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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오리엔트의 사회와 문화

 

  제3절 메소포타미아

 

  역사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 유역에서도 이집트와 거의 동일한 시기(5000~3000 B.C.)에 신석기시대로부터 문명 단계로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이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문명 탄생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는 나일강의 이집트문명에 대한 것과 비슷하였으나, 이집트의 지세가 비교적 폐쇄적인 데 반하여, 두 강 유역은 주변의 사막이나 고원의 여러 민족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러한 관계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많은 민족의 이주와 정복, 이에 따른 지배자의 교체가 있었다. 새로운 민족의 이주나 정복에 의한 교체는 이미 신석기 시대에도 있었던 모양으로 ''이라고 불리는 문화지층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여러 민족의 이주나 정복은 파괴를 수반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문화의 발전을 촉진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문명의 발생과정을 단계적으로 표시한 할라프(Half, 5100~4300 B.C.), 우바이드(Ubaid, 3900~3500 B.C.), 우루크(Ukr, 3500~3100 B.C.) 및 제므뎃-나스르(Jemdet-Nasr 각 문화기는 새로운 문화 요소의 도입과 새로운 발명으로 문화 내용이 단계적으로 더 풍부해지고 있다. 할라프기의 작고 소박한 신전 건축은 우루크기에 이르러서는 245*100ft. 의 넓이를 가진 거대한 신전 건축으로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진흙과 햇볕에 말린 벽돌로 쌓아 올린 지구라트, 즉 성탑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우루크기의 신전 계산서인 토판문서(clay tablet)에는 문자의 원형이라고도 할 그림과 기호가 적혀 있으며, 그것은 제므뎃-나스라기에 이르러 보다 더 문자에 가까워지고, 기원전 3000년이 초의 우르 고왕조기에는 현대 의학자들이 충분히 해독할 수 있는 문자가 되었다. 이 무렵에는 두 강의 하루에 위치한 수메르에 많은 도시국가가 형성되고, 곧이어 그 북쪽의 아카드에도 도시국가가 나타나 그 수는 15개 내지 20개에 달하였다. 도시의 중심은 신전이었고 도시를 둘러쌓은 성벽 밖에 농경지와 목장이 있었다. 이 도시국가는 신관을 겸한 왕에 의하여 지배되었으며, 도시의 주민은 승려, 전사, 귀족, 상인, 공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의 물과 또한 동일한 공급지로부터 운반되는 외국 산물 자에 의존하는 지리적 통일체였으나, 수메르와 아카드의 도시국가들은 서로 끊임없는 대립과 분쟁을 거듭하였다. 메소포타미아가 정치적으로 통일되는 것은 사르곤 왕(Sargon, 2350 B.C.) 때의 일이다. 사르곤 왕은 두 강 유역은 물론이요, 시리아의 엘람에까지 이르는 큰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무너졌다. 이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다시 수습한 것은 우르의 수메르왕조였으며, 사르곤 왕의 옛 영토를 다시 회복하여 제국적인 행정조직의 정비에 착수하고 종래의 지방적 관습법의 법전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약 1세기 동안(2050~1950 B.C.) 계속된 이 수메르왕조도 서쪽으로부터 침입해 온 아무르 족(Amurites)에 의하여 무너지고 이에 수메르 쪽의 메소포타미아 지배가 끝났다.

바빌론에 자리 잡은 아무르 족은 점차 주변 지역을 평정하여, 18세기 말경 함무라비 왕(Hammurabi, 1728~1686 B.C.) 때 메소포타미아는 다시 견고하고 강대한 통일왕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함무라비는 직접 행정관과 사법관을 임명하여 정무를 관장하고, 재래의 도시법을 대치할 통일된 법전을 편찬함으로써 이 새로운 바빌로니아왕국의 통일과 질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왕국도 함무라비 이후 점차로 쇠퇴하여 기원전 16세기 후반에는 지금의 이란 쪽으로부터 하시기 트족이 침입하여 약 4세기 동안 바빌로니아왕국을 지배하였다. 카 시트 지배 하의 바빌로니아는 문화적으로는 침체기였고, 정치적으로도 함무라비 시대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바로 이집트가 신왕국 시대를 맞이하여 제국주의 정책으로 시리아 방면으로 진출하고, 소아시아에서 새로 일어난 히타이트의 세력이 역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진출하는 한편, 두 강 상류 쪽에 미 탄(Mitanni)이라는 신흥국가가 출현하는 등 오리엔트 세계가 활발한 움직임과 접촉 속에 하나의 국제사회를 형성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정치와 사회구조
메소포타미아의 정치구조는 관개농업과 부역 및 공납에 의존하는 동양적인 전제국가라는 점에서는 이집트와 유사하다. 메소포타미아의 전제군주도 신적인 권위를 겸유하고 있었으나, 이집트의 파라오가 호루스신 의 화신이요, 태양신의 아들인 것과는 달리 신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신적 권위는 파라오보다 약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현 세신으로서 절대적으로 군림하고, 전 국토가 그의 소유였으나, 메소포타미아, 특히 바빌로니아에서는 시민 개개인의 재산 소유, 상속, 매매가 인정되고, 정치적 지배자는 정의를 행하는 자의 성격을 겸유하여 법에 의한 통치라는 개념이 함무라비법전 등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는 함무라비법전은 사회계급을 명확하게 셋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귀족, 승려, 전사, 관사(서기 포함) 등이 제일계급이고, 상인, 금융가, 공인, 농민 등이 평민을 구성하고, 최하층에 노예가 있었다.

문화
메소포타미아문화의 기조는 수메르문명이었고, 바빌로니아는 이를 계승 발전시켰다. 수메르, 바빌로니아 사회가 기본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메르, 바빌로니아 문명은 도시 문명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또한 다신교였다.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은 저마다 수호신을 갖고 있었고, 그러한 도시의 수호신을 넘어선 신들도 적지 않았다.

승려들에 의하여 기록된 신전 계산서의 그림과 기호는 점차 발달하여 기원전 3000년을 좀 지나서는 설형문자(cuneiform letter)가 되었다. 젖은 진흙 판에 갈대의 펜으로 쐐기모양의 문자를 기록하여 햇볕에 말리거나 구워서 보존하였으며, 이를 토판문서(clay tablet)라고 한다.

수메르에서 시작된 설형문자는 그 후 아카드, 바빌로니아 등 셈어족 계통의 민족의 문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전역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표시하는 데 사용되는 국제적인 문자가 되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있어 문자를 해독하고 서기가 된다는 것은 모든 육체적인 노동이나 군역으로부터의 해방과 위엄있는 관리의 길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서기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가 궁정이나 신전에 마련되어 단순한 글공부만 아니라, 산수를 비롯한 기본적인 학과목의 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길고 엄격하였으며, 주로 상류층의 자제가 이를 이수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문학작품은 이집트의 경우보다 많이 남아 있다. 그것은 신과 영웅에 관한 서사시로부터, 신에 대한 찬가, 도시의 파멸과 정의로운 사람의 부당한 고난을 슬퍼하는 한탄, 격언 등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한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은 영웅 길가메시(Gilgamesh)에 관한 서사시이다. 길가메시는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를 응징하기 위하여 신이 보낸 괴력의 사나이와 친구가 되어 모험을 찾아 긴 여행길에 오른다. 괴물과 괴수와 싸워 죽이는 등 많은 모험을 겪은 끝에 친구가 죽자 이를 몹시 슬퍼하고 불사의 열쇠를 찾아 헤매다가 이에 실패한다. 그에게도 죽음이 다가왔을 때 길가메시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를 조용히 받아들인다.

   제4절 동부지중해 연안과 오리엔트의 통일

 

  해상민족  페니키아  헤브라이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동부 지중해 연안의 작은 나라들의 활동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기원전 1000년이 전반의 오리엔트서의 흐름은 오리엔트 세계의 통일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 과업에 먼저 성공한 나라는 아시리아(Assyria)였다.

헴 어족계통의 아시리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지만 장기간 메소포타미아의 주된 세력 밖에서 그 영향을 받으며 미미한 존재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아시리아가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기원전 2000년이 후반 미 탄 네가 히타이트의 압력으로 쇠퇴한 결과, 미 탄이 너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한 후부터이다. 티그리스 상류에 위치한 수도 아시르를 중심으로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해, 기원전 12세기 말 경에는 북으로는 흑해,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에까지 이르렀다.

아시리아는 이러한 정복과 팽창과정에서 피정복민 전체의 강제 이주, 대학살, 약탈, 파괴 등 잔인한 군국주의의 성격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오리엔트서의 전환기의 격동에 휘말린 탓인지, 기원전 1000년이 초까지 비교적 잠잠하였던 아시리아는 재빨리 제철 기술을 배워 철제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군대와 전차를 갖고 오리엔트의 통일을 위한 정복 전쟁에 나섰다. 그리하여 기원전 8세기 말경에는 드디어 오리엔트 전체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수도를 니네베로 옮겼다. 아시리아는 니네베에 도서관을 만들어 수메르, 아카드 이래의 문헌을 수집하는 등 문화적인 면도 있으나 역대의 왕은 사자와 같은 맹수사냥을 즐기는 사나운 정복자였고 그들의 대제국도 오래 가지 모샇였다.

기원전 7세기 말 아시리아제국은 이란고원의 메디아와 바빌론의 칼데아 왕조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니네베가 파괴됨으로써 붕괴하였다. 그 후 이집트와 리디아를 포함하여 4국이 정립하는 형세를 이루었으나 주도권을 잡은 것은 카데아왕조의 신바빌로니아왕국이었다. 특히 네부카드네자르 2세 때의 바빌로니아왕국 번영은 고바빌로니아 왕국의 번영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으며, 수도 바빌론은 오리엔트에서 제일가는 국제적 대도시가 되었다. 헤브라이인의 이른바 '바빌론유수'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신바빌로니아왕국의 번영도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이란고원에 위치하여 메디아에 신중하고 있던 인도-유럽어족의 페르시아(Persia)의 키루스(Cyrus, 557~529 B.C.)는 메디아 왕위를 빼앗고, 리디아를 정복한 후 바빌론을 점령하였다. (538 B.C). 다음 캄비세스(Cambyses, 529~522 B.C.) 때 이집트를 정복하고 다리우스 1세(Darius 1 그 영토를 더욱 확장하여 오리엔트 전체를 완전히 통합하는 대제국을 확립하였다... 페르시아의 문화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그들의 종교였다. 예언자 조로아스터(Zoroaster, 기원전 6세기)가 창건하였다는 조로아스터교는 처음 지혜의 신인 이후라-마즈다를 숭배하는 지적을 하고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점차로 광명의 전신에 대한 암흑 악신의 도전과 투쟁이라는 이원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명의 선한 신인 이후라-마즈다를 따르는 자는 영원의 생명과 행복을 얻게 되고, 악신에게 가담한 자는 지옥의 불에 파멸될 것이라는 교리가 생겨나고, 유력한 승려계급이 형성되었다. 광명의 신을 받들기 때문에 배화교라고도 부르며, 그리스도교, 그리고 후에는 이슬람교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에도 전해졌다.

 

 오리엔트사회와 문화의 한계

  로마인이 '빛은 동방(오리엔트)으로부터'라고 말한 것처럼 오리엔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문자를 가진 문명단계로 발전하고, 기원전 3000년기에 짜임새있는 사회와 전제국가, 그리고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켰다...이러한 사회구조의 정체성은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이에 따라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문화의 틀도 되풀이되고 계승될 수밖에 없었고, 마술적인 사고가 또한 새로운 발전을 억제하였다.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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