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페르시아전쟁(Greco-Persian War, BC 492~BC479)

-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을 격퇴시킨 전쟁. 경제적 동인(지중해 해상권과 무역 이익)

- 헤로도토스(그리스 역사가):“페르시아는 왕을 위해 싸우고 그리스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싸운다”. 제국/독재와 민주주의의 전쟁.

 

페르시아전쟁의 배경

- 크레타섬(미노스문명) + 트로이문명 + 그리스 본토(미케네문명) + + 키클라데스 제도(델로스섬 주변 키클라데스 문명)

- /산악 지형에 산재된 독립국가들(=고구려/백제/신라)

- 중장보병 = 중산층 남성 = 선거/참정권 = 제한적 민주주의

- 아테네의 도편추방제. 우수한 정치가(=독재자/참주의 싹)를) 선별하여 국외로 10년 추방(현대민주주의와 상이)

- 아테네: 산악>평지, 무역 발달, 해군 주도, /사치=다수의 유적지. 민주주의 활발. 웅변/토론/설득(=수다/궤변/음모론)

- 스파르타: 평지>산악, 자급자족 농업사회, 육군 주도. 검소/절약=유적 X. 과묵/군사적 문화.

 

페르시아제국

협의=아케메네스 왕조(BC550~BC330)

광의=이란 중심의 여러 제국 통칭(~1979년 이슬람혁명)

 

- 거대한 제국의 땅. 다양한 민족의 통합/갈등.

- 왕의 길(Royal Road): 2,700km. 최전성기 다리우스 1세 건설. 제국 통치(행정/교통/통신/군사/조세의 인프라). 역 설치(7~15일 내 정보 전달)

 

페르시아전쟁의 무기 

 

- 그리스 군

   청동기/철기 공존.

   기병 X(말X( 사육할 초원 X),X), 궁병X(활 = 비겁) vs. 페르시아(//궁병)

   보병: 사리사(Sarrissa, 2.5m ), 단검(파라조니움, 근접병기), 원형 방패(호플론 Hoplon, 9kg).

   흉갑(토락스, 18kg) 청동투구, 청동 정강이받이. 중장갑 총 33kg

   창: 갑옷을 뚫는 힘, 전진공격용. 비용 저렴(나무+철제창끝), 수리 간단. 긴 칼을 제조할 능력 부족. 창>칼.

   팔랑크스 전법: 중장보병(=호플리테스)의 사각형 방진. 8열 밀집대형. 앞열(3~4) 뒤에는 창을 들어.

   오른손()+왼손(방패)+왼팔 팔꿈치(옆 병사지지/보호).

    팔랑크스 전법의 취약점: 공성전, 측면/후방 공격, 산악/숲 지대 취약.

 

- 페르시아 군

  임모탈(최정예 보병)+궁병+방패병(궁병 보호)+창병

  왜 갑옷 중장병이 없었을까?: 사막/초원/더운 나라. 기동전/체력소모.

 

 

페르시아 전쟁의 전개

 

페르시아 1차 공격(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발발: 아테네 지원받은 이오니아 반란군이 페르시아 신전을 불태워. 다리우스 1세의 그리스 공격 결정.

그리스 동맹군(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vs. 페르시아제국(+마케도니아)

에게해 동쪽 해안을 따라 이동. 마케도니아 앞에서 풍랑!/함락

 

페르시아 2차 공격(그리스>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 황제의 승리할 결심

아테네 지원 요청에 스파르타 거부(축제기간, 전쟁x). 군사적 약세(1만 명(1 보병이 마라톤 평원에 집결/준비)

페르시아 군(2.5만(마라톤 상륙)+1(아테네 진격). 팔랑크스전법의 약점인 측면/후방을 기병으로 공격 계획

 

밀집대형 변화: 세로(84). 가로 대형이 2. 가로(2.5천명)X세로(4열)=1만명.

4?: 효율적 배치. 앞줄 병사 앞으로 사리사 3개 돌출. 페르시아 군 갑옷 X).X).

측방 군사 보강. 2개 사이를 채운 가로 대형. 페르샤 기병의 측면 공격 어려워

팔랑크스의 정면 진격. 페르샤 궁병/화살은 방패로 막아. 페군(나무/페군(나무/가죽 방패 + 직물 갑옷) 패배

마라톤: 아테네 복귀(완전 군장, 30km 밖 아테네까지 3시간 주파).

페르샤 해군은 상륙 포기/철수

마라톤 에피소드

 

페르시아 3차 공격(그리스> 페르시아)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 황제(#1)의 분노. 제국 내 모든 민족 징집. 헬레스폰토해협(=다르다넬스해협)에 부교 건설

영화 <300>(Youtube)테르모필레 전투(Battle of Thermopylae)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과 정예 300명 참전 + 그리스 연합군(1,500)

살아서 돌아오면 불명예 문화. 테르모필레 협곡 지형 활용. 1명의 배신(협곡 우회로 제공). 전멸. 그리스 탐방(Youtube #4)

그리스인의 구원: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내 신탁소. 애매한 신의 계시.

나무 성벽만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와 그대들의 자식들이 도와주게 되리라. 신성한 살라미스섬이여, 데메테르가 씨를 뿌리거나 수확할 때, 너는 여인의 자식들을 죽이게 되리라.”

지상전 지지 소수파(성벽!) vs. 해전 지지 다수파(살라미스!) 분열

페군은 아크로폴리스에 성채 건설한 보병을 살육, 아테네 점령/패닉.

스파르타 주장: “그리스 동맹군이 아테네(에티카반도)(애티카반도) 포기하고 내 구역(펠로폰네소스 반도)으로) 오면 우리가 코린트(Corinth)에서 지상전으로 페르샤군을 막겠다.”→ 그리스군(OK!)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1): 별명(그리스의 뱀). 권력 이동(상층중하층) 예상한 통찰력. 항구의 중 하층민과 친해. 아테네 남부 에티카(Attica)(Attica) 지역에 발견된 은광 수익으로 해군 증강 설득. 해군 성장 = 하층민(4만명)하층민(4만 명)이 선거/참정권 시민 등극 = 무역/식민도시 개척

비열한 영웅: 아테네 포기하면 우린 떠나겠다! 그리스 군 전략을 페르샤에 흘려. 페르샤(도망가는 그리스 군을 코린토스 해협에서 저지하려고 살라미스에 집결) 그리스의 뱀에 따라 싸울 수밖에..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그리스(370) vs. 페르샤(900)

갤리선(출처) 트라이림(3줄의 노 배열). 충각(충각(뱃머리 충돌). 바람() + 노잡이(=가난한 시민). 170개 노를 3단으로 배치.

 

테미스토클레스 연설: “너희들은 곧 최고의 인간성과 최상의 상태, 혹은 최악의 인간성과 최악의 사태, 둘 중 하나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부디 전자를 택해라.”

크레스크세스 연설: “짐이 왔으니 마라톤과 같은 망신은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겼다.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면 짐은 관대하게 저들을 용서하리라.”

그리스 탐방

 

그리스 해군의 도주(유인작전) 페르샤 해군 총공세 좁은 해협/파도/바람에 엉켜 구군의 충각 공격 페군 노를 파괴 후미 페군 꾸역꾸역 진입/아비규환 → 그군(40척)/페군(200척) 침몰 패군 철수

테미스토클래스: 페군 내통 이유로 도편추방/사형선고, 페르시아(소아시아 Asia Minor)로 망명, 지방총독 재임 중 자살.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 > 페르시아 제국

아테네(& 델로스동맹 Delian League) > 스파르타(& 펠로폰네소스 동맹)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서막

 

728x90

제3장 그리스 세계와 그 문화 

  

   제3절 페르시아전쟁과 아테네의 민주정치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 히피아스의 추방(510 B.C.)으로 참주정치 쓰러지자 이를 타도하는 데 협력했던 귀족과 평민사이 대립, 분쟁 발생

-  이 분쟁에서 추방된 귀족 클레이스테네스, 아테네로 귀환, 평민의 지지 획득, 스파르타 지원, 반대파 귀족 분쇄, 민주개혁

-  개혁 목표 혈연, 지연적 유대, 경제적 이해관계 배제, 아테네 전 시민 평등한 참정권 부여, 새로운 행정 구획 마련

-  촌락 단위 기본 행정구 마련, 노예, 재유 외인 제외한 모든 구민 등록, 등록 구민 핏줄, 재산, 직업 무관 동한 참정권 부여

- 솔론 때의 4백인회의 대신 5백 인 회의 새로운 행정기관, 실질적 통치기관으로 아테네 재정, 전쟁, 외교 등 관장

  50명씩 10개의 워원회, 각 위원회는 1년의 10분의 1, 즉 36일간 원형청사에 집무, 위원장은 매일 교대

- 클레이스테네스의 국제는 기원전 502년 발효 시작, 아테네 결정적으로 민주정치로 발전

 도편추방(Ostracism)는 클레이스테네스의 정신 계승, 이후 제정된 것, 참주 될 위험인물, 6,000개 이상, 10년간 추방

- 아테네 시민 사이 다른 폴리스에서 볼 수 없는 강한 자부심, 애국심

 

   페르시아전쟁 

- 아테네 민주정치 기반 구축하지 얼마 안 가서, 아테네뿐만 아니라 그리스 전체 위협

- 오리엔트 통일한 페르시아의 서방으로 진출, 일찍부터 소아시아의 해안지대 그리스식민 시들 경제, 문화 본토보다 발달 선도적 지위에 있었으나 약한 정치적 유대, 당파, 계층 대립의 내분이 계속, 소아시아 강대국 리디아 격파(548 B.C) 후 그리스 본토 겨냥

- 이오니아식민시들의 반란(499~494 B.C) 진압 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 대군을 헬레스폰트와 트라키아 방면 파견, 폭풍 함대 손상, 철수

- 2년 후 기원전 490년 아테네 북방 약 25마일 지점, 마라톤에 상륙, 아테네, 그리스 전체 위기 였으나 아테네와 적대 폴리스 기회 노리고, 지원 약속 스파르타 군대 파견 하지 않음, 아테네 홀로 동방의 강적과 대결, 승산 없었으나 

밀티아데스 지휘, 애국심 아테네 시민의 중장보병 밀집대, 페르시아 격퇴, 승리 소식을 아테네로, 마라톤경주의 유래.

- 중장보병 밀집대전술 기원전 7세기에 이미 출현  기원전 6세기 후반 아테네 무겁고 값비싼 청동 흉갑 대신 마, 가죽, 금속의 장점을 살린 가볍고 값싼 복합형 흉갑 발명, 작은 모자 비슷한 헬멧 사용, 농촌, 도시 중산하층도 자담 무장 가능, 

밀집대의 견고성에 기민한 기동성 첨가, 마라톤 승리 '달리는 중장보병'이 큰 역할. 

- 페르시아 국내사정으로 재침까지 10년 기간, 휴전기에 준비, 아테네 대함대 건조, 폴리스들 아테네 중심 단결

-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 계승자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스파르타 용사 들 테르모필레 전투, 레오니다스왕 이하 전원 전사

중부 그리스 폴리스들 항복, 페르시아군 앗티카 평야로, 지상 대적 불가로 테미스토클래스는 아테네 시민을 살라미스로 철수, 해전에서 결전 시도, 교묘한 유도작전으로 살라미스해전 아테네 함대 대승, 페르시아 침공 단념, 귀국. 

- 다음 해(479 B.C) 페르시아 아테네와 스파르타 이간, 재차 앗티카 점령, 아테네시 완전 파괴. 아테네 비롯 10만여의 그리스연합군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 격파, 아테네 주축 그리스 함대 에게해 사모스섬 진공 페르시아함대 대파

- 페르시아전쟁 그리스의 승리, 동방 전제주의 대한 폴리스의 시민적 자유의 승리 의미, 기원전 5세기의 찬란 고전기문화를 앞둔  유럽사의 결정적 중요성이 있다. 

 

  아테네제국

-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를 맹주로 한 해상동맹 델로스(Delos)동맹 탄생. 동맹 시 제공 자금 관리 금고 델로스섬에 두고 아테네 관리, 위임, 아테네제국 변모 가능성 강, 페르시아 위협 약화, 

- 기원전 5세기 중엽 아테네 대도시 팽창, 에게해 해상무역과 그리스세계의 상공업의 중심지

- 동맹 시에 지배 강화, 강제적 공납금으로 변질, 델로스 섬의 공동금고 아테네로 이동(454B.C) , 동맹시 대부분 종속적 지위로 격하, 아테네 요구하는 공납금 납부, 재판도 아테네의 시민재판의 결정에 따르게 됨

- 동맹 시의 공납금, 해상무역에서의 아테네 패권, 기원전 5세기 중엽 이후 아테네의 경제적 번영 가장 중요한 기반

 

 아테네의 민주정치

- 살라미스 해전 승리, 수병 속한 최하층 세력 강화, 대함대 건조, 해상무역 발전, 상공인 경제적 지위, 발언권 증대

클레이스테네스의 기초 마련 민주정치 페르시아 전쟁 후 한층 발전, 페리클레스시대(457~429 B.C)에 민주정치 완성 

- 성년 남자 전원 참석, 발언 민회 권한 대폭 강화, 입법 관여, 5백 인 회의 권한 축소, 10명 장군 권한 확대, 최고정무위원회 기능 수행, 오늘날의 내각에 해당

- 국고에 의한 수당제 확대, 1년 임기제, 시민으로 원하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게, 민회의 권한 강화는 시민 누구나 직접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 의미

- 페리클레스의 펠로폰네소스전쟁 초기 전사 시민에 대한 추도연설 : 우리의 정체는 이웃 나라의 것을 흉내 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타국을 모방하는 경우보다 그들이 우리를 모범으로 삼는 경우가 더욱 많다. 우리의 국제를 민주정치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권력이 소수의 수중에 있지 않고 전시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 개인적인 분쟁을 해결하는 경우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개인을 타자보다 우선하여 공직에 임명할 때 그것은 그가 어느 특정한 계층에 속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실질적인 재능 때문이다. 국가에 대하여 유익한 봉사를 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빈곤 때문에 정치적으로 햇빛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다. 우리의 정치생활도 그러하다. 우리는 사생활에 있어 자유롭고 관대하지만 공사에 있어서는 법을 준수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지만 사치나 화려함에 흐르지 않으며, 지적인 사물을 사랑하지만 유약해지는 일이 없다. 우리는 부를 자랑으로 생각하지 않고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빈곤을 수치로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오직 가난을 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우리에게 있어 각 개인은 그의 사사로운 일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국사에도 관심을 가진다...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우리의 폴리스야말로 전그리스인이 배워야 할 배움터이다.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62-69.

728x90

제3장 그리스 세계와 그 문화 

 

  제2절 폴리스의 성립과 발전 

 

자연환경 

-  그리스 기후와 지세는 지중해형 풍토. 그리스 본토는 산이 많고 평야 적고 산줄기가 종횡으로 달려 산에 둘러싸인 골짜기나 평지는 하나의 자연적인 지리적 단위를 이루고 있다. 폴리스라는 소단위의 국가를 성립시킨 주요 원인. 

- 해안선의 굴곡 심하여 톱니 연상, 자연 바다로 진출, 본토에서 소아시아로의 항해 용이.

- 기후 건조, 더운 여름과 약간 냉기 도는 겨울의 두 계절, 겨울에 약간의 비, 여름에 비가 오지 않는다. 물 부족이 고민거리.

- 보리, 밀 곡물 재배 곤란, 건조하고 메마른 땅 적합한 포도, 올리브 재배 유리, 중요 농산품, 필수품, 수출품은 포도주, 올리브유

- 유리하지 않은 그리스 자연환경으로 일찍 해외 진출, 해외무역 종사

 

폴리스(Polis)의 성립

- 도리아족 남하로 미케네 문명 파괴, 그리스의 '암흑시대(1100~800 B.C.)' , 이 시기 생활, 사회 문서 없고

끝날 무렵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유일하게 약간의 정보 제공하기 때문에 이 시기를 호메로스시대(Homeric Age)라고도 한다. 

- 이오니아(Ionia) : 도리아족이  펠로폰네소스반도, 크레타 정착했을 때 이를 피해 이주 무리 일부 아테네 위치한 앗티카 지방에 모여들고, 일부는 소아시아 방면 이동, 이주민들 정착한 소아시아 해안지대, 인접한 섬들을 이오니아라 부름. 

미케네문명의 유산을 지닌 채 이주, 이오니아 지방이 오리엔트문화 접촉 용이한 곳으로 폴리스도 소아시아의 서해안지역에 먼저 성립하였다. 

- 도리아족 남하에 따른 혼란과 타국가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여러 촌락이 지리적, 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에 모여들어 도시가 형성되고, 그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촌락들이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인 폴리스를 형성했다. 

- 대체로 해안으로부터 멀지 않은 평지에 위치, 도시는 폴리스의 정치, 군사 및 종교의 중심.

- 아크로폴리스(acropolis) :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에 도시 위 수호신을 모신 신전이 건립된 작은 성체와도 같은 小丘.

  유사시 시민들 피난처, 침입자에 대한 항거의 최후거점

- 아고라(agora) : 아크로폴리스에 인접한 광장, 시장인 동시 정치를 포함한 모든 공공생활의 장소, 시민들 사교의 장.

- 종교적, 경제적 유대로 결합하고 법에 의해 규제되는 완전한 독립성과 주권을 가진 시민 공동체

- 고전기 본토에 200개 이상, 식민시까지 1,000개 이상 

- 그리스인들든 스스로 헬레네스(Hellenes)라 부르고, 헬레네스가 사는 곳을 본토와 식민시를 합쳐 헬라스(Hellas)라 했다.

- 폴리스들은 델피(Delphi)의 아폴로(Apollo)신전을 중심으로 인보동맹, 정치, 군사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부, 올림피아(Olympia)의 제우스신전에서 기원전 776년 부터 4년마다 모든 폴리스가 참가하는 체전을 열고 그 기간 동안 폴리스 상호 간 전쟁을 금지

- 동족의식, 부분적 결합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전체 통일 국가 형성하지 못하고 결국 폴리스라는 작은 도시국가 분립상태를 벗어나지 못함. 

 

식민활동과 사회의 변화 

- 폴리스 성립한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시대 왕들이  존속한 경우라도 실권없는 명목상의 존재, 정치권력은 귀족에게  

  따라서 폴리스 성립을 귀족정치와 연관시키려는 견해도 있다. 

- 귀족 신, 영웅, 왕의 후예임을 자랑하는 가장 유력한 씨족 출신, 기사로서 폴리스방위의 가장 중요한 존재

- 당시 미케네시대 전투 주역 담당하던 전차는 사라지고, 중무장 기사들의 1대1 싸움으로 전투양식 변화

 말 사육 많은 비용, 기사의 자부담, 감당 가능 귀족만 출전

- 가문과 혈통 자랑, 폴리스 방위 전사단 구성한 귀족 정권 장악, 주요관직 독점

- 평민 대다수는 클레로스, 분배지를 소유한 중소 농민(약간의 수공업자, 상인 포함)

- 기원전 8세기 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의 <노동과 세월> (Works and Days) - 농민 생활 생생 전달 귀한 자료

  당시 농민은 2,3명 노예 소유, 농번기 일꾼 고용해 농사 종사하는 자영농민

- 폴리스에서의 귀족 지배에 동요- 식민운동, 폴리스의 사회경제적 변화

- 기원전 8세기 중엽~ 2세기 해외진출, 식민운동 활발 - 북동쪽으로 다나넬스와 보스포러스 해협, 흑해연안, 지중해연안에서는 멀리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남부, 에스파냐 해안까지 진출, 

가장 대표적 식민시- 프랑스의 맛실리아(지금의 마르세유),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이탈리아의 네아폴리스 등을 포함한 마그나 그래키아, 보스포러스 해협의 비잔티움(로마시대 콘스탄티노플, 현 이스탄불)

- 흑해 연안, 나일강 입구, 에스파냐에 무역거점 건설

- 해상무역 왕성, 본토 내의 상공업 발전, 아테네-직물, 도자기, 금속세공품이 해외무역 주된 공산품

아테네산 독특 고급도자기는 멀리 메소포타미아, 갈리아, 에스파냐에까지 운반, 소규모의 가내공업으로 수행

- 기원전 7세기 소아시아의 리디아로부터 화폐 전해지고 상공업 발달 더욱 촉진, 본토 주된 도시국가들이 저마다 화폐 주조

- 아테네 라우리옹 은광, 국가소유, 개인기업가에 임대, 수천 명 노예 사역, 채굴방법, 제련 기술 매우 우수 

라우리옹 은광에서의 국가수익, 기업가의 소득은 아테네 군사력유지, 경제적 발전, 문화적 풍요에 크게 공헌.

- 해상무역과 교환경제 발달함 시장을 위한 대규모 과수재배, 대규모 경영의 발달, 소농에게 경제적 압박, 소작농, 농업노동자, 노예 전락자 다수, 도시의 평민들 귀족의 정치권력 독점에 불만 귀족정치에 도전

- 평민세력의 대두, 기원전 8세기말, 7세기 전반 중장보명의 밀집대가 종전의 귀족기사들 대신 전투의 중심

 청동제 헬멧, 흉갑, 정강이받이, 원형방패, 장검, 단검, 4열 이상의 두껍고 긴 밀집대를 이루어 전투

- 중무장의 비용 각자의 부담, 유산시민에 한정, 귀족만이 전투 주역 시대는 지나고 도시, 농촌 중산층 이상 유산시민이 국방 주력, 이런 전술 변화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평민의 정치에 대한 발언권 증대.

 

귀족정치의 동요와 참주정치

- 아테네 귀족정치의 중심- 집정관인 아르콘(archon), 아레오파구스(areopagus) 회의.

  아르콘 군사, 종교, 민사의 3명에서 후에 9명 증가, 임기는 종신에서 1년, 임기 후 자동 아레오파구스회의 의원. 

  부유한 명문출신 귀족들로 구성, 귀족지배의 가장 핵심적 기관. 

  일반시민으로 구성되는 민회, 아르콘도 여기서 선출되었으나 실질 권한 없었음.

- 기원전 594년 아르콘으로 선출된 솔론(Solon) 아테네 당면 위기 극복 위한 개혁 단행, 부채 말소, 부채로 노예 된 자유민 해방, 부채로 인한 인신의 예속화 금지, 상공업 장려, 최하층에 민회 참석 권리, 새로 설치한 시민법정에 계층 구별 없이 추첨으로 참석, 각 부족의 100명씩 골라 4 백인회를 만들어 민회에 제출할 안건 마련. 

- 솔론의 개혁 귀족, 평민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고 귀족 평민 사이 대립, 분쟁 재발, 내부 문제를 안은 채 인근 메가라와 싸워 살라미스를 획득- 최초의 대외전쟁, 최하층을 포함 시민 전체 참여에 의미. 

- 기원전 561년 이 전쟁의 군사지도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빈농층포함 평민 지지 바탕으로 정권 장악, 참주(tyrant)가 됨.

귀족 추방, 토지를 빈농에 분배, 상공업 장려, 은광 개발, 시민 세금부담 감소, 귀족세력 크게 약화. 

트라키아 방면으로 진출, 흑해로부터의 식량공급로에 해당하는 섬들을 확보. 

- 참주정치: 사회경제적 변화와 전술의 변화로 귀족지배가 동요, 귀족과 평민의 대립과 분쟁이 격화 상황 이용, 비합법적으로 정권 장악 독재적으로 정치를 행한 것을 말하며, 결국 귀족정치로부터 민주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정치현상.

 

스파르타

- 도리아족인 스파르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남하, 기름진 라코니아에 정착할 때

  1. 페리오이코이(변두리사람 이라는 뜻) : 지배를 허용하고 종속적 지위 감수한 원주민은 자유신분이지만 시민권 없음

      도시, 주변 촌락 거주, 상공업 종사(스파르타시민에게 금지)

  2. 헤일로타이:  처음부터 예속적 신분, 완강 저항한 원주민은 노예신분, 할당한 분배지에 거주,

      스파르타시민에 비해 훨씬 많은 절대다수, 반란의 위험, 감시의 대상.  

- 두 차례 메세니아 전쟁(725~705 B.C)(640~620 B.C.) 영토확장을 위한 정복전쟁, 스파르타의 가혹한 지배에 반란

 전쟁 후 메세니아 주민 대부분을 헤일로타이로 만들고 토지를 스파르타 시민에 분배

- 실권 없는 두 사람의 왕과 장로회( 두 왕 포함 30명의 유력한 가문 출신 구성)가 국정의 중요안건 마련, 민회의 승인 절차

국정운영의 실권은 민회가 선출하는 임기 1년의 5명의 에포르(ephor)=집정관, 원 임무는 왕을 포함한 여러 관직자의 행동 감시, 스파르타 특유의 생활양식 준수 여부 감시하는 감사관의 기능도 겸유. 

- 왕정과 귀족정치의 유제를 내포한 민주정치, 전형적인 중장보명 민주정

제2차 메세니아전쟁 전 중장보병의 밀집대 전술 도입, 성년남자시민 전원이 분배 지를 가진 동등자로서 준장보병의 의무

-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스파르타시민은 주민전체의 5~10% , 교육, 전시체제 조직의 스파르타 독특 생활양식 유래

- 탄생 후 심사 거쳐 허약 버림받고 건장한 아이만 성장, 7세부터 집단훈련(신체단련, 군사훈련), 여아도 엄격 훈련,

20세부터 성인 ~30세까지 병영생활, 이후 시민전사단 소속 특수 집단생활, 저녁마다 집단별 공동식사 참여. 

시민 생산업 종사 금지, 외국 무역 억제, 자급자족 원칙, 외국인 왕래 감시, 폐쇄적 쇄국주의 

- 강력한 군대의 힘으로 펠로폰네소스반도 대부분의 폴리스를 망라한 펠로폰네소스동맹 결성( 560 B.C) 패자 군림했으나

  그리스문화에는 직접적으로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았다.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51-61.

728x90

18,9세기 개방형 경제사회로 서구, 신분제 급속 소멸

  농촌공동체 존속 강한 제3세계국들 여전히 신분제가 사회구조의 특징- 인도 카스트제도

조선왕조 농업경제 기반 사회, 농민 중심 사회, 다양 인신적 구속, 신분차별

조선왕조 신분제는 중국 수,당왕조 양천제/ 일본 양천제와 역사 경로 다름

  통일신라, 고려, 고대 중국, 일본과 강한 동질성과 연속성을 보이는 동시에 뚜렷한 차별성이 있다.

 

 

임진왜란 직후의 경상도 함양사회 : 조선 중기의 한 단면

 

귀향과 처벌

정유재란 극심 피해 지역, 경남 우도 함양 정경운 가족

159788일 정유재란 발발 피란(17개월간),

1599(선조37) 노량해전(1598) 전쟁종료 100여일 만 귀가, 움막 급조 거처마련

16038월 초가삼간 장만, 다리 뻗고 잘 수 있으나, 북풍한설 여전

16063월 기와집 장만, 귀향 7년만

농사 어려움-, 종자난, 農牛 부족, 일손부족(노비 도망)으로 농기 놓침

1602년 노비 추쇄 작업 성과로 외방노비들 추적, 솔하 노비로 데려옴

1604년 전라도 부안 일대 노비 16명 소재 파악, 신공 파악 서약 받아냄

이로써 노동력 부족으로 파종시기 늦고, 수확부실의 악순환이 해결

전쟁 종료 8~9, 1606~1607년 차츰 정상 회복, 안정상퇴 복귀

귀향 양반 주축 향회 개최- 왜군 부역, 만행자 처벌 진행, 1600년 활기

전쟁 이전 양반 지배 사회 복원, 향리 이하 피지배층 예속 강화

국가 복구 정책 양반 유리 작용 (양반 자발적 참여 초점)

 

복구와 분열

향소, 향교, 서원 등 공공장소 재건 사업 시행

남계서원(정여창 배향 서원) 중건 과정 양반들 분열

중립-하동 정씨(정여창 후손), 풍주 노씨(노진 후손) VS 진주 강씨(강익 후손)

분쟁-추향 대상인 노진과 강익의 위차 설정( 스승 노진-구파, 제자 강익-신파)

경남 우도 정통 학통: (구파: 정여창-노진/ 신파: 김굉필, 정여창- 조식- 정인홍)

신파의 입장 정인홍의 전폭지지, 정인홍의 학문적, 정치적 위상과 관련 문제

신파의 승리 - 구파는 신계서원 따로 세워 노진 배향.

이전 권위 부정하는 새로운 정치세력 등장 역사적 사실 반영

양반층 임진왜란 이후 국가 전쟁 극복 주도세력으로 공식인정

1601(선조34) 경상도 관찰사 윤승훈의 보고서 - 지역사회 분위기 날로 험악,

관찰사 조차 양반들에 적절 재재 불가능하다고 비관적 전망을 보고함.

지역사회 에너지 집약 결과 광해군(1608~1623)대 지역적으로는 경남 우도, 학문적으로는 조식, 정인홍을 공통분모로 하는 북인정권 탄생이 가능.

 

양반 지배구조의 확립

임란이후 양반층 국가 충군 정책 공공연 거부, 저항

1599(선조32) 기해군적(己亥軍籍)이후 양반 자제 2,600명 국가의 신량 확보 계획 저지

1610(광해군2), 1626(인조4) 각기 실시된 호패법 무산

1627년 사족 충군 정책 공식 폐기- 양반 국역의무 면제 공인

양반층 제외 비양반층 모두 상민으로 간주 - 1606병오호적

 -양반 부녀호칭, 도서 사용/ 상민 부녀조이(소이召吏)’, 손도장만 찍음

병오호적항의자 전원 구속, 호패법 실시과정에 차별 지속.

-양반출신 관직자 모두 각패角牌 착용/ 잡류층 이하(관직이 높아도) 목패木牌 착용

모든 부분에서 인물 평가 기준은 신분, 양반 지배구조 시작.

 

1413(태종13) 호패사목작성, 호패법 시행(1416년 폐지)

1624(인조 2) 이괄의 난 발생

1626(인조 4) 호패법 실시(1627년 폐지)

 

 

국가적 평등을 지향한 사회 : 조선 초기

 

국가의 작동 원리

15세기초 국가운영 핵심장치 제민齊民정책 국역체제(운영원리) 양천제

조용조租庸調(토지,요역,토산물) 3세 담당자- 호적에 인민 편제, 국가 운영 참여 가능 기회, 권리 제공,

  국가 정책 양인층에 초점

전체 인구 30%이상 천인층 양인층에 예속, 매매, 증여, 상속=물건

 

개인의 능력에 기초한 개방형 사회

모든 양인 교육, 과거 응시, 관직, 군역 복무 기회 제공-양인 기회균등 보장.

국가 지배신분층 존재 용납하지 않음 - 고위 관료 지위 세습 불가, 특혜 불가

  1553(명종8) 이황 아들 이준이 충군 될까 전전긍긍, 당시 시대 모습 반영

지배층=사족(士族), 조선 초기 혈통 지위 세습신분의미 용어 미발달

  고려 후기 이래 현관(縣官)출신자, 3대에 이르는 후손들 뜻하는 용어

당시양반은 모든 관직자 지칭, 개인 능력 여하에 따라 언제든 획득 가능한 계층을 의미

 

폐쇄형 사회로의 이동

15세기 초 양천제 강화에도 지배 엘리트 귀천의식 강력 존재, 차별의식 여전

정직 출신 관직자,가족 자신은 사족, 그렇지 않으면 상인(常人)이라 부름

양천제는 조선왕조 시작 야심차게 추진 국가 운영체제였으나 국가와 직접 접촉하지 않는 훨씬 넓고 깊은 사회적, 관습적 영역이 존재했으며 그 영역에서 양반, 상인 관계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사족층의 성장

연산군대(1494~1506) 국가 운영체제 근본 문제 발생, 연산군의 폭정, 조용조 3세의 세액 증대, 징수 방식 변화 초래-하층 양인 납세 부담 증대, 경제기반 흔들

하층 양인 몰락, 양천제 동요, 대규모 거주지 이탈, 노비로 신분 전환.

몰락 하층 양인의 경제력 흡수한 상층 양인은 중소지주, 노비 소유주로 전환,

새로운 계층 형성, 사회적 위상에 따른 국가정책 반대, 지위 상응 대우 요구

1525(중종20) 전가사변(全家徙邊)정책 시행, 사족을 재규정.

죄인을 그 가족과 함께 변방(평안,함경)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

사족은 전가사변형이나 여타 체형의 적용에서 제외한다‘-일정 특혜층 공인 시작.

잡류층의 문,무반 정직 참여 배제-마지막역승직진출 폐지.

모든 국역 담당자 관직 균등 개방은 부당하다‘- 사회구조 사족층 위주로 재편, 경색

 

제약과 한계

사족의 사회적 지위 급성장 사실이나 여전히 국가 공권력에 규정받는 존재

사족과 토호(土豪)의 경계 불분명, 언제든 제재, 처벌 대상, 군역의 충군 대상

임란 전쟁 주도권 : 수령(관군 차출) VS 사족(의병활동으로 지역 사수)

곽재우(전국 최초 의병 봉기) 반역 혐의로 체포, 형벌, 의병을 해산 시킴

사족층: 의병 주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

양반층: 전후 복구사업 주도, 격상된 위상 과시, 국가로부터 사회적지위 인정

17세기 이후 새 사회구조 양반 지배구조의 출발

 

 

신분 변화의 이중주 : 조선 후기

 

‘17세기 위기와 부세 총액제로의 전환

사회의 주도권은 양반, 양반 지배구조 정착, 성리학 토대 지배질서 실현

국가 간섭 억제 상황, 농업생산성 향상, 인구 증가, 사회적 안정

인적 자원 파악 능력 강화, 10여년간 가호 수 200%, 인구 220% 급증

1657(효종5) 호적 66만여 호, 인구 230여만 명

1669(현종10) 호적 130여만 호, 인구 500여만 명

 

17세기 위기 = 기온 저하, 인조-효종대부터 본격화 현종-숙종대 최고조,

17세기 내내 지속, 냉해, 수재, 흉년, 전염병 출현, 다수 사망자 발생,

경신대기근(1670~1671), 을병대기근(1695~1699)-사망 140여만 명, 400여만 명 추산,

전체 인구의 11~14%, 25~33% 해당하는 엄청난 피해.

1711(숙종37) 이정법(里定法): 18세기 후반 면리 단위 기초로 한 총액제가

부세 운영의 새로운 방식으로 확립.

호적상 기재 방식 변화-양반층 직역이 유학으로 단일 고정,

양반 직역호 급증, 노비호 반비례 급감, 상민호 완만.

1700년 이전 유학호 3.8~4.8% - 171020% 이상 급증, 6~70% 폭등세

호적상 직역 변화 추이는 양역 정책 변화와 긴밀한 관련

 

양천제 기능의 정지

국가 대민 장악력 약화: 개별 가호 지배면리 단위 간접 지배 방식 변경

납속(納贖)등 합법적 면역 방법, 군역 면제 위해 양반도 아니고 상민도 아닌 계층 광범위 형성, 양천제 기능 정지, ‘반상제’- 16세기 출현, 17세기 강화

 

양반층의 존재

반상제적 단일신분구조의 정점= 양반, 상민층에 차별 더욱 경직.

16세기 중인층 차별, 17세기 서얼층 차별

서얼층 대대적 저항: 1696년 과거 응시 자격 획득, 1708년 당대 아니면 유학 직역 사용 가능, 1772년 과거 합격자 청요직 진출, 1777년 향소, 향교, 서원 직임 허용,

서얼층 성장 한계, 본격적 청요직, 고위 관료 진출 19세기 후반에 가능.

조선왕조 끝까지 양반층은 건재

 

위계의 조정

하위 신분구조의 해체 양상, 상위 신분구조의 경색 양상

노비제 사실상 소멸, 상민층 다양 직역 취득, 양반층 경색

 

 

 

홍순민외7명, 『 조선시대사 1- 국가와세계 , 푸른역사(한국역사연구회시대사총서05),  2022, pp132-17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