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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오리엔트의 사회와 문화

  제2절 이집트

  역사
  나일강변의 신석기 사회가 문명단계로 발전한 것은 기원전 5000년 기로부터 4000년이기에 걸쳐서이다. 선왕조기라고도 부르는 이 시기에 나일강변의 토템 씨족의 촌락들은 도시로 성장하고, 도시를 중심으로 그리스인이 노 메스(nomes)라고 부른 지역적인 단합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노 메스가 합쳐서 상·하 왕국이 형성되고 기원전 3000년을 좀 지난 무렵, 상왕국의 메네스(Menes)왕에 의하여 통일왕국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메네스왕을 포함하여 초기왕조는 아직도 반전설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고, 이집트의 역사가 확실해지는 것은 제3왕조로부터 시작되는 고왕국 시대(2850~2200 B.C.)부터이다.

  멤피스(Memphis)를 수도로 한 고왕국 시대는 이집트의 발전기요 번영의 시기였다. 지금도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기제(Gizeh)의 거대한 피라미드들은 제4왕조기(2600~2500 B.C.)에 건설된 것으로서, 당시 파라오의 절대적인 권력과 국력의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고왕국도 말기에는 혼란 상태에 빠지고, 그것이 다시 수습되어 견고한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제11왕조기(2100~2000 B.C.)의 일이다. 새로이 수도를 테베(Thebes)로 옮긴 중왕국도 얼마 안 가서 쇠퇴하고, 마침내 소아시아로부터 침입해 온 아시아계통 힉소스(Hyksos)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80~1580 B.C) 제 17왕조기에 이집트는 힉소스를 몰아내고 신왕국을 수립하였다. 신왕국 시대(1580~1090 B.C.)의 이집트는 고왕국 시대의 국력과 번영을 되찾고 크게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힉소스가 전해준 말이 끄는 전차로 강화된 군사력을 가지고 제국주의적인 팽창정책을 썼다. 그 결과 이집트의 세력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로부터 멀리 유프라테스 상류에까지 미치게 되었으며, 소아시아로부터 남하하는 히타이트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나 신왕국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그 세력이 기울어지고 외부로부터는 이른바 해상 민족에게 시달림을 받는 등 쇠퇴하여 기원전 12세기 이후에는 리비아(Libya), 에티오피아(Ethiopia) 등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제26왕조기(663~625 B.C.)에 일시 부흥의 노력이 행하여졌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페르시아( 525 B.C.), 알렉산더대왕( 331B.C.) 그리고 로마에( 30 B.C.) 각각 정복됨으로써 이집트의 고대사의 막이 내려지게 되었다.

  정치와 사회구조
  이집트는 고왕국 시대에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성했으며, 그것은 동양적 전제주의 국가였다. 이 전제국가 지배자의 칭호는 '큰집'이라는 뜻을 가진 파라오(pharaoh)였다. 파라오는 신의 후손이요, 신적인 존재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국가요 정부였으며, 정치와 종교는 파라오에게 결합하여 있었다. 전 국토가 이론상으로는 파라오의 소유였으며, 상업이나 농업 등 모든 경제활동이 그의 통제 속에 있었다. 왕실에 납부되는 모든 생산물은 상, 하 이집트의 두 개의 창고에 수납되었으며, 일찍부터 2년마다 전국의 토지, 수확량, 가축의 수효, 왕실 창고의 재고량 등의 조사가 실시되었다.

  성스러운 절대적인 지배자인 파라오 밑에 그를 보좌하기 위한 승려와 관료들이 있었다. 관료조직은 오늘의 재상과 장, 차관에 해당하는 직책이 있고 그 밑에 각종 가공 분야별 부서가 있었다. 이 가공작업에는 주로 노비가 종사하였으며, 빵의 제조, 가마니와 새끼줄의 제조, 탈곡, 직조 등이 행하여졌다. 이러한 행정기구의 실무자로서 많은 서기가 있었는바, 그들은 문자를 독점하고 큰 자부심을 가졌으며, 또한 실제로 존경받기도 하였다.

  피라미드는 그대로 이집트의 사회계급 구성을 상징하고 있다. 파라오를 정점으로 하여 그 바로 밑에 중앙의 고위관직자와 지방 장관 등 소수의 지배적인 귀족층이 있고, 일반승려와 서기를 비롯한 하급 관리, 상인, 공인 등이 일종의 중간계급을 형성하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과 노예는 피라미드형 계급구조의 최하부에 속하였다. 노예는 그 대다수가 전쟁포로였고 피라미드 건조나, 궁전 또는 영지 내의 각종 육체노동에 혹사당하였으나, 생산노동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 일은 없고, 따라서 이집트의 사회생활이나 경제생활의 유기적인 구성요소는 아니었다. 농민은 실질적으로 토지에 결박된 예종이나 다름없고, 이집트의 관개농업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생산계층이었을 뿐 아니라, 많은 부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상인이나 공인은 스스로 농민보다 그 지위가 높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러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사실은 농민이나 다름없이 예속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계급구조는 인도의 카스트와 같이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중왕국 시대에는 중간계층이 진출하고, 신왕국 시대에는 승려계급의 세력이 증대하는 등 사회적 변동도 있었으나, 사회구조의 기본적인 틀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문화

  이집트의 농경사회나 도시는 저마다 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다신교적인 신앙 속에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낸 신은 매의 신 호루스(Horus)와 태양신 라(Ra) 또는 레(Re)였으며, 중왕국 이후 수도가 된 테베의 수호신인 아몬(Amon) 또한 널리 숭배되었다. 이집트의 생명인 나일강과 농업의 신인 오시리스(Osiris)는 사악한 동생 세트(Set)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대지와 풍요의 여신이며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Isis)는 전 국토를 헤매면서 오시리스의 사지와 몸을 찾아 그의 생명을 부활시켰다. 이 신화는 죽음과 부활, 농산물을 포함한 식물의 성장과 고사를 상징하고 있거니와, 호루스는 오시리스의 아들인 동시에 파라오는 호루스의 화신이라고 생각되었다.

  오시리스의 신화에도 보이듯이 이집트인은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은 일단 사람의 몸을 떠나지만 귀족들의 경우 그 영혼이 다시 시체로 돌아와서 죽은 후에도 생활이 계속된다고 믿었다. 바로 이러한 신앙으로 인하여 거대한 피라미드가 건조되고, 영혼이 돌아올 수 있도록 미라가 제조되고, 피라미드를 지키듯이 스핑크스가 그 옆에 세워졌다. 중왕국 시대 이후에는 너무나 사람 눈에 띄고 도굴이 심한 피라미드를 피하여 파라오의 무덤을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마련하게 되었다. 룩소르 근처에 있는 이른바 '왕가의 골짜기'도 이러한 왕실의 묘지인바, 1922년에 그곳에서 투탕카멘(Tutankhamen, 1361~1352 B.C.)의 무덤이 거의 원상에 가까운 상태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이집트의 종교사상 매우 특이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파라오가 아멘호테프 4세이다. 그는 역사상 최초의 이상주의적인 종교개혁가로서, 재래의 다신교를 폐지하고 태양신인 아톤(Aton)을 신봉하는 윤리적인 일신교를 만들어 이를 넓히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이 크나 톤이라 개명하고 수도를 테베로부터 아마르나로 옮겼으나, 그의 종교개혁은 실패하여 당대로 끝나고 말았다.

  나일강의 홍수와 이에 의존하는 관개농업의 필요와 자극으로 천문학과 측량술이 발달하고, 산수와 기하학도 발달하였다. 이집트인은 나일강이 매년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것을 관찰하고 태양력을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즉, 1년을 365일로 잡고, 이를 30일 단위로 12개월로 나누고, 남는 5일은 축제일로 정하였다. 한편 기하학의 발달은 거대하고 어려운 피라미드 건조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집트의 의술 또한 마술적인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면서도 병자에 대한 구체적인 관찰에 입각하여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신성문자(Hieroglypy)로 알려진 그림문자가 주로 사용되었으나, 이의 행서체 내지 초서체도 있었다. 이집트인은 나일강변에서 자라는 파피루스(Papyrus)로 만든 종이에 갈대의 펜과 유연으로 만든 잉크를 사용하여 기록하였다.

  이러한 파피루스에 기록된 문학작품으로서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별로 많지 않으나 이집트 문학이 시, 단편소설, 역사 등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집트의 예술은 피라미드, 스핑크스, 신전 등 거대함을 자랑하는 건조물로부터 신전의 벽화와 각종 장식, 대소의 조각, 섬세한 솜씨를 보여주는 금은보석의 세공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집트의 예술은 이미 이루어진 양식이나 틀을 전통적으로 답습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그런대로 그들의 예술적 감각이 범상치 않았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어떤 면에서는 판에 박은 듯한 이집트 예술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이 아마르나시대(ca. 1417~1358 B.C.)의 예술이다. 이는 종교개혁을 시도한 이 크나 튼 시대의 예술로서 전통적인 양식이나 틀을 깨어버린 생동감에 넘치는 자연주의 경향의 예술이며, 이 크나 톤의 왕비 네페르티티(Nefertiti)의 두상은 아마르나 예술의 대표적인 걸작의 하나이다.

 

민석홍, 제2판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pp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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