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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국시대 통일전쟁의 배경
2. 일본의 3대 통일 영웅과 주요 다이묘
3. 새로운 전쟁방식과 무기
4. 나가시노 전투
5. 결 론

 

1. 전국시대 통일 전쟁의 배경

전국 각지 다이묘들이 교토를 중심으로 통일의 꿈을 꾸는 혼돈의 시대 일본 전국시대는 1467년 오닌의 난으로 시작되었다. 천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무로마치막부 쇼군의 권위도 회복이 어려울 만큼 추락했다. 쇼군의 명령은 유명무실하여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은 겨우 교토 일대에 불과하였다. 무로마치막부는 더 이상 일본 사회 통치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당시 쇼군 요시마사의 나태함과 무책임은 시대 혼란을 가중시켰다.

무로마치막부의 슈고 다이묘가 있다면 신흥세력인 센코쿠 다이묘는 이미 무로마치막부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다.

센코쿠다이묘는 실력으로 장원을 빼앗아 가신들에게 분배하고 가신들을 성곽 주변에 집단 형성 거주하도록 하여 각 촌락의 무사를 생산에서 분리하여 병농분리 정책을 폈다. 독립된 소국가 통치체제로 독자적 법률을 제정해 무가 사회와 농촌사회도 직접 지배하려고 하였다.

 

* 일본의 막부

- 가마쿠라 막부(미나모토씨) : 1192~1333 ( 9대 쇼군, 16대 싯켄)

일본 최초의 막부, 최초의 무가 정권이 들어서 쇼군 정치가 처음 시작된 시대.

- 무로마치 막부(아시카가씨) : 1336~1573 (237년간 15대의 쇼군 배출)

교토 안의 한 구역 무로마치에서 유래, 1467년 오닌의 난, 1493년 메이오 정변 (쇼군 실권 권위 상실, 사실상 센고쿠 시대 진입), 교토를 제외하고 통치력 완전 상실. 일본사에서는 1467~1568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고 교토 입성할 때까지를 전국시대라고 한다.

- 에도 막부(도쿠가와씨) : 1603~1867 (264년간 일본 무가 정권 중 가장 오래 존속)

1603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이에야스에 의해 수립, 15대 쇼군까지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인구 증가, 국력 신장.

 

* 오닌의 난 : 1467년 부터 11년간 교토를 중심으로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벌인 다이묘간 전쟁, 이 전쟁으로 교토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다.

 

 

2. 일본의 3대 통일 영웅과 주요 다이묘

 

1)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 1534~1582)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로서 오와리 오다 가문의 당주이며, 무로마치 막부를 끝내고 센고쿠 시대의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으며 일본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데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군으로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혼노지의 변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다.

 

오와리의 센고쿠 다이묘 노부히데의 아들로 태어나 2살 때 이미 나고야의 성주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청년기에 걸쳐 기묘한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오와리의 바보라 불리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 후 형제간 권력다툼에서 이겨 오와리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마가와 군대의 침공을 격파하고(1560) 이마가와의 몰락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독립해서 센고쿠 다이묘가 되었고, 그런 이에야스와 노부나가는 동맹을 맺었다(1562)

교토로 진군해서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쇼군이 되는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곧 노부나가는 그를 폐위시키고(1573) 거대한 성을 쌓고 자신의 본부로 삼았다(1576)

 

노부나가의 정책 첫 번째는 기존의 권위와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정치, 종교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천태종의 본산 엔랴쿠지를 초토화했다(1571). 10년간의 저항에도 결국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인 오사카 혼간지의 항복을 받아낸다. 불교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교토에 교회를 세우고 아즈치에 신학교를 건립했다. 둘째 능력에 따라 과감하게 등용하는 개방적 인사 정책을 펼쳤다. 출신에 관계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로닌 아케지 미쓰히데, 다키가와 가즈마스등을 등용하고 선교사들과 같이 들어온 외국 군사도 받아들여 국적 관계없이 자신의 군대로 만들었다. 셋째 여러 방면에서 혁신적인 정책을 실행했다. 당시 새로운 병기 화승총을 적극 도입, 활용하여 전투 양상을 바꾸어 전통 전투 방식을 고집한 다이묘들을 격파해 나갔다. 또한 지방 다이묘의 특권 수입인 통행세와 동업조합의 세금을 폐지했다. 장원과 사찰의 토지를 빼앗아 사무라이와 부농들에게 분배했다. 이어 금은 광산의 경영, 화폐 주조, 도로 교량 정비, 검문소 폐지 등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구축했다.

 

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노부나가의 능력 중심 등용으로 아시가루(하위직 보병)가 되어 기지와 용병술을 발휘해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오미구니와 나가하마의 영주가 되었으며(1573), 하시바 지쿠젠노가미라 불렸다.

노부나가가 아케지 미쓰히데의 기습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아케지 미쓰히데를 공격, 처단하고 (야마자키 전투) 노부나가의 손자를 추대했다.

오사카에 큰 성을 축조(1583) 하고, 전국 통일하기 위해 일본 전역 정벌에 나섰다.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을 옹립하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전투를 치렀지만 동맹을 맺었다. 이에야스의 원조 아래 간토와 오우 지방을 복속시킴으로써 전국을 장악하는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최고위직 다이코가 되었다(1591)

일본 통일 후 해외 침략을 계획(중국, 필리핀, 인도정복)하고 조선에 임진왜란을 일으켰다(1592) 재침(1597)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98년 병사했다.(62)

 

3)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

 

  미카와의 토호 마쓰다이라 가문의 제8대 당주의 아들로 이름은 다케치요.

7세에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있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노부나가에 사망하자 고향인 오카자키로 돌아가 영주가 되었다. 이어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었다.(1562)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본거지를 하마마쓰로 옮겼으며(1570) 상업적, 전략적 요지로 개발했다.

노부나가 사망 후 히데요시와 몇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승부를 내지 못하고 신중한 이에야스는 충성서약을 했으며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4) 관동의 3인과 관서의 모리 모토나리

 

우에기스 겐신 (1530~1578) 일명 에치고의 용이라 불리며 센고쿠 시대 3대 영웅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 가이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과 라이벌 관계.

 

다케다 신겐 (1521~1573) 가이 다케다 당주, 센고쿠 시대 손꼽히는 명장.

카이의 호랑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케다 신겐은 나에게 매우 두려운 존재였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나는 그에게 패배하고 도망가면서 말 위에서 변을 지릴 정도였다. 정말 존경하면서도 무서운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서 백성을 다스리는 마음, 전투에 임하는 자세 그리고 인내와 기다림을 배웠다. 그때의 패배가 내 인생에 얼마나 큰 교훈이 되었는지 모른다. 다케다 신겐, 그는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호조 우지야스 (1515~1571) 후호조씨의 3대째로 후호조씨 당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 전국시대 제일의 민생가로 유명하다. 화폐통일, 탄력적 조세 정책, 관료 제도 개혁, 일본 최초 상수도망 구축, 민중 생활에 관심 가진 군주.

모리 모토나리 (1497~1571) 오늘날 히로시마현 서부 아키의 다이묘, 여러 가지 모략으로 유명해서 모신(謀臣)으로 불림, 서국 제일의 다이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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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배사 충주지회 및 여해인문학스터디 영화(노량)관람 및 송년모임

 

- 일시 : 2023년 12월 27일 수요일 오후5시00분~

- 장소 : 충주 교현CGV (영화 노량 18:45)

- 참석 :  총13명  - 일심(임원빈), 이정(오희연), 해주오씨(김경은), 조령(박동수), 선전관(김혜량), 선유도(김병석),

충주감영(김명란), 정기화, 김선남, 표영춘, 박경애, 이택주, 전연주, 권혁분(참석예정,불참)

          

- 다음모임 : 2024년 2월 19일 신년회  

- 안건내용 :  영화 '노량' 관람,  송년모임, 신년 일정. 

 

2023년  이배사 충주지회및 여해인문학스터디는 12월11일 목 12회차 모임을 가졌습니다.

 

2023년 1회(6/19) , 2회( 7/4), 3회(7/11), 4회(7/18), 5회(7/25), 6회(8/8), 7회(8/22), 8회(9/11),

             9회(10/9), 10회(11/6), 11회(12/11), 12회(12/27)

 

2023년 여해인문학스터디 시작에는 마침 좋은 사업(중원문화재단 집밖문지방3)이 마중물이 되었고

(1년을 벼르다가 시도했고 운좋게 선정되어 작지만 큰 의미와 보람이 되었습니다) 

충주시내에 충주전통예술원 공간이 적당히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정님과 충주감영님의 적절한 인맥의 소통(충주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들)을 바탕으로

충주 거주하시는 이순신 전문가 임원빈교수님의 적극적 강의지원으로 막강파워를 얻었습니다.

 

- 충주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들께서 2023년 충북 전체 문화관광해설사 보수교육에 임교수님의 강의가 있었고

흡입력 강한 훌륭한 강의로 대단했다는 후일담을 들려주셨습니다

- 여러 많은 강의와 교육 경험이 높으신 선생님들께서 적극추천하는 강의로 손꼽아 주시며 충주에서 그동안 몰랐었다고

충주시장님도 모른다고...문화에 관심 없다...잠시 흘러갔습니다...

 

엄청 바쁘신 표영춘선생님(서예협회충주지부장)의 적극적인 홍보로 여러 회원님 왕래하셨습니다. 

충주는 크지 않은 지역이라 오셔서 말씀 나누면 대부분 지인이신 듯한 신기한 지역애를 여러번 경험하고 있습니다. 

 

김병석(선유도)님 가입을 마지막으로 그동안 총 34분께서 참여를 해주셨으며

 

11회차에는 여해인문학스터디의 회장님으로 정기화 선생님(충주문화관광해설사)께서 선출되셨습니다. 

이배사충주지회장(총무겸) 김경은 / 스터디모임회장 정기화  

 

12월에 개봉된 김한민 감독의 영화 '노량' 을 함께 관람한 특별한 송년 모임이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영화를 중심으로 여러 선생님들 참여해 주셔서 감사와 감동이 가장 크지만

영화평에 대한 비슷한 여러 비평들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가 있었는지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들과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장군 순국의 속상함이 더해져 안타까움이 컸던 관람이었습니다.  

동시에 턱없이 부족한 처지여도 그래도 장군에 대한 공부를 계속 잡고 있는 감사함이 들었습니다. 

뻔한 정보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혼미하기만 했던 상태에서 벗어나

영화속 등장인물들, 여러 장소들, 여러 무기들, 상황들이 낯설지 않고 익숙해졌으니 말입니다. 

 

노량...이순신 장군님의  순국...나라와 백성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한 사람의  헌신, 희생이 나라를  구했던  역사의  자취를..  10여년에 걸처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김한민 감독의 노고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오늘 밤만이라도..나라를..국민을..인류를 가슴에 품고..잠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밤..되세요...ㅎ   - 일심

극장입장 대기 중~ 팝콘, 음료 준비완료!
이정(오희연)님,박경애선생님, 정기화회장님, 임교수님 나란히~
선전관(김혜량), 충주감영(김명란),해주오씨, 조령(박동수) 나란히~
건배~
정철 선생의 가을남자에 어울리는 가을시~

                                         

- 순차일정 기입, 호칭 생략

저녁식사(회장 정기화)              11만원

영화티켓 (지회장 해주오씨)       8만3천원 (경로 6천/ 일반 7천- 문화의날 할인)

팝콘,음료( 일심 임원빈 )            5만원

회비후원금(충주감영 김명란)    20만원

서예 족자 선물(표영춘)              2(개)

뒷풀이 치킨집(선유도 김병석)   10만원상당

 

영화관련 의견, 질의를 통한 간단한 담화

신입회원 선유도 김병석님 소개 

신년에 진행될 스터디 교재 안내- 임원빈 교수님의 칼럼

신년회 일정 - 2024년 2월 19일 월 (스터디는 3월부터 시작)

모임 회비 (신년부터) 2만원

충주 음식점 리뷰 및 소개등- 신년회 장소 논의

충주 여해인문학스터디 홍보- 노량 영화 상영극장에 스터디 모임 홍보물 의견- 가능할지 모르지만 다음주 시도예정

 

임원빈 교수님, 정기화 회장님과 회원님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2023년 송년 특별한 모임이 순조롭고 알차게 진행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도에 만나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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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BC404)

패권전쟁 = 페르시아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 vs. 스파르타 공격/승리

 

펠로폰네소스전쟁의 배경

아테네 vs. 스파르타

- 해외진출 문제: 페르시아 전쟁 승리를 주도한 아테네의 패권/해외 팽창. 스파르타(소극적인 자급자족적 농업국. 견제심리)

- 성벽/신전 문제: 아테네(재건!) vs. 스파르타(반대!). 스파르타 해명 요구에 아테네 사절단(“우리는 동맹국의 지지를 얻었고 그 결과 제국을 현재보다 확장하지 않을 수 없다!”)

- 민주화 문제: 페르샤전쟁에 기여한 하층민에 참정권 부여. 아테네 민주정(자유로운 시민 기풍)의 에게해 확산에 스파르타 불안

- 헤일로타이(helot) 문제: 이주민(스파르타인)이 원주민을 정복/노예화. 스파르타인(5) vs. 헤일로타이(10). 국가 소유. 경장병 참전. 노예 반란의 불안노예 억압/군국주의화

 

- 헤일로타이 반란(BC 465) 진압: 스파르타는 반란 진압 동맹군 소집에서 아테네군 거부. 진압 후 추방된 반란군을 아테네가 수용 후 스파르타 주변에 정착 스파르타 분노

- 델로스동맹(Delian League, 아테네) vs. 펠로폰네소스동맹(Peloponnesian League, 스파르타 중심).

- 스파르타(농업국. 무역/이윤에 무지) vs. 아테네(델로스동맹의 기금/회의장소, 델로스 아테네 이전. 해상권/이윤 장악)

 

펠로폰네소스전쟁의 무기

- Phalanx & 장비의 경량화

- 팔랑크스(Phalanx) vs. 팔랑크스(밀집 장창 보병대), 소수의 기병 등장. /투창 사용. 펠타스트(투창병 Peltast)

- 청동 흉갑(토락스, 18kg) 아마포 흉갑

   호플론 방패(9kg, 직경 60cm 이상) 아스피스(2kg, 45cm, 목재)

-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는 제국화, 경량화로 넓은 영토를 걸어 다녀야 

- 코린트식 투구, (Sarrissa)과 함께 검 사용

 

펠로폰네소스전쟁의 전개

- 1 ROUND(무승부와 평화조약)

/동맹 내 코린토스와 메가라 분쟁 메가라, /동맹 탈퇴, /동맹 가입. 아이 싸움 어른 싸움. 스파르타의 개전

아테네 방어 전략: 청야전술(scorched earth tactics) = 농작물 태워 스파르타군의 현지 식량 조달에 타격주고 성벽 안으로 이주/농성전. 해군으로 스파르타 해상 봉쇄.

지루한 전쟁: 부유한 아테네(해외 농작물 수입). 스파르타(농업 자급자족. 해상봉쇄는 타격 없어. 노예반란 걱정으로 장기간 원정 어려워).

아테네 성내 전염병: 인구 1/4 피해. 페리클레스/아들 사망. 리더십 붕괴

 

페리클레스(#1, BC 495~429)

- 페르시아/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아테네 지도자

- 아테네의 황금시대

- 예술/문학 장려. 아크로폴리스/파르테논신전 건설

- 귀족파에 맞서 민중파 지지, 민주주의 확보

- 투키디데스: 그는 아테네의 제1 시민

 

- 투키디데스[고대 아테네의 역사가,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저술]: “페리클레스는 명망과 판단력을 겸비한 청렴결백한 지도자. 그는 항상 대중을 이끌었고 대중이 너무 의지하면 불안케 만들고 대중이 낙담하면 자신감을 회복시켰다.”

- 행운: 아테네의 스팍테리아 전투 승리. 아테네는 경보병 활용하여 기동성 약한 스파르타 중장보병을 공격. 뜨거운 햇볕에 철갑에 화상^^

- 스파르타군 200명 포로 획득[당시 스파르타 완전 시민(상류층 지배계급)3,500명뿐이라 피해 커]

스파르타 굴욕(항복보다 전사!), 최초의 패배. 포로 교환과 휴전

니키아스 평화조약(아테네 총사령관 니키아스, 각 점령지를 반환. 원점)

 

- 2 ROUND(스파르타 승리)

아테네: 경제/해군력 재건 위해 약소국 약탈(: 멜로스 파괴. 성인 남자 학살, 여자/아동은 노예로 판매)

시칠리아 원정: 원래 이오니아, 이집트, 시칠리아(지중해 무역 거점) 곡물 수입. 시칠리아 분쟁. 세게스타(아테네 이민자. 지원 요청) vs. 셀리누스(스파르타 이민자)

- 주전파(페리클레스 조카, 소크라테스 제자. 미남/연설/정치가/군인 알키비아데스) vs. 평화파(니키아스 장군) 논쟁

- 알키비아데스(#): 능력/연설/미남/가문 탁월. 품성x. 음모가. 소크라테스가 스승 자청/애제자. 라파엘로(1511)<아테네학당>

- 스파르타 협상단을 농락

- 민회(시민총회)에서 투표로 사령관 3인 선출 = 알키+니키아스(군사행정)+라마코스(장비 스타일). 리더십 혼란. 아테네 해군 패전.

- 신전 파손 사건: 신전의 헤르메스(상업/나그네/목동/도둑의 신) 파손.)파손. 시민의 분노/불경죄. 용의자 = 알키비아데스.

 

- 알키비아데스, 스파르타로 망명. 의회 연설. “내가.“ 너희에게 준 피해보다 더 많은 피해를 아테네에 주겠다. 스파르타인이여, 청하건대 여러분의 위험한 일이나 힘든 일에는 나를 이용하시오.”

- 알키비아데스의 전략

시칠리아에 스파르타 파병을 설득 아테네 해군의 패전

아테네 인근 도시국가 점령, 교두보 확보 후 상시 공격. 농사 불가 & 곡물 전량 수입, 재정 파탄.

아테네의 자금줄인 소아시아 식민도시의 반란 유도.

- 스파르타 왕비와 스캔들(임신)과 사형 선고. 페르시아 망명.

- 알키비아데스 = 소아시아지역의 페르시아 총독 참모 등극. 당시 페르시아는 스파르타 해군의 월급을 대신 지급 중.

알키비아데스의 전략: 월급 지원 중지. 아테네가 세지면 스파르타 지원, 스파르타 세지면 아테네 지원. 이이제이(以夷制夷) &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cf. bandwagon effect.

 

- 3 ROUND(스파르타 승리)

-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 해전 중 알키비아데스 등장(각국에서 빌린 사설 함대). 아테네가 알키비아데스를 환영/수용. 스파르타 육해군 격퇴.

- 그러나... 노티움 해전 패배, 알키비아데스 영구 추방

- 아리스토파네스(고대 그리스 희극작가): “모두 알키를 무서워하고 싫어하면서도 그리워한다

- 마지막 전투(아이고스 포타모이 해전). 아테네 사령관(6. 패전시 책임/사형/추방 회피 위해 1일 지휘권 윤번제). 리더십의 분절화

- 스파르타: 사회개혁 단행. 1등 시민(완전자유민) = 병력 부족. 2~3등 시민에게도 지휘권/권한/시민권을 부여. 리산드로스(스파르타 해군 제독)가 페르시아 해군 원조 설득 아테네 해군 격파.

알키비아데스 재등장, 아테네의 거부/패배. 소아시아 은둔/피살

 

펠로폰네소스전쟁의 결과

- 4 ROUND(스파르타 패배. 테베 신흥강국)

그리스제국의 패권 확보. 그러나 쇠락 징후

1) 청탁/공훈에 따라 병역 면제(1/4로 감소), 군사력 약화

2) 타국도 전쟁으로 군사력 증강

3) 테베가 신흥 강국 등장. 테베의 정예군 신성대.

레욱트라전투(BC스파르타 vs. 테베). 테베의 사선진 전술 주효

테베 지배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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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장 그리스 세계와 그 문화 

  

 제4절 펠로폰네소스전쟁과 그리스의 쇠퇴

 

펠로폰네소스전쟁

- 페르시아 위협 사라진 후 아테네 델로스동맹 발판으로 강대국 발전, 스파르타와 충돌 불가피

- 에게해와 아시아에서 패권 장악 아테네, 중부 그리스의 보이오티아와 코린트, 메가라를 위협하며 코린트 장악, 서부지중해로 진출하려고 하자 스파르타와 충돌 발생(459~447 B.C.) 

- 아테네와 스파르타 30년간 평화조약 (446 B.C.) 

- 그리스 본토와 서방의 교량적 위치한 코르키라가 상업상 이해관계 충돌로 아테네와 동맹을 원하게 되고(433 B.C.)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28년간 (431~404 B.C.)  펠로폰네소스전쟁 발발. 

- 기원전 430년 여름 아테네 페스트 질병으로 큰 피해, 페리클래스 사망( 429 B.C.)   

  승패 없이 10년간 전쟁 지속, '니키아스의 평화' 협정(421 B.C.) 

- 페리클래스의 친척 알키비아데스 추대, 본토에서 스파르타 꺾기 어렵다고 판단,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공격 계획.

- 기원전 415년 알키비아데스 지휘, 200척 함대 시칠리아 대원정 시작, 본토의 정적들 민중 선동 규탄,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도망, 시칠리아 대원정 완전한 실패( 413 B.C.) 

- 아테네 함대 스파르타 함대(페르시아 원조 확보)에 승리했으나 폭풍으로 익사한 수병이 많아, 6명의 장군 규탄, 집단 처형 - 헬레스폰트 입구에서 아테네 함대 결정적으로 패전(405 B.C.)  아테네 제국 완전 해체, 모든 해외 재산 포기, 스파르타 동맹 시로서 그 지휘하에 종속, 함대는 12척으로 제한. 

- 펠로폰네소스전쟁 중 아테네의 정치적 내분, 알키비아데스의 스파르타로 도망, 스파르타의 페르시아 결탁

-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정견없는 민중지배의 어리석음과 위험을 아테네의 국운을 걸고 드러내 놓음으로써 페리클레스의 이상과 기대가 현실과 얼마나 거리가 멀었던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제 남은 길은 폴리스 상호 간의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을 통한 그리스 전체의 쇠퇴였다. 

 

그리스의 쇠퇴

-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주둔 스파르타 수비대 후원 하에 30인 참주 정치, 과두제 , 공포정치, 민주정치 회복되었으나 이전 페리클레스시대의 민주정치는 아니었고, 소크라테스 처형도 이 시대의 민주정치였다. 

- 아테네를 대신하여 지도적 지위를 차지한 스파르타, 각 폴리스 군대, 감독관 파견, 고액 공납금 요구, 억압적

- 페르시아 왕위 내분 발생시 소아시아 출병, 실패, 함대 상실(394)- 이 틈에 아테네 동맹 시 다시 규합, 테베 중심 결합-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와 화평(386 B.C.) , 소아시아를 완전히 페르시아에 넘겨주는 대신 본토 패권 유지하려 함, 그러나 함대 상실, 보수적, 경직된 정치체제의 농업국가 스파르타로서는 힘겨운 일. 

- 스파르타를 증오하던 테베의 펠로피다스를 중심으로 민주정치 회복, 스파르타 수비대 격파, 에파미논다스의 유능 전술, 지휘로 격파,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가 되어 있던 메세니아를 해방 - 스파르타시민의 생활기반 붕괴, 테베의 패권 장악

-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래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사이의 패권 다툼은 그 누구에게도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지 않고, 개별적인 폴리스의 자유와 독립을 고수하려는 분립주의를 더욱 강화시키고, 이에 따라 폴리스 상호 간의 대립과 분쟁을 다시금 격화시킴으로써 그리스의 정치정세를 혼란과 무정부상태로 빠뜨렸다.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의 탁월한 정치적 성찰도 폴리스라는 좁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가 당면한 현실정치의 혼란을 수습할 구체적 방도를 제시하지 못했다. 

- 경제는 발전, 농업 기술 향상, 생산력 증대, 수공업 성황, 상업, 무역 번창, 노예제 사회

- 정치 무관심, 공직 기피, 군역 기피, 시민 중장보명은 직업 용병 대치, 용병은 페르시아, 적대 폴리스에 가담

- 기원전 4세기 시민공동체 성격 상실, 폴리스사회의 퇴폐적 변질, 4세기 후반 신흥 마케도니아에 어이없이 굴복 원인.

 

마케도니아의 흥기 

- 마케도니아인의 기원 불확실, 그리스계거나 그리스와 트라키아인, 일리리아인과의 혼합민족.

-  그리스인 남하 때 북방에 부족사회 형태 유지하였기 때문에 후진적이었고 그리스 눈에는 야만인이었다. 

   그리스식민시를 통해 그리스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발전을 계속.

- 기원전 4세기 중엽(359 B.C.) 마케도니아 왕위에 오른 필립, 정치,군사적 개혁을 통해 씨족 기반 봉건 왕국을 견고한 통일 왕국으로 만들고 막강한 상비군 보유, 자유로운 소농출신의 보병 밀집부대, 대귀족지주 들은 왕의 전우로서 중무장의 우수한 기병대 형성.

- 필립은 젊은 시절 테베에 볼모로 오래 머문일이 있었다.  마침 테베가 패권을 잡고 있었을 때였고 에파미논다스로부터 정치, 전술 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리스 사정에 정통할 수 있었다.  

- 흐트러진 그리스 통합, 숙적인 페르시아 정복 계획 수립, 페르시아 원정 출발전 암살, 47세 (336 B.C.) 

- 필립의 뒤를 이어 알렉산더 왕위(20세), 군대 충성 확보, 경쟁자 제거, 그리스 내의 반마케도니아전선의 테베와 아테네 격파, 페페 파괴, 그리스 규합 후 페르시아원정 시작(334 B.C.) , 그리스 폴리스들 정치적 생명 완전 상실.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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