미아가 정치적으로 통일되는 것은 사르곤 왕(Sargon, 2350 B.C.) 때의 일이다. 사르곤 왕은 두 강 유역은 물론이요, 시리아의 엘람에까지 이르는 큰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무너졌다. 이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다시 수습한 것은 우르의 수메르왕조였으며, 사르곤 왕의 옛 영토를 다시 회복하여 제국적인 행정조직의 정비에 착수하고 종래의 지방적 관습법의 법전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약 1세기 동안(2050~1950 B.C.) 계속된 이 수메르왕조도 서쪽으로부터 침입해 온 아무르 족(Amurites)에 의하여 무너지고 이에 수메르 쪽의 메소포타미아 지배가 끝났다.

바빌론에 자리 잡은 아무르 족은 점차 주변 지역을 평정하여, 18세기 말경 함무라비 왕(Hammurabi, 1728~1686 B.C.) 때 메소포타미아는 다시 견고하고 강대한 통일왕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함무라비는 직접 행정관과 사법관을 임명하여 정무를 관장하고, 재래의 도시법을 대치할 통일된 법전을 편찬함으로써 이 새로운 바빌로니아왕국의 통일과 질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왕국도 함무라비 이후 점차로 쇠퇴하여 기원전 16세기 후반에는 지금의 이란 쪽으로부터 하시기 트족이 침입하여 약 4세기 동안 바빌로니아왕국을 지배하였다. 카 시트 지배 하의 바빌로니아는 문화적으로는 침체기였고, 정치적으로도 함무라비 시대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바로 이집트가 신왕국 시대를 맞이하여 제국주의 정책으로 시리아 방면으로 진출하고, 소아시아에서 새로 일어난 히타이트의 세력이 역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진출하는 한편, 두 강 상류 쪽에 미 탄(Mitanni)이라는 신흥국가가 출현하는 등 오리엔트 세계가 활발한 움직임과 접촉 속에 하나의 국제사회를 형성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정치와 사회구조
메소포타미아의 정치구조는 관개농업과 부역 및 공납에 의존하는 동양적인 전제국가라는 점에서는 이집트와 유사하다. 메소포타미아의 전제군주도 신적인 권위를 겸유하고 있었으나, 이집트의 파라오가 호루스신 의 화신이요, 태양신의 아들인 것과는 달리 신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신적 권위는 파라오보다 약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현 세신으로서 절대적으로 군림하고, 전 국토가 그의 소유였으나, 메소포타미아, 특히 바빌로니아에서는 시민 개개인의 재산 소유, 상속, 매매가 인정되고, 정치적 지배자는 정의를 행하는 자의 성격을 겸유하여 법에 의한 통치라는 개념이 함무라비법전 등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는 함무라비법전은 사회계급을 명확하게 셋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귀족, 승려, 전사, 관사(서기 포함) 등이 제일계급이고, 상인, 금융가, 공인, 농민 등이 평민을 구성하고, 최하층에 노예가 있었다.

문화
메소포타미아문화의 기조는 수메르문명이었고, 바빌로니아는 이를 계승 발전시켰다. 수메르, 바빌로니아 사회가 기본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메르, 바빌로니아 문명은 도시 문명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또한 다신교였다.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은 저마다 수호신을 갖고 있었고, 그러한 도시의 수호신을 넘어선 신들도 적지 않았다.

승려들에 의하여 기록된 신전 계산서의 그림과 기호는 점차 발달하여 기원전 3000년을 좀 지나서는 설형문자(cuneiform letter)가 되었다. 젖은 진흙 판에 갈대의 펜으로 쐐기모양의 문자를 기록하여 햇볕에 말리거나 구워서 보존하였으며, 이를 토판문서(clay tablet)라고 한다.

수메르에서 시작된 설형문자는 그 후 아카드, 바빌로니아 등 셈어족 계통의 민족의 문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전역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표시하는 데 사용되는 국제적인 문자가 되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있어 문자를 해독하고 서기가 된다는 것은 모든 육체적인 노동이나 군역으로부터의 해방과 위엄있는 관리의 길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서기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가 궁정이나 신전에 마련되어 단순한 글공부만 아니라, 산수를 비롯한 기본적인 학과목의 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길고 엄격하였으며, 주로 상류층의 자제가 이를 이수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문학작품은 이집트의 경우보다 많이 남아 있다. 그것은 신과 영웅에 관한 서사시로부터, 신에 대한 찬가, 도시의 파멸과 정의로운 사람의 부당한 고난을 슬퍼하는 한탄, 격언 등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한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은 영웅 길가메시(Gilgamesh)에 관한 서사시이다. 길가메시는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를 응징하기 위하여 신이 보낸 괴력의 사나이와 친구가 되어 모험을 찾아 긴 여행길에 오른다. 괴물과 괴수와 싸워 죽이는 등 많은 모험을 겪은 끝에 친구가 죽자 이를 몹시 슬퍼하고 불사의 열쇠를 찾아 헤매다가 이에 실패한다. 그에게도 죽음이 다가왔을 때 길가메시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를 조용히 받아들인다.

   제4절 동부지중해 연안과 오리엔트의 통일

 

  해상민족  페니키아  헤브라이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동부 지중해 연안의 작은 나라들의 활동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기원전 1000년이 전반의 오리엔트서의 흐름은 오리엔트 세계의 통일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 과업에 먼저 성공한 나라는 아시리아(Assyria)였다.

헴 어족계통의 아시리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지만 장기간 메소포타미아의 주된 세력 밖에서 그 영향을 받으며 미미한 존재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아시리아가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기원전 2000년이 후반 미 탄 네가 히타이트의 압력으로 쇠퇴한 결과, 미 탄이 너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한 후부터이다. 티그리스 상류에 위치한 수도 아시르를 중심으로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해, 기원전 12세기 말 경에는 북으로는 흑해,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에까지 이르렀다.

아시리아는 이러한 정복과 팽창과정에서 피정복민 전체의 강제 이주, 대학살, 약탈, 파괴 등 잔인한 군국주의의 성격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오리엔트서의 전환기의 격동에 휘말린 탓인지, 기원전 1000년이 초까지 비교적 잠잠하였던 아시리아는 재빨리 제철 기술을 배워 철제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군대와 전차를 갖고 오리엔트의 통일을 위한 정복 전쟁에 나섰다. 그리하여 기원전 8세기 말경에는 드디어 오리엔트 전체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수도를 니네베로 옮겼다. 아시리아는 니네베에 도서관을 만들어 수메르, 아카드 이래의 문헌을 수집하는 등 문화적인 면도 있으나 역대의 왕은 사자와 같은 맹수사냥을 즐기는 사나운 정복자였고 그들의 대제국도 오래 가지 모샇였다.

기원전 7세기 말 아시리아제국은 이란고원의 메디아와 바빌론의 칼데아 왕조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니네베가 파괴됨으로써 붕괴하였다. 그 후 이집트와 리디아를 포함하여 4국이 정립하는 형세를 이루었으나 주도권을 잡은 것은 카데아왕조의 신바빌로니아왕국이었다. 특히 네부카드네자르 2세 때의 바빌로니아왕국 번영은 고바빌로니아 왕국의 번영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으며, 수도 바빌론은 오리엔트에서 제일가는 국제적 대도시가 되었다. 헤브라이인의 이른바 '바빌론유수'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신바빌로니아왕국의 번영도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이란고원에 위치하여 메디아에 신중하고 있던 인도-유럽어족의 페르시아(Persia)의 키루스(Cyrus, 557~529 B.C.)는 메디아 왕위를 빼앗고, 리디아를 정복한 후 바빌론을 점령하였다. (538 B.C). 다음 캄비세스(Cambyses, 529~522 B.C.) 때 이집트를 정복하고 다리우스 1세(Darius 1 그 영토를 더욱 확장하여 오리엔트 전체를 완전히 통합하는 대제국을 확립하였다... 페르시아의 문화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그들의 종교였다. 예언자 조로아스터(Zoroaster, 기원전 6세기)가 창건하였다는 조로아스터교는 처음 지혜의 신인 이후라-마즈다를 숭배하는 지적을 하고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점차로 광명의 전신에 대한 암흑 악신의 도전과 투쟁이라는 이원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명의 선한 신인 이후라-마즈다를 따르는 자는 영원의 생명과 행복을 얻게 되고, 악신에게 가담한 자는 지옥의 불에 파멸될 것이라는 교리가 생겨나고, 유력한 승려계급이 형성되었다. 광명의 신을 받들기 때문에 배화교라고도 부르며, 그리스도교, 그리고 후에는 이슬람교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에도 전해졌다.

 

 오리엔트사회와 문화의 한계

  로마인이 '빛은 동방(오리엔트)으로부터'라고 말한 것처럼 오리엔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문자를 가진 문명단계로 발전하고, 기원전 3000년기에 짜임새있는 사회와 전제국가, 그리고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켰다...이러한 사회구조의 정체성은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이에 따라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문화의 틀도 되풀이되고 계승될 수밖에 없었고, 마술적인 사고가 또한 새로운 발전을 억제하였다.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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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오리엔트의 사회와 문화

  제2절 이집트

  역사
  나일강변의 신석기 사회가 문명단계로 발전한 것은 기원전 5000년 기로부터 4000년이기에 걸쳐서이다. 선왕조기라고도 부르는 이 시기에 나일강변의 토템 씨족의 촌락들은 도시로 성장하고, 도시를 중심으로 그리스인이 노 메스(nomes)라고 부른 지역적인 단합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노 메스가 합쳐서 상·하 왕국이 형성되고 기원전 3000년을 좀 지난 무렵, 상왕국의 메네스(Menes)왕에 의하여 통일왕국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메네스왕을 포함하여 초기왕조는 아직도 반전설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고, 이집트의 역사가 확실해지는 것은 제3왕조로부터 시작되는 고왕국 시대(2850~2200 B.C.)부터이다.

  멤피스(Memphis)를 수도로 한 고왕국 시대는 이집트의 발전기요 번영의 시기였다. 지금도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기제(Gizeh)의 거대한 피라미드들은 제4왕조기(2600~2500 B.C.)에 건설된 것으로서, 당시 파라오의 절대적인 권력과 국력의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고왕국도 말기에는 혼란 상태에 빠지고, 그것이 다시 수습되어 견고한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제11왕조기(2100~2000 B.C.)의 일이다. 새로이 수도를 테베(Thebes)로 옮긴 중왕국도 얼마 안 가서 쇠퇴하고, 마침내 소아시아로부터 침입해 온 아시아계통 힉소스(Hyksos)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80~1580 B.C) 제 17왕조기에 이집트는 힉소스를 몰아내고 신왕국을 수립하였다. 신왕국 시대(1580~1090 B.C.)의 이집트는 고왕국 시대의 국력과 번영을 되찾고 크게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힉소스가 전해준 말이 끄는 전차로 강화된 군사력을 가지고 제국주의적인 팽창정책을 썼다. 그 결과 이집트의 세력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로부터 멀리 유프라테스 상류에까지 미치게 되었으며, 소아시아로부터 남하하는 히타이트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나 신왕국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그 세력이 기울어지고 외부로부터는 이른바 해상 민족에게 시달림을 받는 등 쇠퇴하여 기원전 12세기 이후에는 리비아(Libya), 에티오피아(Ethiopia) 등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제26왕조기(663~625 B.C.)에 일시 부흥의 노력이 행하여졌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페르시아( 525 B.C.), 알렉산더대왕( 331B.C.) 그리고 로마에( 30 B.C.) 각각 정복됨으로써 이집트의 고대사의 막이 내려지게 되었다.

  정치와 사회구조
  이집트는 고왕국 시대에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성했으며, 그것은 동양적 전제주의 국가였다. 이 전제국가 지배자의 칭호는 '큰집'이라는 뜻을 가진 파라오(pharaoh)였다. 파라오는 신의 후손이요, 신적인 존재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국가요 정부였으며, 정치와 종교는 파라오에게 결합하여 있었다. 전 국토가 이론상으로는 파라오의 소유였으며, 상업이나 농업 등 모든 경제활동이 그의 통제 속에 있었다. 왕실에 납부되는 모든 생산물은 상, 하 이집트의 두 개의 창고에 수납되었으며, 일찍부터 2년마다 전국의 토지, 수확량, 가축의 수효, 왕실 창고의 재고량 등의 조사가 실시되었다.

  성스러운 절대적인 지배자인 파라오 밑에 그를 보좌하기 위한 승려와 관료들이 있었다. 관료조직은 오늘의 재상과 장, 차관에 해당하는 직책이 있고 그 밑에 각종 가공 분야별 부서가 있었다. 이 가공작업에는 주로 노비가 종사하였으며, 빵의 제조, 가마니와 새끼줄의 제조, 탈곡, 직조 등이 행하여졌다. 이러한 행정기구의 실무자로서 많은 서기가 있었는바, 그들은 문자를 독점하고 큰 자부심을 가졌으며, 또한 실제로 존경받기도 하였다.

  피라미드는 그대로 이집트의 사회계급 구성을 상징하고 있다. 파라오를 정점으로 하여 그 바로 밑에 중앙의 고위관직자와 지방 장관 등 소수의 지배적인 귀족층이 있고, 일반승려와 서기를 비롯한 하급 관리, 상인, 공인 등이 일종의 중간계급을 형성하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과 노예는 피라미드형 계급구조의 최하부에 속하였다. 노예는 그 대다수가 전쟁포로였고 피라미드 건조나, 궁전 또는 영지 내의 각종 육체노동에 혹사당하였으나, 생산노동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 일은 없고, 따라서 이집트의 사회생활이나 경제생활의 유기적인 구성요소는 아니었다. 농민은 실질적으로 토지에 결박된 예종이나 다름없고, 이집트의 관개농업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생산계층이었을 뿐 아니라, 많은 부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상인이나 공인은 스스로 농민보다 그 지위가 높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러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사실은 농민이나 다름없이 예속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계급구조는 인도의 카스트와 같이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중왕국 시대에는 중간계층이 진출하고, 신왕국 시대에는 승려계급의 세력이 증대하는 등 사회적 변동도 있었으나, 사회구조의 기본적인 틀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문화

  이집트의 농경사회나 도시는 저마다 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다신교적인 신앙 속에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낸 신은 매의 신 호루스(Horus)와 태양신 라(Ra) 또는 레(Re)였으며, 중왕국 이후 수도가 된 테베의 수호신인 아몬(Amon) 또한 널리 숭배되었다. 이집트의 생명인 나일강과 농업의 신인 오시리스(Osiris)는 사악한 동생 세트(Set)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대지와 풍요의 여신이며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Isis)는 전 국토를 헤매면서 오시리스의 사지와 몸을 찾아 그의 생명을 부활시켰다. 이 신화는 죽음과 부활, 농산물을 포함한 식물의 성장과 고사를 상징하고 있거니와, 호루스는 오시리스의 아들인 동시에 파라오는 호루스의 화신이라고 생각되었다.

  오시리스의 신화에도 보이듯이 이집트인은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은 일단 사람의 몸을 떠나지만 귀족들의 경우 그 영혼이 다시 시체로 돌아와서 죽은 후에도 생활이 계속된다고 믿었다. 바로 이러한 신앙으로 인하여 거대한 피라미드가 건조되고, 영혼이 돌아올 수 있도록 미라가 제조되고, 피라미드를 지키듯이 스핑크스가 그 옆에 세워졌다. 중왕국 시대 이후에는 너무나 사람 눈에 띄고 도굴이 심한 피라미드를 피하여 파라오의 무덤을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마련하게 되었다. 룩소르 근처에 있는 이른바 '왕가의 골짜기'도 이러한 왕실의 묘지인바, 1922년에 그곳에서 투탕카멘(Tutankhamen, 1361~1352 B.C.)의 무덤이 거의 원상에 가까운 상태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이집트의 종교사상 매우 특이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파라오가 아멘호테프 4세이다. 그는 역사상 최초의 이상주의적인 종교개혁가로서, 재래의 다신교를 폐지하고 태양신인 아톤(Aton)을 신봉하는 윤리적인 일신교를 만들어 이를 넓히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이 크나 톤이라 개명하고 수도를 테베로부터 아마르나로 옮겼으나, 그의 종교개혁은 실패하여 당대로 끝나고 말았다.

  나일강의 홍수와 이에 의존하는 관개농업의 필요와 자극으로 천문학과 측량술이 발달하고, 산수와 기하학도 발달하였다. 이집트인은 나일강이 매년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것을 관찰하고 태양력을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즉, 1년을 365일로 잡고, 이를 30일 단위로 12개월로 나누고, 남는 5일은 축제일로 정하였다. 한편 기하학의 발달은 거대하고 어려운 피라미드 건조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집트의 의술 또한 마술적인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면서도 병자에 대한 구체적인 관찰에 입각하여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신성문자(Hieroglypy)로 알려진 그림문자가 주로 사용되었으나, 이의 행서체 내지 초서체도 있었다. 이집트인은 나일강변에서 자라는 파피루스(Papyrus)로 만든 종이에 갈대의 펜과 유연으로 만든 잉크를 사용하여 기록하였다.

  이러한 파피루스에 기록된 문학작품으로서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별로 많지 않으나 이집트 문학이 시, 단편소설, 역사 등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집트의 예술은 피라미드, 스핑크스, 신전 등 거대함을 자랑하는 건조물로부터 신전의 벽화와 각종 장식, 대소의 조각, 섬세한 솜씨를 보여주는 금은보석의 세공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집트의 예술은 이미 이루어진 양식이나 틀을 전통적으로 답습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그런대로 그들의 예술적 감각이 범상치 않았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어떤 면에서는 판에 박은 듯한 이집트 예술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이 아마르나시대(ca. 1417~1358 B.C.)의 예술이다. 이는 종교개혁을 시도한 이 크나 튼 시대의 예술로서 전통적인 양식이나 틀을 깨어버린 생동감에 넘치는 자연주의 경향의 예술이며, 이 크나 톤의 왕비 네페르티티(Nefertiti)의 두상은 아마르나 예술의 대표적인 걸작의 하나이다.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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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사업의 마지막 모임이 있는 날, 여해 인문학 스터디 5회 모임에서는 중원문화재단 모니터링님, 어가선 선생님 2분이 처음 참여해주셨다. (집밖문지방3 사업모임 중 총 참여자는 25명- 모니터링 참가자 제외)

참석자(존칭 생략): 임원빈, 오희연, 김경은, 박동수, 김명란, 이영선, 권혁분, 이주화, 이상숙, 연경연, 정기화, 김인동, 표영춘,전 준, 어가선, 모니터링 참가자, 초등학생 이주영, 이하영, 어머님(19명) 

 

집밖문지방3사업 일환의 여해 인문학 스터디 5회 모임에 총 참석자는 25명이었고 그 중 충주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 6명, 

숲해설사 선생님 1명, 충주전통문화원장님 등 4명, 서도소리보존회 충북지회 회원이자 이배사(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다음카페)회원 7명, 초등학생 4명, 학부모님 3명

과연 참석을 해주실 것인지, 관심을 가져주실 것인지,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등등 마음 한편의 불안감은 안도와 기쁨과 기대와 감사로 사업이 마무리 되었다. 어느 하나 그냥 되는 것이 없는지라 시작도 번잡하지만 매번의 후기와 결과보고까지 마무리를 하고 나면 비로소 자생의 스터디가 이어질 예정이다...마치 이미 오래된 인연처럼 마음을 열고 공감하고 소통의 시작을 함께 해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마음 속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모든 모임에서 매번 새로오신 분들을 대상으로 첫 인사는 교수님 소개를 하게 되는데 조금은 남다르고 특별한 교수님의 이력을 새삼스레 짚고 넘어가 볼까 한다. 임원빈 교수님은 충주가 고향, 해군사관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학사, 석사, 박사 졸업, 동양철학(유학 전공), 해군사관학교 철학교수, 손자병법 연구 즉 유학과 병법이 이순신장군 연구의 큰 토대라고 하셨다. 역사적 사실과 같이 가면서도 다른 결이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시나 지난 강의 리뷰...영화에서 처럼 백병전은 없었다, 전국의 이순신 동상들, 관점 바꾸기,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웠다. 완벽한 승리의 큰 요인(함포), 열세한 상황에서 어떻게 우세한 상황으로 전투양상을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의 판옥선은 일본의 새끼부네보다 크기가 큰 이유는? 거북선처럼 지붕을 덮은 이유는?... 정답은?

일반적인 영웅사관에서 벗어나 탁월한 리더 이순신을 알아보자...

 

탁월한 리더십의 양축은 전문성과 도덕성이고 이 둘이 겸비되어야 한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다르지 않다.

리더가 갖추어야 할 자질 중 중요한 것은  전문성과 직무지식인데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직무지식에 정통하지 않고는 절대 좋은 리더가 되기 어렵다. 전문성에는 실력과 변화혁신역량이 있고 이순신 장군에 비추어 볼때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방대하고 세밀한 자료를 토대로 지금까지 연구가 가능한데 이순신 장군의 직무지식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여러 사례들에서 입증되듯이 우리와 꼭같은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감히 흉내낼 수 조차 없는 탁월한 실천력과 추진력이 있었다. 

 

특히 리더십의 한 축인 도덕성을 가치의식과 인격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전쟁은 없어야 하지만 역사속 불가피한 전쟁에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쟁범죄! 이순신의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었다. 수천년 동안 조선의 은혜를 입어온 일본이 갑자기 아무 이유없이 침략하고 백성을 도륙하고 도성을 침탈한 일본을 불의의 침략자로 정의하고 하늘을 대신해 철저히 응징하고자 했다. " 역천과 순천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고야 말겠다!" 

노량해전 전날 기도에 " 이원수 모조리 무찌를 수만 있다면 내 한몸 이제 여기서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현대에서도 '역천자는 망하고 순천자는 흥한다'와 맞는 유학의 개념이 이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칠천량 해전 이후 명나라에서 대규모 수군 파병 (400여척, 2만여명 /당시 조선수군 60여척, 7천여명/ 일본 300여척)  했고 일본의 소서행장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으로 철군하려고 뇌물로 명나라 군에 부탁하고 들어주려 할 때 이순신 장군은 

불의의 집단을 단 한 척도 돌려보내지 않고 철저히 응징하려 했었다. 따라서 노량해전은 불의의 집단에 대한 철저한 응징으로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했던 이순신 장군의 가치의식, 역사의식을 반영한 위대한 해전으로 평가하셨다. 

 

이순신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기라성 같은 전문성 지닌 지휘관, 참모, 의병, 승병, 백성들이 모여 들었다. 리더 원균 주변에는 사람들이 흩어졌다. 왜 이런 정반대의 현상이 생겼을까?  자신의 이익을 넘어 진정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이순신 장군의  고결한 인격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인격 감화형 리더십은 리더십의 극치, 최고봉이다. 큰 위기에 닥쳐 민관군의 전투역량을 통합시켰다. 인격이 경쟁력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1. 직무지식에 정통한 실력있는 리더가 되라

2.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혁신역량을 길러라

3. 정의가 승리하는 사회/ 역사를 만들어라

4. 나를 넘어 국가공동체를 앞세우는 고결한 인격을 갖춰라.

 

* 이순신의 인생관 -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에 쓰이게 되면 죽기로 일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권세 있는 곳에 아첨하여 한 때의 부귀영화를 훔치는 것 같은 것은 내가 제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이항복의 충민사기)

 

* 병조정랑 서익과의 일화 - 훈련원 봉사는 훈련원의 인사담당 실무자, 상관이던 서익이 자신의 친지를 훈련원 참군(종7품)으로 승진시키려 했음. " 아래 있는 자를 건너 뛰어 올리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승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공평한 일이 아니며, 이렇게 하려면 법규를 고쳐야 하는데 이런 일로 법규를 고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병조판서 김귀영과의 일화 - 병조판서 김귀영이 강직하고 능력 있는 이순신을 눈 여겨 보고 자신의 서녀를 이순신에게 출가시키려고 중매인을 보냄. " 벼슬 길에 막 나온 제가 어찌 권세있는 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습니까?"

 

* 전라 좌수사 성박과의 일화 -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정3품) 성박이 발포로 사람을 보내어 객사 뜰 앞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 거문고를 만들려고 함. " 이것은 관청의 물건이오, 또 여러 해 길러온 것을 하루 아침에 베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라고 하며 베러 온 자를 돌려 보내니, 수사가 크게 성을 내었으나 베어가지는 못하였다. 

 

* 정승 류전과의 일화 - 정승 류전이 이순신에게 좋은 화살통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활을 쏘게 된 기회에 화살통을 달라고 하자, " 화살통을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남들이 대감이 저에게 받은 것을 어떻다 할 것이며, 소인이 바치는 것을 어떻다 하오리까? 화살통 하나로 대감과 소인이 함께 더러운 지탄을 받게 되는 것이 미안할 따름 입니다." 하니 정승도 "그대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사업 마지막 모임 자축 파뤼~
표영춘 회장님께서 깜짝 선물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청향만당"
주인장에게도 멋진 선물을 하사해주셨답니다. " 장락무극"
'난중일기'에 이어 충주 충무공 이수일 장군 자료집(이석희선생님 후원) 기념촬영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사히 좋은 공부시간 되었습니다! 또 만나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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