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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세기 개방형 경제사회로 서구, 신분제 급속 소멸

  농촌공동체 존속 강한 제3세계국들 여전히 신분제가 사회구조의 특징- 인도 카스트제도

조선왕조 농업경제 기반 사회, 농민 중심 사회, 다양 인신적 구속, 신분차별

조선왕조 신분제는 중국 수,당왕조 양천제/ 일본 양천제와 역사 경로 다름

  통일신라, 고려, 고대 중국, 일본과 강한 동질성과 연속성을 보이는 동시에 뚜렷한 차별성이 있다.

 

 

임진왜란 직후의 경상도 함양사회 : 조선 중기의 한 단면

 

귀향과 처벌

정유재란 극심 피해 지역, 경남 우도 함양 정경운 가족

159788일 정유재란 발발 피란(17개월간),

1599(선조37) 노량해전(1598) 전쟁종료 100여일 만 귀가, 움막 급조 거처마련

16038월 초가삼간 장만, 다리 뻗고 잘 수 있으나, 북풍한설 여전

16063월 기와집 장만, 귀향 7년만

농사 어려움-, 종자난, 農牛 부족, 일손부족(노비 도망)으로 농기 놓침

1602년 노비 추쇄 작업 성과로 외방노비들 추적, 솔하 노비로 데려옴

1604년 전라도 부안 일대 노비 16명 소재 파악, 신공 파악 서약 받아냄

이로써 노동력 부족으로 파종시기 늦고, 수확부실의 악순환이 해결

전쟁 종료 8~9, 1606~1607년 차츰 정상 회복, 안정상퇴 복귀

귀향 양반 주축 향회 개최- 왜군 부역, 만행자 처벌 진행, 1600년 활기

전쟁 이전 양반 지배 사회 복원, 향리 이하 피지배층 예속 강화

국가 복구 정책 양반 유리 작용 (양반 자발적 참여 초점)

 

복구와 분열

향소, 향교, 서원 등 공공장소 재건 사업 시행

남계서원(정여창 배향 서원) 중건 과정 양반들 분열

중립-하동 정씨(정여창 후손), 풍주 노씨(노진 후손) VS 진주 강씨(강익 후손)

분쟁-추향 대상인 노진과 강익의 위차 설정( 스승 노진-구파, 제자 강익-신파)

경남 우도 정통 학통: (구파: 정여창-노진/ 신파: 김굉필, 정여창- 조식- 정인홍)

신파의 입장 정인홍의 전폭지지, 정인홍의 학문적, 정치적 위상과 관련 문제

신파의 승리 - 구파는 신계서원 따로 세워 노진 배향.

이전 권위 부정하는 새로운 정치세력 등장 역사적 사실 반영

양반층 임진왜란 이후 국가 전쟁 극복 주도세력으로 공식인정

1601(선조34) 경상도 관찰사 윤승훈의 보고서 - 지역사회 분위기 날로 험악,

관찰사 조차 양반들에 적절 재재 불가능하다고 비관적 전망을 보고함.

지역사회 에너지 집약 결과 광해군(1608~1623)대 지역적으로는 경남 우도, 학문적으로는 조식, 정인홍을 공통분모로 하는 북인정권 탄생이 가능.

 

양반 지배구조의 확립

임란이후 양반층 국가 충군 정책 공공연 거부, 저항

1599(선조32) 기해군적(己亥軍籍)이후 양반 자제 2,600명 국가의 신량 확보 계획 저지

1610(광해군2), 1626(인조4) 각기 실시된 호패법 무산

1627년 사족 충군 정책 공식 폐기- 양반 국역의무 면제 공인

양반층 제외 비양반층 모두 상민으로 간주 - 1606병오호적

 -양반 부녀호칭, 도서 사용/ 상민 부녀조이(소이召吏)’, 손도장만 찍음

병오호적항의자 전원 구속, 호패법 실시과정에 차별 지속.

-양반출신 관직자 모두 각패角牌 착용/ 잡류층 이하(관직이 높아도) 목패木牌 착용

모든 부분에서 인물 평가 기준은 신분, 양반 지배구조 시작.

 

1413(태종13) 호패사목작성, 호패법 시행(1416년 폐지)

1624(인조 2) 이괄의 난 발생

1626(인조 4) 호패법 실시(1627년 폐지)

 

 

국가적 평등을 지향한 사회 : 조선 초기

 

국가의 작동 원리

15세기초 국가운영 핵심장치 제민齊民정책 국역체제(운영원리) 양천제

조용조租庸調(토지,요역,토산물) 3세 담당자- 호적에 인민 편제, 국가 운영 참여 가능 기회, 권리 제공,

  국가 정책 양인층에 초점

전체 인구 30%이상 천인층 양인층에 예속, 매매, 증여, 상속=물건

 

개인의 능력에 기초한 개방형 사회

모든 양인 교육, 과거 응시, 관직, 군역 복무 기회 제공-양인 기회균등 보장.

국가 지배신분층 존재 용납하지 않음 - 고위 관료 지위 세습 불가, 특혜 불가

  1553(명종8) 이황 아들 이준이 충군 될까 전전긍긍, 당시 시대 모습 반영

지배층=사족(士族), 조선 초기 혈통 지위 세습신분의미 용어 미발달

  고려 후기 이래 현관(縣官)출신자, 3대에 이르는 후손들 뜻하는 용어

당시양반은 모든 관직자 지칭, 개인 능력 여하에 따라 언제든 획득 가능한 계층을 의미

 

폐쇄형 사회로의 이동

15세기 초 양천제 강화에도 지배 엘리트 귀천의식 강력 존재, 차별의식 여전

정직 출신 관직자,가족 자신은 사족, 그렇지 않으면 상인(常人)이라 부름

양천제는 조선왕조 시작 야심차게 추진 국가 운영체제였으나 국가와 직접 접촉하지 않는 훨씬 넓고 깊은 사회적, 관습적 영역이 존재했으며 그 영역에서 양반, 상인 관계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사족층의 성장

연산군대(1494~1506) 국가 운영체제 근본 문제 발생, 연산군의 폭정, 조용조 3세의 세액 증대, 징수 방식 변화 초래-하층 양인 납세 부담 증대, 경제기반 흔들

하층 양인 몰락, 양천제 동요, 대규모 거주지 이탈, 노비로 신분 전환.

몰락 하층 양인의 경제력 흡수한 상층 양인은 중소지주, 노비 소유주로 전환,

새로운 계층 형성, 사회적 위상에 따른 국가정책 반대, 지위 상응 대우 요구

1525(중종20) 전가사변(全家徙邊)정책 시행, 사족을 재규정.

죄인을 그 가족과 함께 변방(평안,함경)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

사족은 전가사변형이나 여타 체형의 적용에서 제외한다‘-일정 특혜층 공인 시작.

잡류층의 문,무반 정직 참여 배제-마지막역승직진출 폐지.

모든 국역 담당자 관직 균등 개방은 부당하다‘- 사회구조 사족층 위주로 재편, 경색

 

제약과 한계

사족의 사회적 지위 급성장 사실이나 여전히 국가 공권력에 규정받는 존재

사족과 토호(土豪)의 경계 불분명, 언제든 제재, 처벌 대상, 군역의 충군 대상

임란 전쟁 주도권 : 수령(관군 차출) VS 사족(의병활동으로 지역 사수)

곽재우(전국 최초 의병 봉기) 반역 혐의로 체포, 형벌, 의병을 해산 시킴

사족층: 의병 주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

양반층: 전후 복구사업 주도, 격상된 위상 과시, 국가로부터 사회적지위 인정

17세기 이후 새 사회구조 양반 지배구조의 출발

 

 

신분 변화의 이중주 : 조선 후기

 

‘17세기 위기와 부세 총액제로의 전환

사회의 주도권은 양반, 양반 지배구조 정착, 성리학 토대 지배질서 실현

국가 간섭 억제 상황, 농업생산성 향상, 인구 증가, 사회적 안정

인적 자원 파악 능력 강화, 10여년간 가호 수 200%, 인구 220% 급증

1657(효종5) 호적 66만여 호, 인구 230여만 명

1669(현종10) 호적 130여만 호, 인구 500여만 명

 

17세기 위기 = 기온 저하, 인조-효종대부터 본격화 현종-숙종대 최고조,

17세기 내내 지속, 냉해, 수재, 흉년, 전염병 출현, 다수 사망자 발생,

경신대기근(1670~1671), 을병대기근(1695~1699)-사망 140여만 명, 400여만 명 추산,

전체 인구의 11~14%, 25~33% 해당하는 엄청난 피해.

1711(숙종37) 이정법(里定法): 18세기 후반 면리 단위 기초로 한 총액제가

부세 운영의 새로운 방식으로 확립.

호적상 기재 방식 변화-양반층 직역이 유학으로 단일 고정,

양반 직역호 급증, 노비호 반비례 급감, 상민호 완만.

1700년 이전 유학호 3.8~4.8% - 171020% 이상 급증, 6~70% 폭등세

호적상 직역 변화 추이는 양역 정책 변화와 긴밀한 관련

 

양천제 기능의 정지

국가 대민 장악력 약화: 개별 가호 지배면리 단위 간접 지배 방식 변경

납속(納贖)등 합법적 면역 방법, 군역 면제 위해 양반도 아니고 상민도 아닌 계층 광범위 형성, 양천제 기능 정지, ‘반상제’- 16세기 출현, 17세기 강화

 

양반층의 존재

반상제적 단일신분구조의 정점= 양반, 상민층에 차별 더욱 경직.

16세기 중인층 차별, 17세기 서얼층 차별

서얼층 대대적 저항: 1696년 과거 응시 자격 획득, 1708년 당대 아니면 유학 직역 사용 가능, 1772년 과거 합격자 청요직 진출, 1777년 향소, 향교, 서원 직임 허용,

서얼층 성장 한계, 본격적 청요직, 고위 관료 진출 19세기 후반에 가능.

조선왕조 끝까지 양반층은 건재

 

위계의 조정

하위 신분구조의 해체 양상, 상위 신분구조의 경색 양상

노비제 사실상 소멸, 상민층 다양 직역 취득, 양반층 경색

 

 

 

홍순민외7명, 『 조선시대사 1- 국가와세계 , 푸른역사(한국역사연구회시대사총서05),  2022, pp13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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